2011/05/10 23:30 : 무너진 도서관에서

5/6일 휴가를 내고 1박2일로 문경에 갔다. 이화령을 넘었고 조령관문을 보고 가은 석탄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자 오후 다섯시가 지났다. 하지만 석탄박물관에서 봉암사까지 멀지 않았고 이십여년전의 비포장 자갈길이 포장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 봉암사로 갔다.

왕복2차선 좁은 길은 다를 것 없지만 포장은 되어 있다. 도착해보니 굳게 닫힌 산문은 아직도 닫혀있다. 세번 와서 세번 다 절 구경은 못했지만, 절 앞의 개울과 바위 만은 유구하다. 하지만 이십여년전 묵었던 민박집(당시에는 집 한채만 있었다)은 찾을 수가 없다.

닫힌 봉암사는 우리 불교사에서 막중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그 의의도 크다.

1. 희양산문 봉암사 : 4조 도신계열의 구파선종 + 국내파 산문

대한불교 조계종은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의 개산조인 도의선사를 개조로 하고 보조국사 지눌을 중천조로 하며, 고려말에 구산선문을 통합하고 조계종이라고 한 태고 보우국사를 중흥조로 한다. 이에 대하여 퇴옹 성철스님은 '도의국사는 가지산문이고 보조국사는 사굴산문이니 법맥이 상전(相傳)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다른 법맥을 같은 법맥으로 할 수 있느냐?' 임제종의 종풍을 이어받은 조계종의 종조는 보조국사가 아니라 태고 보우국사라는 주장을 펼쳤다.

따라서 조계종은 육조 혜능의 남종선, 마조 도일의 조사선을 바탕으로 임제종을 선풍으로 한다. 이는 신라말 구산선문 개산조들 중 8명이 비슷한 시기에 당나라에 유학을 했는데, 시기적으로 달마가 동쪽으로 온 지 10대째에 달하는 싯점으로 아직 임제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혜능 - 백장 - 마조 - 남천 - 조주로 이어지는 남종선의 최극성기에 해당하던 시점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묵조선으로, 현재의 간화선은 송나라 때 임제종의 제자 대혜종고에 의해 체계화된 것으로 고려조에 임제종이 들어오면서 함께 유입된 것 같다.

산문의 개산조의 면면을 보면, 7개 산문이 6조 혜능에서 남악 회양(7대) 그리고 마조 도일(8대)의 제자들(9대)인 서당 지장, 강경 회휘, 남천 보원, 마곡 보철, 염관 제안의 제자이며, 1개 산문은 육조 혜능에서 청원 행사(7대)의 법계이며, 조동종의 개조인 동산 양가(11대)의 제자인 운거 도응(12대)에게 구법하였으니, 대체로 달마의 10대 법손으로 조주 종심과 배분이 같다.

반면 회양산문인 봉암사의 개산조인 도의선사는 유일한 국내파이다. 선종이 신라에 소개된 것은 가지산문의 도의보다 150년 앞서 법랑스님이 6조 혜능의 법조가 되는 4조 도신에게서 전수받았으나, 당시 신라에 선풍을 일으킬 풍토가 성숙되지 않아 명맥만 이어오다가 고손제자 도의(지증대사)에 이르러 산문을 열고 선풍을 일으키게 된다.

6조 혜능은 중국 선종의 발달에 있어서 중추적인 인물이다. 중국 선종은 달마가 온 이래 <능가경>을 소의경전으로 해왔기에 능가종이라 했는데, 6조 혜능에 이르러 <금강경>의 간략한 점을 들어 소의경전이 되고, 우리 조계종에서도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한다.

혜능은 집이 가난하여 어릴 적부터 나무를 해다 팔던 일짜무식에, 오랑캐 출신이라고 전해진다. 나뭇짐을 해오던 어느 날 누군가 금강경을 읽는 것을 듣다가 홀연히 깨닫고 출가를 했다고 한다.

그의 출신은 불법 아래 모두가 평등하며, 바로 마음에 들면 누구라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고(直指人心 見性成佛), 일짜무식이라 불경을 한줄 읽지 못해도(不立文字), 이론적인 백그라운드 없이도 깨닫기만 하면 팔만법문을 다 이해할 수 있다(敎外別傳)는 복음을 주기는 했지만, 돈오(頓悟: 갑자기 깨달음)를 강조함으로써 수행없이도 재수 만 좋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깨달음을 로또화했고, 조사선은 중시하되 문자선(경전 등)을 천시하는 경향을 낳게 된다.

봉암사 즉 희양산문은 4조 도신의 법맥으로 남종선의 혁명적이고 화려한 남종선 계열이 아니라, 북종선으로 수행의 과정을 중시하고 원론적이며 소박하다.

이런 면에서 6조 혜능 이전의 선불교, 달마 이전의 불교, 대승 이전의 원시불교를 되돌아 볼 필요도 있다.

2. 불교 정화운동 : 불교의 말법시대의 도래

1947년 10월에서 1950년 3월까지 50여명의 승려가 봉암사에서 결사를 하고 수행을 한다. 이를 봉암사 결사라고 한다. 이 결사 덕분에 1982년부터 산문을 닫아걸고 수행만 하는 청정수행도량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던 승려들 가운데 4명이 조계종정으로 추대되었고, 6명이 총무원장을 역임했다는 점에서 결사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또 결사에 참여했던 승려들이 1954년부터 시작한 불교 정화운동의 주축이 된다.

2008년 조계종의 통계자료를 보면, 조계종은 25개 교구 총 2,501개 사찰을 관할하고 있으며, 승려는 예비승 3.116명을 제외하면 10,744명에 달한다.

반세기 전인 1954년 이승만의 정화유시가 있던 당시의 승려분포를 보면, 대처승이 7,000명에 달하는 반면, 비구승은 200여명에 불과했다. 그러니 봉암사 결사에 비구승 1/4이 참여했다는 이야기이고, 당시 200여명에 달한 비구승 대부분은 조계종이 출범(62.4월)한 이후, 머릿수의 10배 이상인 사찰을 바탕으로 땅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주지는 물론 종단 내 요직을 두루 거쳤을 것이며, 대덕은 자동빵, 대종사 품서는 못받아도 종사까지는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반세기 동안 개신교와 천주교의 약진에 밀려 불교신자의 비율은 하향곡선을 긋고, 절이란 곳은 관광이나 가고 나이든 보살들이나 가는 곳으로 전락한 반면, 존경할 수 없는 스님만 50배 이상 늘어나는 기적이 일어난다.

이러한 기적은 우리 불교에 있어서 지금까지는 비극인 동시에 앞으로는 희망일 것이다.

해방 후의 자율적인 정화운동과 달리 1954년에 있었던 2차 불교 정화운동은 불교 내의 자율적인 정화운동이 아니라, 개신교였던 이승만의 정화유시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헌법 상 정교분리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5월21일 심심한데 코딱지를 후비자는 심정으로 '처자를 거느린 사람은 승려가 아니므로 사찰에서 물러가라'는 유시를 내림으로써 대처 - 비구 간 갈등을 촉발한다. 이 유시를 근거로 비구승들은 '수행사찰 분배요구'를 '종권' 다툼으로 연장시킨다.

대처승들의 자진환속과 종권이양을 요구했으며, 쪽수가 열세임에도 그해 10월 9일에는 조선불교의 총본산인 태고사를 강제 접수하고 간판을 조계사로 바꿔단다. 대처승 측이 가열찬 탈환작전을 벌이자, 믿을 것이라곤 각하라고 비구측은 경무대를 4차례나 방문하여 대처승 추방 협조를 거듭 호소한다. 종권 다툼 탓에 비구 측은 정권에 의존하게 되고, 이승만은 이리 망하나 저리 망하나 기독교에 손해날 것은 하나도 없다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1955년 8월에 비구 측이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고 조선불교 교헌을 제정하고 비구 독자적인 집행부를 구성한다. 이에 대처 측은 승려대회 무효라고 하며 법적 투쟁을 개시한다. 결국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자 대법원에서 비구 단독의 '사찰정화대책위원회 결의가 무효'라고 환송판결(60.11.24일)을 내린다. 그러자 비구, 비구니 500여명이 대법원에 난입하고 난동을 부려 1961.3월 대법원은 비구승단을 법적으로 인정한다. 그 후 5.16 군사정권이 출범하고 "분쟁사태가 계속된다면 묵과하지 않겠다"(62.1.13일)는 군사정권의 협박 하에 명칭을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하는 비구 대처 통합종단을 구성하고 종헌을 제정한다.(62.2.28일) 하지만 불교재건비상종회 8차 회의에서 '출가독신 수행자만 승려로 인정'하는 것을 의결하고 9차 회의에서 새종단을 구성하고 4월14일 문교부에 정식 등록함으로써 통합종단이 아닌 사실 상 비구 중심의 조계종이 한국불교를 대표하게 된다.

이에 따라 대처 측이 '조계종 종헌 무효확인 및 종정추대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62.10.4일)하였으나, 군사정권은 대처 측의 반발을 꺾는다. 결국 대처 측은 1968년 11월 통합종단 백지화를 선언하고 1970년 4월 한국불교 태고종으로 독자노선을 선언함으로써 비구승과 대처승은 조계종과 태고종으로 각각의 종단을 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조계종은 정권과 결탁한 탓에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고, 분규과정에서 사찰재산의 유실과 임의적 처분 등의 손실을 초래했고, 불교재산관리법이라는 불교발전에 족쇄를 채우는 악법을 탄생시킨다. 또한 사찰 접수과정에서 동원된 폭력승의 양산으로 승려의 자질이 저하되었으며, 비구의 이익 중심의 비구 대처 분규는 조계종 출범 후 문중 싸움, 일승회 보람회 금강회 등 비구 종단 내 분규로 이어졌고 결국 수입이 짭짤한 강남 봉은사를 총무원 직할사찰로 하는 과정에서 좌빨 스님론까지 대두되는 등 정법을 이끌어야 할 종단 자체가 말법시대의 난맥 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승만의 정화유시로 촉발된 정화운동은 정화는 커녕 우리 불교를 더욱 타락하고 추잡하게 만들었으며, 우리 조계종이 만만한 탓에 이승만과 구군부에 의해 대처승들이 조직적으로 법난을 당한 것처럼, 결국 1980년 신군부는 "불교계가 사이비 승려와 폭력배들이 난동·발호하는 비리 지대로서 자력으로는 갱생의 힘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면서, “사회 정화 차원에서 철퇴를 가한다”고 사찰과 암자 5,731곳을 수색하여 승려 등 불교계 인사 153명을 강제로 연행했고, 이 과정에서 폭력과 고문 이 저질러졌다고 한다. 이른바 10·27 법난이라고 불리우는 이 사건은 신군부가 어떤 의도와 목적에서 자행한 것인지 아직도 오리무중*송월주 총무원장이 신군부 지지성명을 내지 않고 5·18 광주민주화 운동 현장을 들러 성금을 전달했기 때문에 응징의 차원이다 혹은 만만한 불교계를 두들김으로써 천주교 및 개신교 등 종교계에 너희들도 까불면 이렇게 된다는 협박성 메시지 차원에서 시행되었다고도 볼 수도 있다. 이지만, 우리 불교계가 사이비 승려와 폭력배들이 난동 발호하는 비리 지대로 폄하된 것이 몽땅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법난에도 불구하고 존경하옵는 성철스님은 1981년 1월 20일 6대 종정에 취임하는 자리에서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라는 외침 대신 신군부에 쫄았는지 대중의 민주에 대한 열망에 눈 감은 채, 산문에 틀어앉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개탄스런 법어를 내린다. 취임법문을 좀더 들여다 보면 "시비와 선악이 본래 공하고 마군과 제불이 원시동체입니다."라고 산은 산이요의 뜻을 부연하여 명확히 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광주사태와 민주탄압의 신군부를 질타하고 정의를 물을 때, 성철스님께선 "신군부나 정통성을 지닌 정권이나 본래 다 공하고 다를 것이 없다. 괜히 까불다간 다친다. 조용히 살자!"고 속삭인다.(여기를 지워놓은 것은 '시비선악...' 이 1986년 서의현 총무원장 취임식의 법어라는 지적에 따라 지움)

3. 봉암사 결사 : 신권위주의의 탄생

다시 돌아가 봉암사 결사로 돌아가보면, 성철스님은 첫시작이 청담, 자운, 우봉 네사람이 시작했다고 하면서 결사의 주된 내용은 부처님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식의 결사는 '근본으로 돌아가자!'라는 중대하고도 심대한 언명이 되겠으나, 자칫 잘못하면 바루는 무엇으로 할 것이냐, 장삼은 어떤 것으로 할 것이냐, 육환장은 어떻게 만드느냐, 삿갓을 쓸 것이냐 말 것이냐 등의 시시콜콜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는데, 성철스님의 회고을 보면 그런 지엽말절에 집착하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청규를 세우고 그를 준수하는 것만으로도 조선시대에 천대받던 불교의 자존심을 세우고, 식민지의 불교를 바로 하는 것일 수는 있다.

또 성철스님의 회고록을 보면, 경허에서 만공으로 이어지는 구한말의 선풍과 일제강점기의 조선불교의 유신을 주창한 만해 등이 있었음에도 승단 내에 아무런 규약이나 계율, 전통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느낌이다.

그는 보살계를 한다고 신도 수백명을 봉암사 절방에 모아놓고 스님들을 천대했던 이조시대의 관행을 바꾼답시고, 36살 먹은 스님께서 반말 찍찍해가며 "당신네가 여태까지 절에 다니면서 부처님께는 절했지만 스님네 보고 절한 일 있나? 생각해 봐 스님은 부처님 법을 전하는 당신네 스승이고 신도는 스님에게 법을 배우는 사람이야 그러므로 신도들은 제자고 스님은 스승인데 법이 거꾸로 되어도 분수가 있지 스승이 제자보고 절하는 법이 어디 있어, 이조 5백년 동안에 불교가 망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그것은 부처님 법이 아니야 부처님 법에는 신도는 언제나 스님네한테 절 세번하게 되어 있어 그러니 부처님 법대로 할려면 여기 있고 부처님 법대로 하기 싫으면 오지 말아 그렇다고 꼭 우리 말대로 하라는 말 아니야 하기 싫은 사람은 나가면 돼."라고 설파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스님의 이런 사고방식이야말로 존경받기를 욕심(貪)하고, 우습게 보는 것에 분노(嗔)하며, 자신을 모르는 어리석음(痴)이자 권위주의가 아닐까 싶다. 그가 해인사 조실로 있을 때 삼천배에 집착했던 이유도, 자칫하면 애써 세워놓은 자신들의 공허한 권위가 무너져버릴 수도 있다는 권위주의적 사고에서 발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들의 권위에 집착하기에 앞서 해방 이후 불교가 우리 사회를 위하여 또 신도들을 위하여 한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묻고 싶다.

문경 봉암사는 지증대사가 지세를 보고 "여기는 스님의 거처가 되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 말은 진짜 도적을 뜻할 수도 있겠지만, 산문에 칩거하신 스님들이 수행하고 마음내기에 따라 도적이 될 수도 대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의 은유일수도 있다.

하심(下心)이라고 스님들은 스스로를 일러 스님이라 하지 말아야 한다. 스님이란 자칭할 것이 아니라, 타칭이고 존칭이라는 것을 두렵게 여겨야 할 것이다.

불기 2555년 석탄일에...

2011/05/10 23:30에 旅인...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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