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멀리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봄은 라일락 향기와 함께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제 봄의 향기와 그 향기에서 시작되는 열정과 같은 것은 더 이상 움트지 않는 것 같다. 더 이상 노래와 같은 것, 춤을 추고 싶다거나 오랜 산보로 몸을 지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가끔은 먼 곳까지 천천히 걸어보고 싶다. 잊어버린 이름들이며, 순간들로부터 영원 속으로 흘러내려간 무수한 것들을 더듬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안타깝게도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기에는 이 봄은 너무 짧다. 나에게 기대되는 앞날이란 길지 않고, 지나간 날들도 후회로 얼룩진 것들이기 때문에 기억 속에서 무엇을 찾아낸다는 것은 고통스럽기도 하다.

나의 산문들은 불행한 유산이며, 식어버린 화로에서 안타깝게 불씨를 찾아내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거리다. 그래서 기록이란 때때로 고통스럽기도 하며, 치부를 드러낸 것처럼 화끈거리거나, 어리석음이 또 다른 후회와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습게도 그런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이 세계가 인간에게 가하는 모멸과 치욕은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고, 회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세계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밥을 먹고 숨을 쉰다는 것은, 이가 갈리는 일이지만, 마침내 협잡의 산물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살아있어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이, 광기와 어리석음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갈망들 속으로 나를 이끌고 있다. 아직도, 아직도 말이다. 어리석음이 무죄라는 것은 알지만, 초라한 자신의 삶이 한번도 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막막하다.

봄이 지나간다. 목련꽃잎과 거리를 구름처럼 물들였던 벚꽃들이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을 때, 까마득한 슬픔이 몰려왔다. 해마다 피고 지는 꽃들인데 어찌하여 이 봄에만 알 수없는 서글픔이 압도하는 것인지? 영속될 것으로 믿어왔던 어제의 오늘들이 홀연히 사라져버렸고,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오늘의 오늘 앞에 서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내일을 기다리고 있는 나의 초라한 모습을 꽃잎이 사라진 거리에서 마침내 마주했기 때문일까?

헛된 과거를 바라보며, 기대할 것 없는 허망한 내일을 맞이하는 것이란, 고통보다 더한 우울에 빠지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생을 깊이 생각하다보면, 자살을 꿈꾸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치욕스럽다 못해 찬란한 이 세상을 바라보면, 간신히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대견스럽다.

살만한 이유가 없는데, 산다는 것은 어리석지만, 이유가 없는 세상의 저 빛과 그림자를 밟으며, 나는 살아가고 있다. 그냥!

이제 햇빛이 난다. 빛이 드는 거리는 찬란하다. 도로 위로 나무가 자라고,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다는 것, 그 자체 만으로도 기적이다. 다리가 늘씬한 저 아가씨는 얼마나 생기에 차 있으며, 웃음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때때로 대지를 둘러싼 아름다움을 보면 미칠 것 같아 오히려 고통스럽다.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싶다거나, 노을이 끝나는 곳까지 마구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란 힘들다.

이러한 충동이야말로 사람들을 살게 하거나, 자살에 이르게 하기도 하고, 마침내 사랑에 빠지게 하는 지도 모른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자살을 한다거나, 산다는 것이나, 사랑을 한다는 것들 모두가 미친 짓에 불과하다. 우리가 이렇게 미쳐 날뛰고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이 이성적이라는 말은  거짓일 뿐이다.

늘 충동에 살고, 지겨움으로 나날을 보내는 것이 사람이다.

겨울로 진입하는 토요일,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부천으로 향하는 전철을 탔다. 전철에서 무수한 집과 지붕이 초겨울의 햇빛 속에서 서로 겹치고 흐트러지며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는 것을 보았다. 집과 골목과 야트막한 언덕이 세상의 광막함과 먼지 속에 멀어져가며 소실되고 있었다.

초라한 삶들이 좁다란 골목과 전신주 아래의 그늘 속으로 깃들고, 좁은 생애의 마당에는 손바닥 만한 햇빛조차 들지 않는데, 그토록 긴 시간을 그늘 아래에서 서성이다가, 홀연히 죽음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숙명 속에서 나는 잠시 체념을 했을지도 모른다. 고가철로 밑의 촘촘한 지붕 위로 1호선의 그림자는 하염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말았다.

철커덩거리는 전철의 바퀴소리를 들으며, 손잡이를 잡은 채 앞에 앉은 아줌마의 무표정한 얼굴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뚜렷하게 아줌마의 얼굴을 보고 있었고 12월이었으나, 아줌마의 코 끝이 흐려져가며, 창을 넘어오는 오월의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낮잠을 잘 자고 난 것 같았다. 뿌듯했다. 눈을 뜨자 유년의 기억 속에서 마주했던 최초의 그 빛이 내가 누워있는 침대 위에 떨어져 내렸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위에는 종이상자들이 몇 개 놓여 있었고, 벽에는 낡은 옷가지들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습기 먹은 먼지 속에는 담배냄새가 찌들어 있었다. 단칸방이었다. 외로움이 나의 가슴에 차오르고 있었지만, 외로움은 오래된 친구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죽음이 가슴까지 차오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생애의 온갖 추억들을 더듬으며,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열망 그리고 아무런 환상이 없었다. 죽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생애의 모든 추억들을 그토록 짧은 시간에 떠올릴 수 있다니! 최초의 기억에서 부터, 어린 날 방에 놓여 있던 책상의 다리, 이웃집 담벼락의 장미와 벽돌의 균열 등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떠오르고, 사랑과 미움 그리고 풍경, 식구들의 아득한 목소리, 가슴 속의 수많은 아픔, 그리고 생의 정점들이 폭발하듯이 교차했다.

명멸하는 기억 속에서도, 주체할 수 없이 차오르는 눈물 속에서도, 가슴은 고요했다. 그것은 슬픔 때문 만이 아니라, 삶이 가진 그 다채로운 모습이 추억으로 빛바래가며 허물어져 내린다는 것, 그리하여 미묘한 아름다움이 된 후, 막연히 사라져버린다는 것에 대한 희열이었는지도 모른다. 슬픔과 희열에 들떠, 한번도 용납하지 못했고 늘 생경하기만 했던, 나의 삶을 처음으로 애절한 심정으로 포옹했다.

스쳐지나온 삶과 나 자신을 용서했을 때, 다시 창 밖에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함께 온갖 세상의 소리들이 넘쳐흘렀고, 공기는 어느 때 보다 상쾌했다. 일어서서 조그만 창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세상을 보고 싶었다. 일어설 기운이 없었다. 얼굴에 닿는 마지막 햇살이 따스했다. 좀 더 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이만큼 살았으면 그만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용히 웃었다. 그때 죽음이 나른하게 몸 속 곳곳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다. 열두시가 조금 지난 경인 전철 어느 아줌마 앞에 나는 서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생애의 마지막 순간 속에 들어서 있었을까? 아마 찰라에 불과한 시간이었으리라. 그 짧은 동안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했지만, 지하철에 스며드는 햇빛과 철커덩거리는 전철의 소리는 그대로 였다.

한시에 있는 결혼식을 본 후,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1호선 용산에서 내렸다. 어두운 지하철로 집으로 가기 보다, 낡은 도시가 겨울로 들어가는 풍경이 보이는 국철을 타기로 했다.

철로변의 포플러는 강가로 얼룩진 가지를 드리우고, 철길의 자갈은 겨울 오후의 빛을 거칠게 반짝이고 있었다. 강과 도시의 뒷모습이 창을 스쳐 지났다. 때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한가한 객차의 복도를 스쳐 지나곤 했다.

열차가 서빙고를 지날 때, 지금의 나는, 그 날 정오경 현재로 부터 이득한 미래인 죽음의 순간으로 역행했던 것처럼, 수십년 전으로부터 시간을 거슬러 내려와 마주한 미래의 환상이 아닐까 했다. 제발 그랬으면 했다. 아직도 이태원의 지하 카페에서 어느 소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상상할 수 조차 없이 무의미하고 지친 중년의 어느 날을 잠시 꿈꾸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하지만 국철 안으로 스며드는 햇빛은 너무 투명했고, 내가 알던 거리의 풍경들이 심드렁하게 스쳐 지나며, 한양대학의 건물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왕십리였다. 국철에서 내려 5호선 쪽으로 간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익숙했다.

경고음을 울리며, 5호선이 다가왔다. 밝은 철길보다, 형광등으로 밝혀진 지하로 내려가면서 오히려 현실로 현실로 아득하게 내려서는 것 같았다. 거대한 지하 동굴, 시멘트 침목, 그림자처럼 어슬렁거리는 승객들, 더 이상 생각이 흘러가지 않도록 막아선 타일 벽, 신문지조각, 지상의 번지수인 <왕십리>라고 쓰인 이정표, 이런 것들은 너무도 뚜렷하여 나는 아무 것도 꿈꿀 수 없었다. 지하철을 탔고, 맞은 편에 앉은 여자 승객의 얼굴이나 다리를 보았다. 심심하면 뒤돌아서 있는 여자의 엉덩이를 쳐다보며 그녀의 앞모습을 상상하기도 한다.

현실이 시간 속으로 흘러가면, 추억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난 이십몇년 동안 현실의 어느 지점이 추억이 되고,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주는 또 다른 꿈이 된 적은 없다. 있다고 해도 추억이라고 하기에는 그 내용은 몹시 빈곤하다. 그것들은 기억들일 뿐이다. 이런 빈한한 나날들 속에서 그나마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고, 숨 쉴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마저 지금 기대어 살고 있는 그 미미한 오랜 시절들의 추억이었다면, 생의 한 부분 중의 또 한 부분에 기대어, 간신히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야금야금 빨아먹던 추억마저도 한쪽이 무너지고 말았다. 무너진 추억은 뭔지 몰라도 아슬아슬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의 기억이 떠올라, 위태롭게 보였던 이유를 알게 됐다. 그 추억은 거짓 위에 쌓아올려진 기억들의 더미에 불과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려 했고, 그녀가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낌으로는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의 기억은 그녀가 나에게 던졌던 몇마디의 말에 스스로가 날조한 기억을 덛붙여가며, 기어코 그녀가 나를 사랑했다는 것으로 추억을 만들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녀가 전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허접스런 기억의 지층 속에서 발견해 냈을 때, 당시에 욕정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시에 나는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육신 깊숙히 나의 살을 밀어넣음으로써... 가슴으로 확인할 수 없었던... 자신들의 사랑을, 그녀의 육신 깊숙한 곳에 아로새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지 못했던 것은, 당시의 낡은 윤리나 나 자신의 가슴 속의 도덕율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있음을 알았기에, 와락 그녀를 껴안았을 때, 서로가 의무감에 이어왔던 그 얄팍한 사랑마저 깨져버리고 간신히 내 곁에 잡아두었던 그녀가 사라져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때의 추억은 무너졌고, 나는 거짓된 추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너지고 난 후, 남은 추억이란 한움큼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마저 너무 미미하여 빛이 조만간 바래고 말 것이란 두려움이 있지만 말이다.

한줄기 남은 추억마저 삭제를 해버린다면, 하루는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직장으로 나가고, 일을 한 후 다시 돌아와 밥을 먹고 잔다는 것으로 환원될 것이다.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시간이 멈추기를 바란다거나, 어느 순간이 영원으로 흘러들기를 한 번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은, 몹시 슬픈 일임에 틀림없다. 몇 번 정도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광장에서 맞이한 밤이나, 대륙의 끝에서 부는 저녁의 훈풍과 같은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순간들은 그 뿌리에 외로움이 잔뜩 깃들어 있었고, 늘 다음날의 왁자지껄함이나 피로감들로 지워지곤 했다.

그래서 매일 저녁이면, 퇴근을 하고 지하철로부터 천천히 지상으로 올라가 낮 동안 직장에서 접어놓았던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그러나 늦은 저녁에 시작하는 하루 또한 아무 것도 아니었다. 치킨 집과 제과점, 약국, 미용실 등으로 꽉 들어찬 골목을 따라 꽃이 져버린 나무 아래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늘의 중간 쯤에 위치한 집으로 들어가 티브이를 켤 뿐이다. 그러면 하루는 그냥 이불 속으로 들기 위해서 멍청하게 생긴 잠옷을 갈아입고 이빨을 닦으며, 사라질 뿐이다.

이런 무료함을 지우기 위하여 때로 책을 읽는다. 그러면 아내는 내게 책이란 단지 생활에서 도망치기 위한 도구가 아니냐고 한다. 회사나 다니는 사람에게는 터무니없이 어려운 책이며, 그러한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과 이야기들은 누굴 즐겁게 할 수도, 쓸모도 없을 뿐 아니라, 식구들 누구도 읽어 볼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책에는 아주 값싼 진실이 있거나, 쓸데없는 농담과 수다가 있을 뿐이다. 진실이나 진리가 있는 것이나 할까? 설령 있다고 해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쓸모도 없을 것이다.

추억도 아니고 진실이기 위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맞는 지도 모른다.

어느 일요일, 항구도시인 K시에 도착했을 때, 날은 저물었지만, 아직 늦은 시간은 아니다. 삼개월 만에 다시 그곳에 왔던 것이다. 홀로 저녁을 먹기는 싫었지만,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놓고 왔다는 것을 안다. 혹시 친구들이 있지 않을까 초동으로 들어섰고, 친구들이 자주 가던 다방으로 올라간다. 계단에서 빗질을 하고 있는 여자를 지나 다방 문을 열자, 스탠드 바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 거기에서 나와 밖으로 내려간다. 계단에 있던 여자가 말한다. "왜 그냥 가시게요?", "다방인 줄 알고 왔는데, 혹시 친구가 있을까 해서...", "제가 친구 해 드리면 안 될까요?" 여자의 얼굴을 본다. 늘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보게 마련이니까. 여자의 눈이 몹시 매력적이라는 것을 느끼고, "그러기로 하죠."라고 말한다. 여자의 손에 끌려 다시 스탠드 바로 들어갔다. 자신이 자리에 앉자, 여자는 술을 따르기 위하여 스탠드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술을 팔아먹기 위해 유혹을 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밤까지 자신에게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안다. 사내는 스탠드를 임대하여 장사를 한다는 그녀와 술을 주고 받았다. 양주를 한 병 비우고 나자, 여자는 일요일 밤이 되면 더 이상 손님이 없으니, 테이블에 앉아 편히 술을 먹자고 했다. 술을 한 잔이라도 더 팔겠다는 여자의 상술이 얄팍하다고 생각했지만, 술은 취하지 않았고, 아직 호주머니에는 돈이 남아 있었다. 그러자고 했다. 여자는 자신이 초동 뒤의 마르센 호텔에 있는 나이트 클럽의 댄서였다고 말했다. 여자의 얼굴에 멈추어 있던 시선을 여자의 온 몸으로 옮겼다. 키도 크고, 늘씬했기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사내의 옆 자리로 와서, 팔을 껴안고 "오늘 손님도 없을텐데, 문 닫고, 우리 나이트 클럽이나 가요? 마르센 호텔은 말고요."라고 말한다. 사내는 호주머니 속의 돈을 대충 계산해 본 후, 그러자고 했다. 그들은 나이트 클럽으로 갔고, 함께 춤을 춘 후, 어둠 속에서 입맞춤을 하고 만다. 초동의 여관에서 여자가 "당신을 사랑해도 되죠?"라고 묻는다. 그래도 된다고 말한다. "그럼 편지를 써도 돼요?"라고 말한다. 사내는 그럴 필요가 없으며, 자주 K시에 내려온다고 말한다. 사내는 항구 쪽에서 드문 드문 울리는 무적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여자는 자고 있었다. 반쯤 벗은 여자의 늘씬한 몸을 보자 다시 욕정이 솟았지만, 일을 보러 가야만 했다. 조용히 샤워를 하고, 옷을 입은 뒤,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돈이 얼마 없었다. K시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차비와 아침, 점심값, 그리고 담배값을 꺼내 호주머니에 넣은 후, 남은 돈을 지갑에서 꺼냈다. 삼만삼천원. 삼천원을 다시 호주머니에 넣고, 삼만원을 티 테이블에 올려 놓은 후, 조용히 문을 닫고 사내는 방을 나선다.

여기에서 진실은 사랑이나, 여자의 편지가 아니다. 삼만원이다. 사랑은 믿을 수 없는 반면, 삼만원은 가혹하고, 정확한 값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침대에서 일어난 여자는 삼만원을 본다.

"사아랑? 웃기고 있네. 너는 삼만원에 불과한 여자일 뿐이야."는 남자의 속 쓰린 진실을 알아차린다. 문득 담배가 생각났지만, 한 개피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재털이의 꽁초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여관을 나와 근처의 식당에서, 홀로 아침을 먹는다.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계산을 한다. 그 돈이 남자의 돈이었다는 것을 알고, "빌어먹을!"이라고 말한다.

창녀가 일찍 늙고 추해지는 것은, 바라보고 자신의 몸과 젊음을 가꾸어야 할, 추억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미한 광채이긴 하여도 아주 조그만 사랑에 대한 기억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책 따위는 집어던져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마저 집어던진다면,

아무런 추억도 없다면,

그리고 빈한한 나의 일상들을 그만 포기할 수도 있다면...

나는 이카텐의 고원으로 갈 것이다.

거기는 먼지를 몰고오는 바람이 하루종일 불고, 죽은 잡초더미들이 딱딱하게 굳은 대지 위를 배회한다. 세상의 모든 길들은 지평선 저쪽에 정박해 있다. 그리고 길이 끝나는 곳에서 늘 노을이 피어오르곤 했다.

나의 일상이라고는 걸상을 흙벽 쪽 그늘 아래에 내어놓고, 거기에 앉아 지평선을 바라보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도 남는 것이라곤 시간 밖에 없다.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난다. 외롭고 심심하다. 외로움은 견딜 만 할 것이다. 한번도 외롭지 않았다. 외롭다고 하여도 견뎌내지 못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심심한 것은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조그만 텃밭을 내고 푸성귀같은 것을 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뭘 심고 가꾸는 것을 전혀 할 줄 모른다. 씨앗을 뿌리고 싹이 나는 그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은 몹시 고통스러울 것이다. 씨앗을 어느 정도 깊이로 심어야 할 지, 물은 어느 정도 주어야 할 지, 씨앗이 발아하고 싹이 나서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매일 물을 주며 싹이 나는 것을 기다린다는 것은, 아주 멍청하거나 현명한 사람들이나 할 일이다. 아마 씨를 뿌린지 삼일정도가 지나면 씨앗이 발아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땅을 파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텃밭을 내는 것은 포기하기로 한다.

그때부터 의자에 몸을 묻고, 지평선을 바라보며 그 황량한 광야를 건너오는 사람을 기다릴 것이다. 물론 거친 광야를 건너온 사람이 하는 외국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다. 그에게 시원한 물을 한잔 준다던지, 저녁을 지어주고 나면, 나와의 무거운 침묵 때문에, 그는 또 떠날 것이다. 그러니 아무도 기다릴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상상이나 할 것이다. 거짓된 시간들 속에서 버려졌던 추억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추억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추억이란 단지 더듬한 기억들을 모으고 거기에 살아야 할 약간의 이유들을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에 경악할 것이다.

그래서 이카텐에서 다시 도시로 돌아올 것이고, 어느 골목의 단칸방으로 들어가 남은 날들을 보낼 것이다. 기억에 남을 것 없는 하찮은 날들을 보내며, 한순간 만이라도 삶의 절정에 이르기를 기다리다 마침내,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거짓된 이 삶의 내용들이,
그녀의 육신 속에 깃들지 못했던 그 짧은 시간 때문에
흘려보냈던 거짓된 추억들이,
한번도 거짓된 적은 없으며,
그저 죽음의 정원 바깥에
뜻없이 피어나고 져버리는 꽃잎같은 것이었다고
마침내 말할 수 있을 것인가?

2007/06/03 21:35에 旅인...face
2007/06/03 21:35 2007/06/03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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