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04 09:31 : 찻집의 오후는

펜을 쓰다 보니 성격 상 단점이 드러난다.

1.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불안하다. 스케치를 하거나 드로잉을 하다보면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내가 사물의 경중을 감지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사소함과 핵심적 포인트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한 탓에 그림을 망친다. 그리면서 망칠까 봐 벌벌 떤다. 펜으로 그리는 세밀한 선묘화에 자신이 없는 탓에, 지우개를 들고 4B 연필과 같은 것으로 개칠을 하듯 그리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노안으로 펜촉의 끝이 소실되는 가물가물한 지점을 보고 있자면, 불현듯 그리고 싶어진다.

SmallGate/MyDrawing

2. 난독증이 재발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난독증이었는지 모르겠다. 자음과 모음이 섞여 소리가 난다는 것을 어린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소리와 기호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결코 읽거나 쓸 수 없었다. 남들보다 한참이 지나고 한참은 또 늦은 어느 날, 낮잠을 자고 난 끝에 문득 글을 깨우쳤다. 반면 소리와 기호 사이에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한자는 의외로 쉽게 배울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한문수업시간이었다. 수업을 빼먹고 반 옆 빈 교실(아마 기독학생회에서 토요예배 때 쓰던 것으로 기억남)에서 걸상들을 쭉 늘어놓고 누워자다 한문선생에게 걸렸다. 그는 마음씨가 착하고 학생들을 원수같이 여기지 않았으며, 한문시간이 입시에는 아무 쓸모도 없지만, 자신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준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정신이 제대로 박힌 선생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수업시간을 빼먹고 빈 교실에서 뒤비져 자는 싸가지 없는 놈을 봐 줄 수는 없었다. 귀때기를 잡아끌어 나를 교단 위에 올려세운 그는, 자신이 태어난 후 가장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너에게 인생이 얼마나 고달픈지 알려주겄다.
가설라무네 내가 너를 갈아마시겠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는 나를 갈아마시지 못했다.

그는 뻑하면 나를 교단 위로 불러냈고, '절차탁마'와 같이 쓰기 어려운 한자를 쓰라고 했다. 한획이락또 틀리면 틀린 획수만큼만 매타작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한대도 맞지 않았다. 나는 그가 부르는 한자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다 썼다. 어떤 날은 그 날 수업분의 한자를 칠판 위에 빼곡히 쓰고 들어간 적도 있다.

결국 날 갈아마시길 포기한 한문선생은 물었다.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한테 천자문같은 것 배웠지?"

뭔 말씸! 태어나기도 전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신경질을 낼 것 같아서,

"예 조금 배웠어요."

예서와 전서는 한번만 보아도 기억할 수 있는데, 초서(草書)는 그 질서를 이해하기 어렵고 기억할 수 없다.

비오는 탓에 토요일과 일요일 방구석에 틀어박혀, 초서의 부수(部首)를 들여다보았다.

한자의 번잡함 때문에 초서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서의 부수를 들여다보다가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서는 효율성보다 멋과 폼*漢代의 장초(章草)는 예서를 쓸 때 드는 시간과 공력을 초서로 단순화하여 대폭 절감하는 효율성이 중시되었다면, 왕희지와 왕헌지에 의해 발전된 후대의 금초(今草)와 광초(狂草)는 효율성을 떠나 예술성이라는 점에 집중된다. 을 위해서 만들어진 글자일지도 모른다. 초서는 결코 단순하거나 글을 쓰는데 소모되는 시간이 짧은 것이 아니다. 더 복잡하기도 하며, 붓끝을 조금만 잘못놀리면 완전히 다른 글자가 되는 탓에 글자를 쓰는데 신경을 곧추세워야 하고, 초서를 쓰는 모습을 직접보면 해서나 행서로 쓰는 것보다 시간도 오래 걸리는 것 같다. 결코 일필휘지로 휘갈기는 서법은 아닌 것 같다.

또박또박 해서로 써도 알아먹지 못할 한자를 빌어먹을 예술성이라는 것 때문에 병풍이나 한옥 기둥의 주련의 글씨를 초서로 갈겨대니 알아먹을 도리가 없다.

처가집에서 제삿날 펼치는 여섯폭 병풍에 쓰인 글은 이태백의 춘야연도리원서이다. 낡은 병풍을 다시 표구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글의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표구점도 모르고 처가집도 모를 것이다. 나도 몰랐으나 어찌저찌 춘야연도리원서를 외우게 되었고, 얼마전 제삿날에 어른들을 기다리며 병풍의 초서를 고문서 해독하듯 더듬거리다 보니 순서가 뒤바뀐 것을 알게 되었다. 처남들이 알아보았자 기분만 나쁠 것 같아 나만 몰래 알고 있다.

게다가 제삿날에 아~니~노지는 못하리라~ 춘야연도리원서와는 격에 사맞지 아니하다.

하긴 '천지()라는 것이 온갓 것들이 하룻밤 자다가는 곳이요. 빛과 그늘(時)이라는 것이 오랜 세월을 거쳐지나는 나그네노니. 떠도는 이 내 삶이 꿈과 같아서 기쁠 것이 그 얼마나 될 것인가. 옛 사람이 초롱을 들고 밤 마실 다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거시었던 거시었다' 라는 것이 제사와 꼭 어울리지 않는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3. 박물학적 지식에 놀라다

펜을 산 김에 펜글씨를 한번 배울까 싶어서 카페를 뒤져보니, 회원수가 많다는 곳의 카페지기의 펜글씨 수준이 예전의 대서방 수준이다.

그래서 탈퇴를 하고 다른 곳이 있나 찾아보니 예전에 네이버에서 알던 분이 카페지기를 하는 카페가 하나 있다. 그는 서예를 대가에게서 정식으로 배웠고, 석란에 조예가 있을 뿐 아니라, 클랑뢰베라는 초고가의 앰프를 제작하는 사람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카페에 들어가 보니 만년필이나 펜에 한해서지만, 엄청난 양의 박물학적인 자료들이 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만년필이나 펜으로 쓴 글씨 등을 채집하여 자료로 보관하고 있으며, 펜이나 만년필로 그가 쓴 글씨는 고졸함으로 추구하는 것인지 글자 간의 강약, 완급, 대소 등이 律에 맞아 운치가 있고 보는 재미가 있다.

초서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의 글씨 중에 본 일본식 약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카페 : 펜의 연금술사

2011/07/04 09:31에 旅인...face
2011/07/04 09:31 2011/07/04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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