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돌목에서

해남의 문내면 학동리 즉 전라우수영과 진도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 명량(鳴梁:울돌목)에 왔다. 와봐야지 와봐야지 하다가 마침내 온 것이다.

제2 진도대교를 건너서 대교의 밑, 여울목(鹿津) 가까이 다가갔다. 돌이 우는 여울목이라는 이름처럼 바다가 울고 있다. 넓은 서쪽바다가 좁은 명량해협을 통해 남해로 쏟아지는 소리를, 나의 답답한 철자법으로 받아적을 수는 없다. 소리는 쉐-쉐-하다가 주르륵하며 물에 잠기는 것 같기도 하고, 돌돌거리며 바위돌에 접히는 산골짝의 개울물 소리같기도 하다.

울돌목은 좁은 곳의 폭은 294m, 수심 19m 미만이며, 여울의 바닥은 암초와 같은 바위들이 깔려있다고 한다. 서쪽 바닷물이 잠잠하다가(停潮) 밀물 때가 되면 좁은 명량(목)을 통해 쏜살처럼 밀려들면서 바닥의 바위들을 두드리면 돌들이 운다고 울돌의 목 즉 명량이라고 한 모양이다.

정유(丁酉 : 1597년)년 재침한 왜적들은 유월에 가덕도에서, 칠월에는 칠천량에서 대승을 거두어 경상의 제해권을 장악한 후, 삼도수군통제사령부가 있는 한산섬을 지나고, 전라좌수영인 여수 앞 바다까지 장악한다. 적들은 더 나아가 이진(利津 : 완도와 북평리 사이의 포구)을 지나고, 땅끝마을 옆 어란포(於蘭浦 : 송지면 어란리에 있는 항구)를 지나 팔월말부터 진도의 북단 벽파진(碧波津 : 진도군 고군면 벽파항)까지 출몰하곤 했다.

구월 기망(旣望 : 16일), 왜적들은 이른 아침 어란포에서 남쪽바다에서 서쪽바다로 물이 빠지는 북서 순류를 탄다. 330여척의 왜선이 진도와 뭍 사이의 좁은 물길로 들어선다. 왜선이 벽파진을 넘자 이순신은 조선수군에게 남아있던 ’12척의 전함’ 1칠천량 해전에서 전세가 불리하자 후퇴한 경상우수사 배설의 전선들이다. 배설은 임진란 중 합천군수 시에 적병과 싸우지도 않고 후퇴를 하거나 칠천량 해전에서 몰래 줄행랑을 놓고 명량해전 시에는 탈영을 하는 등 후퇴와 탈영으로 점철된 비겁한 인물이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빼돌린 12척의 전선이야 말로 조선을 살린 기틀이 된다. 에 남해에서 거둔 전함 1척, 도합 13척으로 울돌목 서쪽에 일자진(一字陣)을 펼친다.

왜적들이 우수영을 놔두고, 진도의 남단을 돌아 서쪽 바다로 나가면 조선수군에 의해 뒷덜미가 잡힐 것이기에 좁은 명량에서 이순신을 깨고 서해로 나아가고자 한 것은 이해가 하지만, 13척의 전함으로 ’10배가 넘는 적을 감당하려한 무모함’ 2李忠武公全書卷之九 조카인 정랑 이분의 글을 보면, “임진년으로 부터 5~6년간 적들은 수군이 길을 막고 있었던 관계로 감히 곧바로 호남과 충청(원문의 兩湖는 호남과 호서로 전라도와 충청도를 말한다)으로 쳐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전선이 12척이 있아온 즉,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운다면 오히려 싸울 만 합니다. 수군을 전부 폐지한다면, 이는 적에겐 다행일 것입니다. 호남의 오른쪽을 경유하여 한강에 다다를 것인 바, 이것이야말로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다고 할지라도 미천한 신이 죽지 아니하였사오니 적들이 저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自壬辰至于五六年間. 賊不敢直突於兩湖者. 以舟師之扼其路也.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今若全廢舟師. 則是賊之所以爲幸. 而由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戰船雖寡. 微臣不死. 則賊不敢侮我矣.)라고 선조에게 폐하면 안된다며 출사표를 던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글로 보면 호남이 떨어지면 한강이 떨어지고 그러면 종묘와 사직을 보전할 수 없다는 의미로 뒤의 주석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와 일맥상통한다. 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충무공은 “호남이 없다면, 나라가 없다”(若無湖南是無國家) 3李忠武公全書卷之十一에 나오는데, 영의정인 이항복이 쓴 忠愍祠(여수에 있는 충무공 사액사당)記에 나온다. 내용은 한산대첩을 기리는 글에 근거한다. 그때 왜적들이 여러차례 호남을 엿보며 으르렁거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충무)공이 나라를 위하여 軍을 쌓아놓았으니 모두 호남에 의지한 바였다. 호남이 없다면 나라가 없다.(時賊屢窺湖南. 狺然未已. 公以爲國家軍儲. 皆靠湖南. 若無湖南. 是無國家也) 며, 13척의 배를 가로로 벌려 서쪽 바다를 막는다.

우수영에 있는 의제 허백련씨의 글씨로 된 若無湖南是無國家

미시(未時 : 13시~15시)가 지나자,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서쪽바다가 명량을 지나 동남쪽 남해로 가파르게 밀려들기 시작 4정유년 구월 기망의 오전 중 최대 간조가 06:55분, 오후 최대 만조는 14:30분 이었다고 한다. 간조(썰물) 때 남해에서 서해 쪽으로 흐르는 유속은 9노트(17Km/Hr), 만조(밀물) 때 서해에서 남해로 흐르는 유속은 11.5노트(21km/Hr)라고 한다. 정조시기는 밀물과 썰물 후 약 1시간 가량이었으니, 교전은 오후 2시 30분경으로 추정됨 했다. 왜적의 배들은 좁은 명량으로 비비적거리며 몰려들다가 뱃전이 서로 부딪혀 깨지고, 좁은 해협에 뒤엉킨 적의 함대 위로 우뢰와 같은 현자총통의 화력이 함선을 부수고, 빗발같은 불화살이 좁은 해협에 가득했다. 마침 적장(來島通總)의 수급을 베어 매달으니 적은 그만 궤멸되고 만다.

아수라와 같은 전쟁과 전쟁을 돌파해야만 했던 이순신을, 김훈은 그의 ‘칼의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애틋한 마음으로 대변한다.

“사실 나는 무인된 자의 마지막 사치로서, 나의 생애에서 이기고 지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나는 다만 무력할 수 있는 무인이기를 바랐다. 바다에서, 나의 武의 위치는 적의 위치에 의하여 결정되었다.”(칼의 노래 1권 34쪽)

휴일도 아닌 월요일 오전 9시에 나는 울돌목에서 ‘다만 무력할 수 있는 무인이기를 바랐다’는 김훈의 글을 보며, 사람이란 요사스러워서 평화 시에는 무인으로서 문반들에게 홀대받기 보다 전쟁을 고대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 본다.

나 역시 성공한 프로젝트에 가담하여 자신의 일이나 묵묵히 하는 사람이고자 했으나, 프로젝트는 위태롭고 고단하기만 하다.

참고> 1597년 9월 15~16일의 난중일기

十五日癸卯. 晴. 數小舟師. 不可背鳴梁爲陣. 故移陣于右水營前洋. 招集諸將約束曰. 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 又曰. 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謂矣. 爾各諸將. 勿以生爲心. 小有違令. 卽當軍律. 再三嚴約. 是夜. 神人夢告曰. 如此則大捷. 如此則取敗云.

十六日甲辰. 晴. 早朝. 別望進告. 賊船不知其數. 直向我船云. 卽令諸船. 擧碇出海. 賊船三百三十餘隻. 回擁我諸船. 諸將自度衆寡不敵. 便生回避之計. 右水使金億秋. 退在渺然之地. 余促櫓突前. 亂放地玄各㨾銃筒. 發如風雷. 軍官等簇立船上. 如雨亂射. 賊徒不能抵當. 乍近乍退. 然圍之數重. 勢將不測. 一船之人. 相顧失色. 余從容諭之曰. 賊雖千隻. 莫敵我船. 切勿動心. 盡力射賊. 顧見諸將船. 則退在遠海觀. 望不進欲回船. 直泊中軍金應諴船. 先斬梟示. 而我船回頭. 則恐諸船次次遠退. 賊船漸迫. 事勢狼狽. 卽令角立中軍. 令下旗. 又立招搖旗. 則中軍將彌助項僉使金應諴船. 漸近我船. 巨濟縣令安衛船先至. 余立于船上. 親呼安衛曰. 安衛欲死軍法乎. 汝欲死軍法乎. 逃生何所耶. 安衛慌忙突入賊船中. 又呼金應諴曰. 汝爲中軍而遠避. 不救大將. 罪安可逃. 欲爲行刑. 則賊勢又急. 姑令立功. 兩船直入交鋒之際. 賊將指揮其麾下船三隻. 一時蟻附安衛船. 攀緣爭登. 安衛及船上之人. 殊死亂擊. 幾至力盡. 余回船直入. 如雨亂射. 賊船三隻. 無遺盡勦. 鹿島萬戶宋汝悰. 平山浦代將丁應斗船繼至. 合力射賊. 降倭俊沙者. 乃安骨賊陣投降來者也. 在於我船上. 俯視曰. 着畫文紅錦衣者. 乃安骨陣賊將馬多時也. 吾使金石孫鉤上船頭. 則俊沙踴躍曰. 是馬多時云. 故卽令寸斬. 賊氣大挫. 諸船一時皷噪齊進. 各放地玄字. 射矢如雨. 聲震河岳. 賊船三十隻撞破. 賊船退走. 更不敢近我師. 此實天幸. 水勢極險. 勢亦孤危. 移陣唐笥島.

이 글에는 단순한 전투기록만 기술되어 있다.

15일의 기록에는 그 유명한 ‘필사즉생 필생즉사’가 나오고 밤에 신인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대첩을 이룰 것이라고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전쟁 당일인 16일의 글을 보면, 위와 같은 울돌목의 급물살과 전략구상 등에 대한 기록은 없고, 우리 수군의 사기 또한 개판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330여척에 달하는 적의 전함을 남해바다에서 간신히 건져올린 13척으로 대적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우수사인 김억추는 행방이 묘연했고, 싸움을 회피하는 안위와 김응함에게 군법에 의해서 죽겠느냐고 독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후 김응함, 안위등이 전투에 뛰어들고 송여종과 정응두의 배가 계속 전투에 임하고 귀순한 왜군 준사(당시 피아간의 병력이 마구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가 말한 적장 마다시(來島通總 :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목을 베어 왜적들의 기가 꺽이고 현자총통을 쏘고 화살을 비처럼 쏘아대자 적선 30척이 격침되고 달아나 다시금 우리 수군에게 다가올 생각을 못했으니 이는 참으로 하늘이 내려주신 다행이다. 물살이 몹시 험하고 세가 고독하고 험하여 陣을 당사도로 옮긴다고 적고 있다.

This Post Has 4 Comments

  1. 마가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도고헤이하치로가 “나는 천황폐하와 전 일본국민의 성원속에서 단 한번의 전투에서 이겼을뿐이다”라고 했다고 하던데, 그에 비하여 국왕인 선조의 의심과 견제, 대신들의 모함과 질시, 파탄난 조선의 경제, 뿔뿔이 흩어진 백성, 발목을 잡는 명나라 수군. 이러한 모든 어려움 속에서 26전 26승의 대승을 이루신 이순신장군의 능력은 가히 불가사의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13척의 전함으로 열 배가 넘는 적을 상대하셨다니… 글자그대로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다짐이 아니고선 이룰 수가 없는 위업이었다 생각됩니다.

    뭐, 왜군의 칼이니, 칼을 찬 위치가 어떠니 하는 말들이 있긴 하지만 광화문의 이순신장군상은 정말 이순신장군의 위엄과 기개를 최고로 잘 표현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

    1. 旅인

      장군의 모습은 몹시 관인후덕하게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난중일기를 쓴 장군은 늘 전쟁과 군율에 입각해 있습니다. “아무개가 이러저러하게 하였기에 참했다.”를 아무런 감정없이 씁니다.
      명량대첩을 거둔 9월16일의 일기를 보면, 대승에 대한 감격은 단 한줄 ‘참으로 하늘이 내려주신 다행이다”뿐이며, 전쟁상황에 대한 짧고 명료한 기록 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장군의 사실에 입각한 이러한 냉정함이야말로 백만분의 일의 확률인 26전 26승을 기록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난중일기에는 나타난 적선이 330여척이라고 되어있는데, 133척과 대적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2. 마가진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를 기대에 차서 읽어본 적이 있는데 여인님의 말씀대로 그냥 당일의 날씨와 오늘은 활을 쏘았다. 아무개가 와서 술을 마셨다. 이런 내용뿐(?)이라서 읽다가 덮었던 적이 있었지요. ^^;;
      근래 다시 읽어보아야 겠습니다.

      저도 왜선의 숫자가 133척과 330척에서 오락가락하는 것이 궁금해서 몇 번 찾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
      근데 찾기 힘들더군요. 다만 저번에 한 번 그 이야기를 다룬 글을 읽었는데 330여척이 와서는 그 중 130여척이 전투를 위해 이순신장군과 해전을 벌렸고 200여척은 배후에서 배치되었다고 하더군요. 아마 울돌목이 너무 협소하여 330척이 모두 들어오지 못해서 그러지 않았나 싶었습니다.(물론 이 글의 진위는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내가 만약 왜군사령관이었다면 30여척을 잃었다고 해도 300여척의 전선이 있으니 13척에 불과한 이순신 선단은 이미 무기도 많이 소비하였을 것이고 지쳤을 테니 곧바로 다시 돌진하여 재전투를 벌렸을 텐데 왜 그냥 철수 했을까?라고 궁금하기도 하였습니다.^^;

      시쳇말로 절대 불리한 입장에서도 승전하는 이순신장군께 ‘쫄아서’였을까요. ㅎㅎ

    3. 旅인

      예전에 칼의 노래에 대하여 쓴 글에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손자병법에는 그렇게 쓰여 있다. <옛날에 잘 싸운다는 사람을 돌아보면 쉽게 이길 수 있는 전쟁에서 이기는 자이다. 그래서 잘 싸우는 사람은 이겨도 이름을 얻지 못하고 그 용맹에 공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잘 싸운 사람들 중에는 영웅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손자의 이야기는 너무 타당하여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손자의 말을 빌자면 이순신은 잘 싸우지 못한 자이다. 늘 이길 수 없는 전장에서 피빛노을을 받으며 간신히 간신히 스물세번을 이겼다. 터무니 없는 전쟁에서 싸워서 이겼기에 영웅이 되어 버린 자. 그러나 이순신은 늘 이기는 함수를 이해했던 사람이었고, 적들과 우리는 이순신이 이해했던 함수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영웅이 되었고 신화가 되어버렸다.

      난중일기를 김훈이 평하기를…

      “이순신의 내면은 무겁게 짓눌려 있고 삼엄하게 통제되어 있다. 그는 이 통제된 내면의 힘으로 무수한 아수라를 돌파한다. <난중일기>와 그가 조정으로 보낸 전황 보고서들은 무인다은 글쓰기의 전범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바다의 사실에만 입각해 있다…
      이 통제된 슬픔의 힘이 “저녁 무렵에 동풍이 잠들고 날이 흐렸다. 부하 아무개가 거듭 군율을 범하기에 베었다.” 같은 식의 놀라운 문장들을 쓰게 한다. 바람이 잠든 것과 부하를 죽인 일이 동등한 자격의 사실일 뿐이다.
      이순신의 글은 영웅다운 호탕함이나 과장이 없고 무협의 장쾌함이 없다. 그는 악전고투 끝에 겨우겨우 이긴다. 그는 영웅된 자의 억눌림의 비극을 진술할 때는 단호하게 말을 아끼고 온갖 정한에 몸을 떠는 한 필부의 내면을 진술할 때는 말을 덜 아낀다.”라고 썼네요.

      마가진님의 말씀을 들으면 정말 왜 끝장을 보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드네요. 적장 마다시의 목을 베어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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