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서울

1. 독자인 나의 좌표

책의 리뷰 이전에 우선 독자인 나의 좌표를 설정해 줄 필요가 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인 1964년부터 중학교 1학년인 1971년 사이, 서촌에 속해 있는 백송나무를 끼고 있는 통의동에 살았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중학교 입시가 사라졌기 때문에 동네 아이들과 다방구를 하거나 인왕산에서 병정놀이를 한답시고 신발이 해지도록 일대를 돌아다녔고, 곳곳에 친척집이나 학교 친구들의 집이 산재한 까닭에 왠만한 골목길을 모르는 곳이 없었고, 김신조 일당이 자하문을 넘기 전까지 인왕산 곳곳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 ‘오래된 서울’이라는 책이 학술적인 동시에 읽을거리가 풍부한 서울에 대한 종합적인 인문지리서라는 상찬(賞讚)을 많이 보았다. 서평이라야 믿을 것이 못된다지만 하지만 솔직히 나의 평가는 실망이다.

우선 이 책을 쓴 사람들이 이 지역에 대하여 박물학적 지식을 갖고 있고 문장이 좋다고 하지만, 서울 특히 서촌의 무엇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다. 주제의식이 없다. 있다면 서촌의 풍경과 인물지리지 정도가 될 것이지만, 그 조차도 장동김씨 중심으로 서술되었고 나머지는 이 지역에서 인생을 조져버렸다는 식으로 기술되고 있다. 그렇다면 청와대는 서촌에 속한 것일까 북촌에 속한 것일까?

둘째, 서울은 조선의 도읍지로, 왕도정치의 이념 아래 설계되고 배열된 도시이다. 따라서 주례(周禮) 등 고제(古制)와 주역을 바탕으로 한 음양오행의 배치에 따른다. 하지만 책에는 삼산양수 정도의 언급만 있을 뿐, 조선의 왕들과 삼봉 등이 어떠한 아이디어를 갖고 한양을 건설했는가 하는 제도사적인 접근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인왕산과 백악산을 끼고 형성된 서촌 일대의 풍경과 그 좁은 계곡과 산등성이에 깃들었던 사람들의 음풍농월을 이야기하거나 아무개가 얼마만큼 땅을 가지고 있었고 부자였던가 식의 기술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셋째, 경무대와 청와대가 들어선 이후 이들 지역의 현대사에 대한 언급은 없다. 예전에 궁정동이라고 해야할 지 효자동이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으나 국민학교 여자친구의 집은 청와대와 담을 하고 있었다. 친구의 이층 창 밖으로는 청와대의 뜰이 내려다보였다. 하지만 칠궁 아래 시화문 쪽에 있던 동네는 그만 사라졌고 지금은 정부함동청사가 된 예전 국민대학 자리에서 청와대 사랑채까지 경복궁 서쪽 도로 주변의 민가는 몽땅 사라지고 기관인듯한 위압적인 건물들만 들어서 있다. 삼엄한 기세에 눌려 걸어다니는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다짜고짜 어디가느냐고 묻는 정체모를 싸가지들만 얼쩡대고 있다. 이럴 바에야 효자동 뒷길로 피맛골을 내는 것이 맞다. 이런 상황이라면 손님을 맞이하는 청와대 사랑채가 아니라 차라리 행랑채라고 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나이많은 국민 어르신에게 뭘 여쭤보려면 공무원은 관등성명과 이유를 대는 것도 모른다. 건국 이후의 독재의 강팍함과 경제일변도의 정책 탓에사람들이 이익만을 다투다 보니, 한양 정도 시 꿈꾸었을 이인(里仁)하는 마을의 뜻과 얼마나 배리가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고찰은 없다.

마지막으로 현재에 대한 비판을 결한만큼 역사 인식마저 빈곤하다. 이 책과 관련된 누군가가 관련이라도 있는 듯 장동김씨의 찬양일색이다. 조선말 이들의 세도정치로 나라가 뿌리부터 썩어내렸고, 비록 대원군이 집권을 했지만 열강의 각축 아래 속수무책, 일제에 병탄될 수 밖에 없었다는 인식이 부재한다. 이러한 인식의 부재는 책을 읽는 내내 야룻하고 불편한 기분을 주었다.

그래서 ‘오래된 서울’에 대한 서평보다 내 나름대로 서촌이란 이런 곳이다를 말하고자 한다.

2. 도성의 의미

도올선생은 그의 ‘맹자 사람의 길 상’ 276쪽에 ‘좌전’ 장공 28년조에 보면, 대저 읍(邑) 중에서 제후의 조상을 제사 지내는 종묘가 있거나 선대 군주의 신주를 모시는 곳은 도(都)라 하고, 그런 것이 없는 곳은 읍이라 한다. 1凡邑, 有宗廟先君之主曰都, 無曰邑 는 말이 있다고 한다. 같은 책 389쪽에는 “제후는 사직과 종묘를 다 가질 수 있었지만, 경대부는 사직을 가질 수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분명 주나라의 봉건 종법에 따른 것이지, 그 후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도에 입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과 조선은 공자의 ‘사문’ 2斯文, 즉 주나라의 문화 을 따르는 만큼 주례에 준하여 왕궁을 짓고 도읍을 배치했다.

도올선생의 글에는 조상(종묘)과 땅의 신(사직)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하늘의 신(천단)에 대한 언급은 없다. 분명 명, 청 등의 중국역대 왕조로 미루어 볼 때, 왕도(혹은 帝都)에는 천자는 천손이 강림한 것이라는 사상 아래 제천의식을 치루는 원구단이나 환구단 등 천단이 있었다. 우리도 고려 때까지 환구단이 있어서 기우제는 물론 제천의식을 치뤘다.

하지만 한양은 천단없이 시작된다. 비록 세조 때 잠시 운영을 한 적이 있고, 대한제국 시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에 환구단이 세워지나 얼마 후 총독부의 철도호텔의 부지로 점유되고 지금은 황궁우 정도만 초라하게 남아있다. 이는 삼봉 정도전을 비롯한 신흥 사대부들의 맹목적인 모화사상에 입각한 것이든, 왕조가 개국 초기의 난관을 돌파하고 수성을 이루기 위하여 외교, 국방의 문제를 존명사대로 해결한 것이든, 조선이란 종묘와 사직 만 있는 명의 제후국이라는 비굴한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이와 같은 기생적 외교 국방과 선비들의 성리학에 몰빵한 모화사상이야말로 한글을 언문이라 하고, 중국의 형법인 대명률에 의하면 어쩌고, 주자의 말씀에 의하면 저쩌고, 기년상이 가하다 아니다 하는 형식주의적 말류, 예학을 만들고 말았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결국 이런 개국 초기의 주체의식의 결여는, 결국 이 책의 168~169쪽에 나왔듯 “장동김씨들과 세교가 있던 송시열이 썼다는 ‘大明日月’이라는 또 다른 각자가 있었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큰 명나라의 것’이라는 ‘대명일월’ 구절은 명나라가 망한 뒤 조선의 사대부들이 가졌던 의리론의 편린인데…”라는 양반 사대부들의 썩어빠진 의식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왕도인 서울은 북경이나 동경은 물론 전세계 어느 나라의 수도에 비하여도 산수가 수려하고 마을과 조화롭다. 궁궐과 육조 그리고 도성 내의 배치 또한 아정하여 풍속이 어진 동네에 사는 것이 아름답다 3里仁爲美 고 한 공자의 말씀을 이루려고 한 왕조의 의지가 엿보인다.

3. 경복궁, 법궁의 의미

경복궁은 조선의 개국과 함께 법궁으로 자리잡고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어 삼백년 간 궁궐 안에 나무와 숲이 우거져도 법궁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했다. 남쪽으로 숭례문을 두고 그 앞에 황토마루까지 궐외각사인 의정부, 육조(이, 호, 예, 형, 공, 병조), 한성부가 늘어섰고 사재감, 내자시, 내수사 등 궁궐과 물자 등을 소통하는 각종 기관들이 경복궁 주변에 포진하고 무엇보다 ‘전조후침’ 4前朝後寢 : 앞에는 조정, 뒤로는 왕실의 생활공간 , ‘좌묘우사’ 5左廟右社 :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 라는 정형적인 궁궐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사직단에 가보면 네모난 단이 동과 서로 나란히 있는데, 동쪽의 단은 사단(社壇)으로 땅의 신을 모시고, 서쪽은 직단(稷壇)으로 곡식의 신을 모시는 곳이다.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며, 군주가 가장 가볍다 6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사직단은 어쩐지 작고 초라하다.

경복궁 서남쪽으로 적선동이 있다. 적선동은 사직로가 나는 바람에 남북으로 나뉘었지만 도로가 없던 조선조에는 남북으로 이어져 있었고 적선방(積善坊)이었다. 지금의 서울지방경찰청 자리에는 얼마전까지 내자호텔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장흥고(長興庫)와 내자시(內資寺)가 있었다. 참고로 적선동에서 종축으로 남쪽으로 가면 동아일보 건너편, 동화면세점 자리는 이전에는 방화 1번지인 국제극장이 있었고 조선조의 동네이름은 여경방(餘慶坊)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한양에 정도할 당시 왕실에서 가진 경계의 마음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경복궁은 음양오행과 주 문왕의 후천팔괘에 입각하여 지어졌다. 적선동은 경복궁의 서남쪽으로 후천팔괘로는 곤방(坤方)이다. 이 곤방과 관련하여 주역의 곤괘 문언을 보면 “착한 일을 쌓는(적선) 집 안에 반드시 즐거운 일이 넘칠 것(여경)이요”(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내자시는 장흥고 등 왕실의 부고의 출납과 함께, 왕실의 쌀, 국수, 술, 간장, 기름, 꿀, 채소, 과일, 꽃 및 궁내 연회에 필요로 했던 직조 등을 관장했다. 이 자리에 들어선 내자호텔은 1960~70년대에 일본놈들의 기생파티로 유명했다. 육영수씨가 죽고 난 후에는 청와대의 채홍사가 이 곳으로 연예인이나 아리따운 처녀들을 징발하여 박정희씨가 계신 궁정동 안가로 들여보내는 접선지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자시가 꽃을 안가로 출납하거나 속곳을 벌려 왜화벌이를 하는 곳으로 전락한 것이다.

1979.10.26일 그 날도, 이 곳에서 채홍사를 만난 심수봉과 신재순은 중앙정보부의 차에 올라 궁정동으로 올라간다. 서촌 일대의 여염집에선 저녁상을 준비하던 7시 41분, 박정희장군은 제자이며, 후배이자 가신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가슴으로 받는다. 차지철을 죽이기 위하여 쫓아나간 김부장은 다시 들어와 쓰러진 박장군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탕! 확인 사살을 했다고 심수봉은 기억한다.

박장군이 이미 죽어 있을 밤 9시, TV에서는 “오늘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는 삽교천 어쩌고 저쩌고…”라는 방송이 흘러나왔고, 입대를 앞둔 나는 흑백 TV 속에서 테이프를 자르고 있는 그를 멀건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처참한 일이 벌어진 연고에 대해서 주역의 문언은 다음과 같이 준엄하게 말한다.

나쁜 짓거리를 일삼는 집에는 반드시 흉칙한 일이 넘칠 것이니, 꼬붕이 오야붕을 총으로 쏴 쥑이고, 자식이 아비를 쥑이는 일은 하루 아침 하루 저녁에 있었던 일 때문이 아니다. 그런 흉칙한 일은 점차 쌓여서 되는 것이라서, 어찌하다 이리되었을꼬 밝히자고 해도 그 처음은 말할 꺼리조차 되지 못한다. 7積不善之家, 必有餘殃. 臣弒其君, 子弒其父, 非一朝一夕之故, 其所由來者漸矣, 由辯之不早辯也

도읍을 정한 임금은 왕조가 만세까지 강녕하기를 바라며, 후대의 왕과 왕실에게 근신하고 경계하라는 의미로 적선방이라 동네를 이름짓고, 그 옆에 내자시를 두었을 것이다. 왕조는 어즈버 사라지고, 육백년이 가까워 오던 어느 날 경계하고 근신하던 일이 그만 현실이 되고 만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딴지를 걸고 쿠테타로 집권을 한 어느 불행한 가족사이기 이전에, 강팍한 군사독재 정권 아래 살아왔던 우리의 불행한 역사이기도 하고, 화불단행이라고 한 개인의 불선함의 참극은 그 후 전두환의 집권에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 적선동과 경복궁 사이에는 예전에는 동십자각처럼 서십자각이 서 있었다고 한다. 일제가 전차를 깔면서 서십자각을 헐고 선로를 냈다고 한다. 선로는 지금 청와대 사랑방 앞 효자삼거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전차가 모서리를 돌때, 쇠바퀴가 끼이익 끽 선로를 깍아내는 소리를 냈고, 밤이면 전차머리 위로는 파랗게 전기 스파이크가 일곤 했던 기억이 아득하다. 전차는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인가 다니지 않았고 그만 선로는 뽑히고야 말았다.

4. 책과 서촌

얼마 전에 서촌을 거닐어 본 적이 있다. 어렸을 적 세상의 절반이었던 서촌은 이제 너무 좁고, 어리고 가난한 시절에는 열려있던 모든 곳들이 닫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골목조차 집 안에서 닫혀버려서 골목에는 더 이상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가 없다. 사람들이 집 바깥으로 흘러나와 어느 곳에 고이고 서로 마주함으로써 마을이 되는 것인데, 이제는 이웃과 담을 쌓고 스스로 소외되는 집들 만 남은 탓에 행정구역과 호수만 남고 동네와 골목이란 불량배와 성범죄자, 강절도범만 우글거리는 곳이 되었다.

마을이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말(言)들이 합류하는 곳이라는 뜻이고 마실이란 이웃과 말(言)을 섞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닐까? 사람과 사람이 섞이고, 서로를 나누며, 남의 집 자식을 제 자식처럼 감싸고 잘못을 허물할 수 있어야 그마을의 풍속이 순해지고 어진 마을(里仁)이 되는 것이다. 나의 친구가 동네 파출소의 순경이고, 동창이 슈퍼 주인이며, 옆집 갑식이네 엄마가 중학교 짝이라면 그 동네의 대문은 활짝 열리고, 아이들은 골목으로 쏟아져 나와 친구들과 함께 놀기도 하고 주먹다짐을 하고 찔찔 짜면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면서 커나갈 것이다.

하지만 사십여년전 내가 이 곳을 떠났듯이 모두 떠나고 또 모르는 사람들이 흘러들면서 서촌은 변했다. 책에 나온 벽수산장(어렸을 적에는 언커크라고 불리었고 당시에도 건물은 있었지만 허물어져 내리고 있던 중이었다) 아래에 있던 5학년 때 짝의 집은 어디인지 조차 가늠할 수 없었고, 서울 전체가 하얗게 내려다 보이던 누상동의 이모부댁으로 올라가던 그 가파른 언덕배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산보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살던 동네로 가니 그렇게 넓었던 백송나무 밑의 공터는 어른 둘이 지나기 위해서는 어깨를 모로 세워야 할 정도로 좁았다. 그렇게 컸던 백송이 어떻게 가지를 펼쳤을까 싶기도 했다. 나에게 있어서 백송나무의 의미는 그늘 뿐 아니라 어린 친구들을 불러내고 소리치고 뜀박질하며 함께 할 그늘 밑의 빈 자리를 내 주었다는 것이다. 늙은 백송이 죽은 탓인지 몰라도 휴일 오후임에도 빈터에는 추사의 초상화만 담벼락에 걸려 있을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책은 이미 죽어 흘러간 것들만 말한다. 하지만 거기에 살아있는 것들이, 그 동네들이 왜 이리 적막해졌는지 책은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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