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고상한 것인지 야비한 것인지,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를 묻는다면, 저는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저의 생각이 짧고 천박하기 때문에…, 또 제가 성직자이거나 학교 같은 곳에서 밥줄을 대고 살아가는 철학교수쯤 된다면 좀 상황은 틀리겠지만…, 되는대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건너편 술자리의 술 취한 중년사내처럼 꼴리는 대로 마구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겁니다.

제 결론은 그러니까... 인간은 야비하거나 악한 것에 가깝습니다. 고상하고, 선한 것을 그들이 추구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즉 천성적으로 그렇지 못하다 보니 고상하고 선한 것을 추구한다 이겁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대부분의 악덕과 야비함이 품위있고 착한 척 하는 속에 걸쭉하게 녹아있다는 겁니다. 아름다운 수풀일수록 맹수와 독사가 우글거린다는 것은 아시지요?

오히려 겉으로 드러난 악덕과 야비함은 그다지 위험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저런 XX들 때문에 세상이 요 따위로 돌아가는 거야’ 라며, 자신이 세상에 저지르고 있는 은밀한 악행(노상방뇨 포함)들의 책임을 XX에게 덮어씌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길거리에서 지랄발광을 하는 놈들도 사회적으로는 효용가치가 있다는 것 입니다. 우리가 코 풀어버린 소소한 악행을 쳐 박아둘 수 있는 쓰레기통이라고 할까요?

스무 명 남짓의 창녀들과 늙은이들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유영철 연쇄살인 사건>은 인간의 잔혹성에 대하여 극명하게 보여주었지만, 그 사건에서 우리가 인간의 잔혹성에 대한 공포를 느끼거나, 죽은 창녀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기 보다는, 희대의 살인마를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빠져 있던 사소한 죄의식으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었고, 우리는 자신들이 선의에 입각하여 온당한 삶을 살고 있다고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지요.

예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준 재량권을 사용치 않더군요. 그들은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재량권 남용의 결과로 (예수님 맘이니까)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죄가 없어진다는 강렬한 느낌이 탁하고 꼿힌다 이겁니다. 그래서 까맣게 자신의 죄를 잊고 우리는 소리치는 것 입니다. '저 포를 떠 쥑일 놈'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잠깐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늘 그렇듯 회개는 타인을 비난함으로써, 구원은 자신의 꼬라지를 망각하는 데서 오는 것 입니다. 비난이 극렬할수록, 망각이 깊을수록,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그분의 오른편에 조금씩 다가가는 것입니다.

아! 말세란 얼마나 황홀한 단어입니까? 우리는 지금 세상의 끝자락을 사탕 빨아먹듯 야금야금 핥고 있는 것 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한 단어로 요약됩니다. <죄!> 죄가 없는 세상은 얼마나 하찮고 심심할까요? 죄가 없는 세상은 시도 소설도 없는 심드렁한 학위논문과 같지 않을까요? 죄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천국에 대한 열망보다 늘 지옥에 대하여 꿈꿉니다.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천국에 대한 묘사는 추상적이고 몽롱하겠지만, 지옥에 대한 묘사는 리얼리티가 확 살아날 것입니다.

말이 길어졌는 데... 죄의 내용이 사악하고 끔찍할수록 사람들은 외면하기보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더욱 매달리게 된다 이겁니다. 가학성 음란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심리를 잘 아는 언론들은 <유영철>을 짐승과 사탄이 교접해야 낳을 수 있는 괴물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인 우리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거죠. 무식한 언론이 잘 모르는 것이 있는 데... 애석하게도 인간들만이 그따위 짓을 합니다. 짐승들은 절대 안합니다. 언론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돈벌이입니다. 그래서 침소봉대, 아전인수 등등의 각종 방식을 통하여 진실을 왜곡하고 구독자들이 듣고 싶고, 알고 싶은 것만을 속삭이게 마련입니다. 정의와 진실이란 고객의 니즈에 의하여 늘 밀려나곤 합니다. 언론이란 세상에 만연하고 있는 악행과 문제점, 각종 추문에 기생하며 사는 것들이기 때문에 평면적으로 윤리 도덕적인 관점에서 기사를 쓴다면 광고주들이 달아나게 마련입니다. 신문은 속성 상 흥미로워야 합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몰려와 뉴올리언즈를 시궁창으로 만들었을 때, 몇 만명이 몰살하는 것 따위는 언론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미국도 시궁창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얼마든지 더러운 속곳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에 장사가 되겠구나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며, 구독자들도 그것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저는 신문보다는 매일 아침에 동화책이 배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문은 그릇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헤치고 나가야 할 세상이 위험천만이며, 상상도 할 수 없는 흉악한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신문을 읽어야 하며, 이런 황당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어른들이야말로 매일 아침 참회하는 심정으로 동화를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부모들은 아이들이 산타클로스를 믿기를 바랍니다. 자식들이 자신들의 속성을 깨닫고 경멸하게 될까 봐 두려움에 떨거나, 아니면 어른이 되기 싫다는 양철북 신드롬에 아이들이 빠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유영철>과 같은 자들을 심심풀이 땅콩 식으로 매도함으로써 은근슬쩍 자신의 악행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하고 모범적인 시민으로 거듭납니다. 가장 사악한 인간이야말로 우리의 죄를 사하는 구세주가 되는 것이죠. 이것이 역사의 가장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는 현대라는 것이며, 다시 말해 말세지요. 우리들의 말세! 할렐루야!

포르노그라피에서 예술적인 감흥에 치를 떨기도 하며, 백남준의 낡은 텔레비전 더미에서 순간순간 뒤집어지는 화면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그럴듯한 설명을 하지 못하면, 교양머리 없는 놈이 되어버리는 것이 이 포스트모던이라는 시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악덕이나 야비함을 더한 악행의 밑에 찔러 넣은 대가로 파카소의 그림 앞에서 ‘개떡같다’는 소리도 함부로 못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보면 개떡이 되어버리는 말세라 이겁니다. 몹시 고상하고 낭만적인 일 아닙니까? 뽕짝 대신에 어거지로 클래식을 들어야 하는...

그렇다고 우리가 야비한 속성을 간직한 채 악행을 저지르기 위하여 늘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인간이 야비하거나 악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에서 가깝다고 말씀을 드린 것뿐 입니다. 저는 때로 보면 교활하기까지 합니다. 빈틈을 보이기만 하면 누구나가 잇빨을 드러내죠.

더욱 불행한 것은 우리의 고상함이나 선함조차도 나르시스적인 만족감을 구하기 위해서이거나 적들, 혹은 그렇게 될 수 있는 것(놈)들로부터 울타리를 치는 외교적인 수단일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전체 인류에 대한 실망감보다는, 저는 저 자신의 치졸함을 우선 느낍니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사랑이라든가 우정의 개념에 다가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저는 늘 해왔습니다. 저란 놈은 별로 할 일이 없는 놈이거든요. 저의 양심을 놓고 비추어 볼 때, 아니라는 답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국어사전을 뜯어고치던지 아니면 사랑과 우정을 깊이 생각할 것이 아니라, 대충 친한 척하면서, 친구나 애인에 대한 의무감에 충실하기 보다, 친구와 애인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좋습니다. 의무감에 빠져버리면 친구나 애인을 증오하면서도 우의를 지키고 사랑을 해야만 한다는 억울하고도 멍청한 사태가 빚어질 테니까 말입니다. 그것보다는 권리를 주장하고 그것이 충족되지 못하면 절교를 하고 걷어차 버리는 것이 현명합니다. 최소한 그때까지의 우정과 사랑은 진실할 테니까…

인간이 진실로 야비하거나 악하다면, 하늘과 들과 풍경들이 오늘처럼 찬란한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오늘 하늘이 기를 쓰면서 아름다우려고 화장을 하고 오도방정을 떤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오후가 되면서 구름이 덮이고 약간은 우울하군요. 그런데 도시란 명랑한 빛에 감쌓이기 보다는 약간은 우울해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더욱 퇴폐적인 느낌 속으로 빠져들게 되고 네온싸인이 더욱 명멸하게 되는 법이니까요.

사실 오늘 이러한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진짜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운 인간들에 대하여 말하려던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이고도 비근한 예로들 수 있는 인간은 늘 저 같은 놈이라 이겁니다. 혐오스럽고 가증스럽다는 것은 제가 잘 압니다.

인간이 악하다거나 야비하다는 것은 물론 제가 따져야 할 일은 아닙니다. 저보다 가방 끈이 길고 힘센 놈이 아니라고 하면 아닙니다. 어차피 진실은 여기 다르고, 저기 다르고, 늘 주먹 센 놈의 눈치를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갈릴레이가 교회의 주먹이 무서워서 멀쩡히 돌아가던 지구에 딴지를 건 사례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종교재판이 끝나고 나서 이 쫀쫀한 친구가 찔찔짜며 말하길. '그래도 지구는 돈단 말이야 씨팔!' 그러나 살다보니 지구가 돌든 서 있던 그딴 것은 제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더란 말씀입니다. 돌고 말고를 선택할 수 있다면 지구는 서 있고 하늘이 도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그것이 말세를 살아가는 데 덜 어지러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당신은 세상을 참으로 비관적으로 보시는 군요.’하고 톡 튀어나와 말하는 놈들이 꼭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놈들을 보면 옥수수 알갱이가 튀어나도록 딱 한대 패주고 싶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왜 남의 의견에<비관적>이라는 말로 토를 달고 지랄이냐 이겁니다.

그것도 꼭 자신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표정으로 비웃음을 흘린다면, 저는 놈에게 치열한 살의를 느낄 것 입니다. 때론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여 재떨이와 같은 것으로 뒤통수를 팍 하고 갈겨버릴 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러한 저의 살의가 타당한 것이란 것을 법정에서는 인정받지는 못하겠죠. 법정이란 감정적이지 않고 빌어먹게도 늘 이성적이라는 것 입니다. 근엄하고 싸늘하죠. 인간미라는 것이 전혀 없는 곳이 법정입니다, 힘없고 멍청하며 선량한 놈들이 늘 당하게 마련인 곳이 법원이라는 것은 말 않기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변호할 수도 책임질 수도 없는 불행한 사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데카르트란 친구가 인류에게 저지른 죄악임을 모르지는 않겠지요?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내적 감정에 충실할 수 없고, 울며 겨자 먹기로 이성이란 것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판사의 아내가 젊은 놈과 자신의 침대에서 놀아났을 때, 과연 판사의 가슴 속에서 정의의 눈금이 여전히 가운데를 향하고 있는 지를 꼭 보고 싶다는 유혹은 어쩔 수 없습니다. 만약 판사의 집에 있는 골프채가 연놈들의 정수리에서 피를 날린다면, 우리는 고대의 형법제도가 가슴에 와 닿는 뻐근한 느낌에 황홀할 것입니다.

그러길래 가장 이성적이고 날카로운 판단을 해야 하는, 즉 인텔리겐차 라는 족속들이 이성과 감정의 갈등의 골을 메우지 못하고, 결국 아내를 바꿔서 난교행위를 벌이는 짓거리(스와핑)를 함으로써 이성이 차곡차곡 쌓아놓았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을 볼 때면, 과연 이성의 빛이니 코기토니 하는 것들이 사람사는 것을 얼마나 피곤하게 하고 뭣같이 만들었는 지를 인터넷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꼭 토를 다는 놈들이 한둘쯤은 있습니다. 변호사나 판사, 그리고 검사와 같은 죄에 기생하여 피빨아먹는 작자들이란 양처럼 순결해서는 죄를 판단하지 못한다. 가장 사악한 죄의 근원에 도달하여 인간이 맞이할 수 있는 극한을 탐구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의사들은 생리적인 쾌감을 적극적으로 탐구해야할 의무가 있다구요? 문지방에 뭐 낑기는 소리들 하고 자빠졌네. 그렇다면 목사나 중들은 이 세상에 아마 존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몽땅 저승을 한번 갔다 와야 목탁을 치든 부흥회를 하든 장사가 될 것 아닙니까?

또 말이 어긋나 버렸네요. 제가 하는 일이나 생각들은 늘 이렇습니다.

한번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친구가 장가를 가게 되었고, 우리는 신부의 집으로 함을 팔러 갔습니다. 돈봉투를 까 뒤집어가며 실랑이를 벌인 끝에 피로와 허기에 지쳐 신부의 집에 당도했을 때, 우리를 환호하게 했던 것은 떡 벌어진 밥상이 아니라, 신부의 친구 중 한 여자가 눈이 뒤집어 질 정도로 아름다웠다는 것 입니다.

저는 젊잖은 사람이기 때문에 길거리에 어여쁜 여자가 지나간다고 수캐마냥 침을 질질 흘리며 쫓아가는 그런 짓은 안합니다. 그것은 품위가 없을 뿐더러 짧은 시간에 빠짝쪼여야 하며 숙달된 혀와 뻔뻔스러움이라는 다양한 기술이 필요하며, 실패할 경우 백주대로에서 치한으로 간주되거나 아니면 지하철 정거장에서 왕창 쪽 팔릴 수 있다는 리스크를 관리해야 합니다. 게다가 저는 몹시 비겁하거든요. 가장 중요한 그 놈의 용기가 항상 2% 쯤 부족합니다.

그래서 늘 무수한 경쟁자가 있는 열악한 환경 속을 누비길 좋아합니다. 저의 교활함은 경쟁자들의 헛점과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누구보다 저에 대하여 순진하면서도 우울한 분위기를 느끼도록 만들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저의 교활한 눈매를 누그러뜨리는 것에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침울하게 구석에 쪼그리고서 포획물을 기다립니다. 그러면 늘 여자들은 말을 걸게 됩니다. 다 연민의 정을 느낀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 친구 왜 저래?' 하는 불편한 심사일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만 있어도 말을 걸어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상대편이 일단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 내 말발이 먹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열린 것 입니다.

저는 여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남자다움을 과시하며, 큰소리로 떠드는 놈들을 늘 경멸하곤 했습니다. 그런 놈들은 대충 세상의 모든 일들이 정력과 함수관계를 갖고 있다는 단순무식, 우지근 뚝딱 차원입니다. 밀어부치면, 열번 찍으면 여자들이 넘어온다는 거죠. 그럴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놈들에겐 천만다행이죠. 그게 안먹히면 도끼날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스토커로 잽혀갈 수도 있다는 점에서 발상의 전환을 도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더 경멸하는 놈들은 자신의 용모에 취한 놈들입니다. 놈들은 까짓 년들 내가 왼쪽 눈을 깜빡하며 '오 베이베~' 하면 숨도 못쉬고 꼴깍 넘어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더욱 경멸하는 것은 그런 놈들에게 넘어가는 그 X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용모에 취한 놈들은 사랑하는 자신을 위하여 여자를 장식물이나 전리품 정도로 여기는 놈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명한 여자들은 이런 놈들이 하는 이야기를 한두번 들어보면 써글 놈하고 선을 그어버립니다. 그리고 또 하나 가장 무서운 놈들은 곤충류에 속하는 날라리입니다. 이 놈들은 여자 꼬시는 머쉰이기 때문에 제가 존경하는 상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면 이도 저도 아닌 떨거지들만 남는데, 저도 그 속에 속해 있으며 그 꼬라지는 태어나서 여자 한번 사귀어 본 적이 없을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 날도 그랬습니다. 면 총각을 해야 하는 제 친구들은 끙끙거리며 그 아가씨에게 이런 저런 말로 치근덕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조금 거리를 두고 그 여자의 약점이나 단점을 캐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런 작업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상대를 경멸할 수 있어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점을 찾아내기 위하여 아무리 애를 써도 걸려드는 것은 없고 오히려 그 아가씨의 목소리가 몹시 특이한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과 상대편을 쳐다보는 눈동자가 맑고 티 없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돋은 솜털이 전등 아래 뽀얗게 빛나는 것이 저를 환장하도록 했습니다. 갑자기 늑대 같은 놈들 속에 저 아가씨를 그대로 방치해 두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제가 사람들 속에서 선의와 가장 뛰어난 양식을 지니고 있다고 믿게 되었고, 진실한 사명감에 빠져 들었던 것 같습니다. 선과 악이 그토록 투명하게 갈라지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야말로 선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때 그녀가 갑자기 저에게 말을 걸더군요. “말씀이 없으시네요. 어디 불편하신 거라도?” 그녀의 말은 너무도 느닷없이 다가왔기에, 저는 “그것은……”하고 더듬거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다정스럽게 저를 쳐다보며 가만히 버벅대는 제 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런대로 잘 돌아가던 편인 제 머리는 백지처럼 하얗게 바래버렸고, 그녀의 눈동자 만이 제 영혼을 빨아드릴 것처럼 영롱한 빛을 발했습니다.

아! 그녀의 찬란함이란 저마저 순결하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저는 이러 저런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은 모양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다음 번에 단 둘이서 어느 찻집에서 만나게 되었고, 저는 우리의 앞날의 인생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면서, 서로 상대편의 호적에 기재된 각종 사항이나 학창시절의 성적표 등 시시껍질한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그 만남을 때웠습니다.

헤어지고 돌아오면서 그녀가 분명 저의 매력에 빠졌으며, 제가 신사답게 처신을 잘했고 우리 둘의 앞 날에 대하여 확신을 했으며, 그녀를 위하여 오랫동안 잊었던 사랑을 끄집어내야 할 때가 다가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그래서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친구에게 전화를 했고 “그 아가씨가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다”고 당당하게 지껄였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뭐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미친 놈 지랄하고 자빠졌네… 함 들어간 날 니 눈동자가 풀린 것 같길래, 신혼여행 때 잠시 짬을 내서 너를 위하여 우리 선경이한테 물어봤다. 그 아가씨하고 너하고 잘 어울리는 것 같던데 어떻겠느냐고? 그랬더니 선경이가 콧웃음을 날리며 그러더라 걔 날 잡아놓았어. 다음 달이야 라고 말하더군. 속 차려 이 새꺄!”

전화를 끊은 제 느낌은 달콤함을 맛보기도 전에 커다란 알사탕이 혀에서 미끄러져 통째로 목구멍을 넘어간 느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캑하듯이 ‘빌어먹을 년, 며칠 안 있으면 시집갈 년이 날 히야까시했단 말이지? 그년이 화냥끼가 들어도 됀통들은 모양인데, 내가 안 걸리기 천만다행이다.’ 라고 저는 욕설을 뺕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열기에 들떠 혹시 그녀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게 된 것을 후회하거나, 첫눈에 저에게 반해버려 결혼이고 뭐고 포기할 생각을 한 것이 아닐까 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저는 몹시도 공정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려고 늘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거울 앞으로 가 그녀가 매료될 만한 구석이 있는가를 확인했습니다. 빌어먹을! 늘상 그렇듯 매력은 고사하고 비쩍 마르고 그 모양 그 꼬라지의 저를 만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심하더군요.

그때 다시 전화가 왔고 친구 녀석은 저한테 소리를 쳤습니다

“너 이 새끼 어떻게 했길래 선경이가 그 아가씨한테 전화를 하더니 얼굴이 빨개져 갖고 <그래… 그래… 미안해!>하게 만드냐? 네놈이 한번 만나자고 애걸을 해서 한번 만났는 데, 무엇 때문에 날 잡아 논 자신을 불러냈는 지 잘 모르겠다며 너를 보고 참 이상한 친구라고 그랬다는 데…”

그때에서야 제가 함들어 간 날, 그녀에게 매달려 한번 만나자고 했으며, 그녀가 안 된다고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때 저는 젊은 아가씨가 취해야 할 내슝으로 한번 빼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마침내 그녀의 친절과 미소가 저를 좋아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내가 곡해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의 우매함에 분통이 터지기 이전에, 선의와 친절이 멍청한 인간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독소가 되는 가를 나는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나에 대한 경멸을 선의로 포장하고서 나를 만났고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비웃음을 억누르며 제 말을 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미쳐버릴 것 같았습니다. 야비한 년이라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저는 빌었습니다. 그 빌어먹을 년이 제발 그 가증스러운 선의에 의하여 제발 자멸하기를, 어느 못된 놈에게 그 눈길을 주었다가 됀통 당하기를 말입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친절해서도, 그윽한 눈길을 아무에게나 주어서도 안됩니다. 도시에서 살기 위해서는 늘 초점없는 눈으로 살아가는 지혜 또한 필요한 법입니다.

그 후 저는 어떻게 되었는 지 아십니까? 그 여자처럼 세상의 모든 여자에게 사랑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술집 여자와 하물며 시장거리에서 찬거리를 파는 아줌마와 골목 앞 책방의 그 뚱뚱한 아가씨에게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가와 저에게 자신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전 늘 그렇게 말했습니다. “놀고 있네”라고. 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악의를 똘똘 뭉쳐 선의를 가장한 후에 가장 야비한 목소리로 노래하듯 “놀고 있네”라고 힘주어 말하는 이 경쾌함이야말로 복수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축복 아니겠습니까?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였지요? 이야기하다 보니 그만 실없는 것이 되어버렸네요. 아무튼 그렇다는 겁니다. 우아함과 선의에 복종하기 보다는 겉으로는 신사이며 숙녀인 척 하여도 악의에 넘실거리고 야비함으로 찬란한 이 말세의 도시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투명하게 허무하고 비루하며 사악한 것들을 바라보아야 하며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속 깊이 숨어있는 근원적이고 사악한 것들에 빛을 비추고 뚜렷한 눈으로 바라볼 용기도 필요합니다.

저는 근본적으로 이 도시를 사랑합니다. 지옥으로 부터 타오르는 것 같은 매캐한 이 냄새, 값싼 홍등가의 색조로 가득한 네온이며 소돔의 뒷골목에서 롯과 천사가 들었던 아그그 아그그하는 그 야릇한 신음소리에 이끌립니다. 야수의 속성이 내 속에 깃들어 있는 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이 도시가 황홀한 것은 적당한 분노를 가져다 준다는 겁니다. 온갖 악행이 들끓고 있어도 언제나 근원적인 치료는 안되지요. 만약 열 가구 정도의 시골마을에서 옆집 여편네가 삼월이 아빠와 눈이 맞아 뽕밭에서 일을 벌였다면, 적당한 분노로 때우고 넘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연놈들의 코를 베어버리거나 아니면 소정의 절차를 밟아 연놈들을 작신나게 처리를 해야 하는 것 입니다. 돌로 쳐버리거나 꼴 베는 낫이 난무하며 피를 토한다면 아마 그 마을의 윤강이 일거에 바로잡힐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도시의 모든 사람과 모든 곳은 불특정 다수이며 낯선 곳일 뿐 입니다. 바로 집 앞의 골목이고 옆집 사람이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시시각각 벌어지는 사건들은 항상 적당한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아무리 흉악한 사건이 벌어져도 실체를 가늠할 수 없기에 단지 풍문일 뿐이며, 그만큼 치열한 분노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런 책임없이 분노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은총입니까? 분노가 치열하고 사각사각 주위를 옥죄어 온다면, 우리는 할 수 없이 근원적인 해결에 매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낫과 돌을 쳐들거나 응당하다고 기대되는 이상의 보복을 통해서 해결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해결에 따른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시의 분노는 커피를 따스하게 덥힐 정도로 보골거리다가 사라져 버리고, 우리는 살아가기 위하여 음란한 루머와 같은 것을 찾아 희희덕거리곤 합니다. 지루하면 이 도시의 소시민은 자살을 택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젊은 이들을 보십시요, 퍄쇼정권이 득세를 했을 때는 남녀가 스크럼을 짜고 보도블럭을 깨트려 전경들에게 화염병과 함께 던졌으며, <타는 목마름으로>를 목청껏 불렀고 최루탄이 터지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도시에서 저항이라는 즐거움에 취했다면, 요즘 젊은 이들에게는 더 이상 짜릿한 즐거움이 없습니다. 재미없게도 민주화가 되어버렸거든요. 그래서 그들이 택하게 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장미여관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콘돔을 깔고 이층을 짖습니다. 우리가 민주화의 댓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고작 성적 타락이라니? 이 무슨 김밥 옆구리 팍 터지는 소리입니까? 그러나 도시의 젊은 남녀가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여 건물 옥상에 함께 뛰어내리는 것보다는 좀 나을 것 같으니 용서하기로 합시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젊었을 때 요즘 젊은 이들과 같은 성개방 풍속 속에서 지낼 수 있었다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겁니다.

사악한 것과 음란한 짓거리들을 처음에는 용서하지 못할 것 같지만, 점차 그런 일들이 잦아지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자신도 그런 짓을 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똑 같은 짓을 벌임으로써 더 이상 분노를 느끼지 않게 되는 겁니다. 불감증이죠.

우리는 자신의 가족만은 이 사악한 소돔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소돔이 사창가와 술집과 러브호텔에 둘러쌓인 불야성으로 온전하게 남아있기를 바랄 것 입니다. 사악함과 죄에 중독되어 버렸기에 벗어나려면, 소금기둥이 될 운명에 우리는 처해 있는 것입니다.

롯의 아내가 되돌아 본 소돔성이 얼마나 찬란하며 매혹적이었을 것인가는 이 시대에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도덕과 인의예지가 반듯한 곳이 도시라면 저는 차라리 시골로 내려가길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시는 기대한 것 이상으로 음란해지고 마약이 판을 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칼부림을 하게 되며,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애새끼를 싸질러 놓고 도망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 숱한 사건이 벌어지고 저한테 주어진 방종과 쾌락의 한계는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말세지요.

그러니까 도시는 흥미와 분노 그리고 온갖 소문과 절대적 타인들에게 둘러 쌓여 있는 겁니다. 타인에 대하여 말하자면 내가 술을 쳐먹고 뒷골목에서 여자를 치근대다가 젊은 놈에게 얻어터졌다고 해도, 다음 날이면 넥타이를 매고 가장 근엄한 얼굴로 출근을 할 수 있는 곳 또한 이 도시입니다. 퇴근 때쯤 되면 누가 나를 팼으며 내가 지분거린 여자가 누군인지는 까맣게 잊게 됩니다. 누구나 밤이 되면 짐승이 되었다가 아침이면 인간으로 다시 변신하는 곳이 도시입니다. 우리는 뱀파이어들 입니다. 얼마나 환상적입니까?

잘 아시다시피 천국의 열락을 즐기기 위해서는 약간의 지옥도 필요한 것입니다. 드라큘라의 피와 같은 것조차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늘 고통을 맞이함으로써 행복과 쾌락의 그 짜릿함을 인식하니까요. 사실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인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도 지옥을 먼저 만들고 천국을 만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에덴에 불을 싸지르고 자신들이 추방된 것처럼 새들과 꽃과 짐승들을 추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벽돌과 유리와 철근과 콩크리트로 아주 정교한 도시라는 이름의 지옥을 만들죠. 그리고 우리는 도시라는 이름의 지옥에서 죄를 환호하며 맞이하고 늘 회개합니다. 그래서 붉은 십자가에 휩쌓여 도시의 밤은 타오릅니다. 저는 도시의 모든 지붕을 뒤덮은 붉은 십자가를 보면,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멸망의 그 날 그 시간이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점점 다가오는 것을 뚜렷하게 느낍니다. 저는 불안과 불면으로 시간을 지내다가 끝없는 죄악감에 식은 땀을 흘리며 잠에 듭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다시 인간의 근원이 야비하고 악하다는 것을 가을 날 새벽빛을 맞이하듯 불현듯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야비하고 악한 데 난들 어떡하겠습니까?

오늘도 공허하게 주절거리다가 끝나버리는군요

그렇지만 어떡하겠습니까? 누누이 말씀 드렸다시피 정답은 없으니까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시죠.

2006/08/11 15:16에 旅인...face
2006/08/11 15:16 2006/08/11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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