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6/30 19:56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잠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잠결에 게으른 바다 위로 파도가 치는 소리가 들렸다, 잠에서 깨어났다.

마당으로 달빛이 내려왔다. 물비늘조차 없는 게으른 바다는 젖빛으로 환하고 고요했다. 아잉은 달빛 아래 춤추는 듯, 한 손을 하늘로 올리고 한 손으로 물을 가슴께에 부으며 몸을 씻고 있었다. 물소리가 젖은 파도소리처럼 들렸다. 가녀린 몸에 닿는 달빛을 밀쳐내며 물이 흘러내렸다. 손이 너울 하늘로 오를 때마다 젖가슴이 함께 올랐고, 은빛으로 출렁였다. 쪼그리고 앉은 엉덩이와 허벅지 위에도, 발꿈치에도 달빛이 내려앉았다.

황홀하여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정말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땅 끝에서 맞이한 최후의 사랑이었고, 끝없이 안고, 쓰다듬어 주었음에도 늘 안타까웠던 나의 여인이었다.

목욕을 마친 아잉은 몸의 물기를 닦았다. 수줍던 그녀는, 달빛 아래 벗은 몸으로 문지방을 건너 나에게 다가왔다.

"아저씨, 아아 불쌍한 아저씨."

그녀의 한숨과 함께 차디찬 그녀의 속살이 내 가슴으로 뜨겁게 밀려왔다.

"사랑해요. 아저씨"

사랑한다는 그 소리는 긴 밤에 비하여 너무 짧아서 안타까웠다.


다음 날 오전 늦게 서울로 출발했다. 아잉은 고속버스의 차창으로 자신이 머물렀던 한국의 풍경을, 서울에 닿을 때까지, 내 손을 꼭 잡고 내다보았다.

놓칠세라 나도 아잉의 손을 꼭 잡았다.

서울에 도착해서 모텔을 정했고, 나는 아내를 만나러 갔다. 이혼서류에 아내가 가지고 온 인감을 찍고, 재산을 아내에게 양도한다는 등의 서류를 작성했다.

"오백만원은 달러로 바꿨어."
"고마워."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거지? 정말 남남인가?"
"모르겠어. 이렇게 지내다 보면 그냥 남남이 되겠지."

우리는 담담하게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모텔에 돌아와 아잉을 데리고 나가 저녁을 먹었다.

내일은 비원과 남산에 갔다가 한강에 가서 유람선을 타자고 했다. 아잉은 삐친 아이처럼 말도 없이, 나의 손을 잡고 방바닥 만 내려다 보았다.

월남에 입국할 때, 월남사람들이 줄 서는 곳에 줄 서지 말라고 했다. 한국 사람들이 줄 서는 곳에 서고, 베트남 말은 쓰지 말라고 했다. 잘못하면 입국이 안 될지도 모르니, 부 란 아잉이 아닌, 한국사람 정란애로 행동하라고 했다. 호치민의 호텔에 들어가 하루 밤 정도 자고 빈롱으로 내려가라고 했다. 달러는 한꺼번에 바꾸지 말고, 암시장에서 몰래 몰래 바꾸라고 했다.

아잉에게 가지고 있는 통장의 돈을 은행에 가서 달러로 바꾸자고 했다. 그리고 아내에게서 받은 오천달러를 그녀에게 주었다.

"아잉이 가진 돈과 이 돈을 합하면, 베트남 돈으로 일억동 쯤 될거야."

"일억동?" 그녀는 처음 듣는 말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숫자를 써서 그녀에게 보이며,

"이 정도라면 빈롱에 괜찮은 음식점이나 가게를 열수 있을꺼야."
"그럼 아저씨는?"

아잉이 베트남으로 가면,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둘 모두에게 행복한 일이라고 했다. 좋은 남자를 만나라고 했다. 착하고 젊은 사람을 만나야 된다고, 그리고 매일 매일 웃어야만 되며, 아저씨같은 사람은 잊으라고 했다.


아잉은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떠났다.

아잉이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너무 기쁘거나, 너무 슬픈 것에 대해서 오십이 넘어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리다. 또 슬퍼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잊지 않기 위해서 아잉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했고,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했다.

다시 섬 그늘에 잠긴 마을로 나는 내려왔다.

2007/06/30 19:56에 旅인...face
2007/06/30 19:56 2007/06/30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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