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04 08:25 : 오려진 풍경과 콩나물

때로 저의 무지의 깊이와 넓이에 대해서 놀라곤 합니다. 앰프에 전기가 걸리고 전기가 회로와 트랜지스터를 지나면서 발효되고 숙성되어 소리로 토해져 나오는 짧고도 집요한 시시각각들에 대해서 저는 알지 못합니다.

소동파는 적벽부에서 청풍명월이라는 말을 남깁니다. "강 위의 맑은 바람(淸風)과 산 사이의 밝은 달(明月)은, 귀가 얻을 짝치면 소리가 되고 눈과 떡하니 마주치면 풍경을 이루니, 이것들을 가진다고 해도 시비 붙을 놈이 없고, 쓰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이는 조물주의 무진장"이라고 말합니다. 오디오란 맑은 바람의 흔적을 결박하고 다시 풀어내어 우리의 심사를 긁어대는 기계라는 이야기인 셈 입니다.

출력이 100W고 앰프는 어떤 것이 좋고 하면서도 정작 소리는 귀로 듣지도 않고 귀동냥으로 얻은 지식 쪼가리를 들고서 장터에서 곁눈질을 하며 호주머니 속의 빈곤함만 탓하고 아내의 눈초리를 걱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딴에는 적은 돈이나마 제법 시스템을 갖췄다고 생각한 모양이고, 그 소리를 듣는답시고 홀로 즐거워했습니다.

즐거움도 길면 심심한 법. 저는 오래 전에 쓰던 스피커, AR 14의 소리가 듣고 싶어졌습니다. 물건이 있다는 경기도의 모처에 가서 보니 우퍼 한쪽이 제 짝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AR에서 빼낸 것인지 모양은 근사한데 우퍼의 깊이가 틀렸습니다. 맥이 빠져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KLH 32를 팔겠다고 한 곳이 떠올랐고 핸들을 돌려 그 곳으로 갔습니다. KLH 32의 몰골하고는... 못생겼다는 스피커들은 제법 써 본 편인데도, 이 놈은 통도 작고 두께도 얇고 어디에서 굴렀는지 통 한쪽이 어그러져 회칠을 하고 아무 페인트로 뺑끼칠을 해 놓아 한마디로 추물이었습니다. 떠날까 하다 한번 들어보자 한 것이 화근이었나 봅니다. 소리를 듣고 난 후 조용히 집어들고 집으로 왔습니다.

한달 정도 스펙조차 찾을 수 없는 KLH 32의 소리에 빠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스피커의 소리를 듣다보니 다른 앰프에 물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TU-870이라는 6BM8 싱글앰프를 발견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싱글앰프가 모노앰프인줄로 알았습니다. TU-870에 대한 설명을 보면서, 싱글이란 푸쉬풀의 반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싱글의 특징인 회로의 단순성에 매료되었습니다. 게다가 2W+2W의 출력에도 밀폐형의 AR이나, 저능률의 86db 짜리 스피커를 울린다는 거짓말같은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진공관에 대해서 알아볼 겸 TU-870 카페에 가입도 하는 사이에 튜브제로 카페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드와이어링 된 튜브제로를 보았습니다. 기판 위에 2차원으로 배열된 회로의 단정함보다, 3차원으로 배치된 선재와 컨덴서들의 간결함과 여유로움이 더 미적인 것 같다는 터무니없는 소리에 대한 저의 직관이 TU-870에 대한 미련을 접게 만들었습니다. 회화라는 평면예술보다 조각과 같은 입체예술이 소리에는 더 좋을 것이라는 상식을 넘어선 상식에 입각하여 튜브제로를 덜렁 사고 만 것입니다.

추운 날씨에도 무거운 튜브제로를 사무실 인근까지 가져다 주신 사장님 덕분에 그저께 부터 밤잠을 줄여가며 듣고 있습니다. 흥겨운 일입니다.

klh32/photos

KLH 32(이 스피커는 엣찌가 나오지 않고 들어가 있습니다)

튜브제로에 대한 감상평을 쓰고자 하여도 진공관이 금시초문인 관계 상, 일반 디지탈 앰프와 비교하거나 들어보니 어떤 기분이다 정도 밖에는 안되겠지만 써보기로 하겠습니다.

1. 100W vs 4W의 힘

갖고 있는 쿼드 405-2의 출력은 100W X 2 이며, 맞는지 잘 모르겠지만 튜브제로의 출력은 4W X 2 입니다. 하지만 느끼는 파워면에서 튜브제로가 월등하다는 것은 저의 상식과 100>4 라는 수학적 논리에 반합니다. 쿼드의 소리에는 뼈가 만져지지 않지만 튜브제로의 소리에는 뼈가 있습니다. 저출력의 경우 저역 특성이 퍼진다고 하던데 낮은 음으로 우퍼를 밀어내는 힘이 저의 횡경막을 치고 드는 것 같습니다. 소리의 부하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짜릿합니다.

2. 해상력

튜브제로로 들어보니 듣지 못하던 소리들이 여기 있었노라고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딥 포커싱으로 찍은 사진이 원경과 근경 모두 명료한 것처럼 트랜지스터와 복잡한 회로 속에서 잃어버렸던 소리들이 들립니다. '영혼을 위한 카덴자'(앙상블 시나위) 속에 나는 작은 종소리의 긴 여음이 잡히는 것으로 보아 범종소리 같은 들릴듯 말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여음조차 어느 정도 표현해 주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튜브제로로 음악을 듣다보면 피아노의 건반들이 사무치는 소리, 거문고 줄이 손톱이 긁히며 손끝에 스미는 소리, 그리고 공연장이 실내인지 오페라 가수가 노래부르기를 멈췄을 때, 무대 대각선에 앉아 있는 누군가 종이를 꾸기는 소리마저 들립니다.

3. 소리의 출렁임

여태까지 듣던 것과 달리 소리의 골과 마루가 한층 높고 깊어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소리들이 논리적이었다면 이제는 서정성이 짙어졌습니다. 아그네스 발짜의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한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4. 기타사항

쿼드라면 출력에 비하여 가장 작고, 심플한 모습을 한 앰프일 것입니다. 하지만 튜브제로가 내는 소리를 들으면서 쿼드와 크기를 비교하면 터무니없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소리를 내면서도 요렇게 작고 심플하다니 믿기가 어렵습니다.

dp2s130622004

tubezero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늦었지만 싱글앰프를 만난 것이 다행이며(그동안 진공관듣고 싶다고 했더니 말리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현재로는 몹시 만족합니다. 바꿈질 대신 진공관에 대해서 좀더 배우고 진공관이나 부품이나 바꿔가며 이 튜브제로를 오래오래 쓰고 싶습니다. 대신 음악을 듣는 오디오 생활로 옮겨가야 겠습니다.

20120204

2012/02/04 08:25에 旅인...face
2012/02/04 08:25 2012/02/04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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