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09 12:23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그 빛깔을 보면, 살(肉)에 대하여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여자를 性의 관점으로 소인수분해하여 드디어 남는 그 단어가 色이라고 했을 때, 그 색이란 무슨 색이었을까?

붉은 피가 모세혈관의 끝에서 하얀 피하지방 밑으로 사라지는 모딜리아니적인 색 만으로는 부족하다. 연분홍빛이 백색으로 사멸할 즈음, 청동의 녹과 같은 정맥이 살 밑으로 언듯 비치고 각각의 색들이 중첩되면 비로소 살색이 된다. 그래야만 클림트적이며 더욱 관능적인 냄새가 우러나는 법이다. 그 색은 허벅지의 안쪽이나 위팔의 겨드랑이 방향으로 몰려있는데, 때론 완벽한 순백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녹색 혹은 노란색이 감도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 그 色이라는 것은 생명에 대한 갈급한 욕망의 안쪽을 더듬는 환영과 중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9월의 하순, 아직은 햇볕이 지글거리는 도시의 거리 밑. 반지하 속으로 스미는 빛은 극명하다 못해 먼지들은 분주하게 브라운 운동을 하며 날아올라 빛이 스며드는 유리창에 격렬하게 부딪곤 했다. 빛이 부딪히는 소리는 너무 시끄러워 끼끼끼끼하는 지축을 울리는 소리같기도 했지만 8월의 플라타너스 잎의 그림자 아래에서 퇴약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를 빨아들이는 그 적막의 소리이기도 했다.

어리석었던 나는 당시 생명을 불순이라고 정의했다. 유기체가 다른 유기체를 섭취하여 강장(腔腸) 속으로 밀어넣고 점액질을 분비하여 에너지를 걸러내고 그 찌꺼기를 분비물들과 함께 배출함으로써 살아가는 형식은 불결했고, 정신 또한 육신에 기생하여 정(精)과 기(氣)를 껄떡이며 빨아가면서 사유를 발전(發電)하는 만큼 순수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빛과 그늘이 어깨에서 골반까지 대각선으로 가르는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면, 나의 생각이 그릇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빛이 내려앉는 어깨에서 팔뚝의 계면은 고유한 살색을 폭양 아래 소실하는데, 표피 위로 올라온 섬모들은 빛과 먼지들이 다가오기를 고요히 기다렸다. 4H 연필로도 선묘해내기 힘든 잔털의 움직임은 마치 바다 밑의 말미잘의 촉수처럼 고요했지만 만약 내가 잔털의 한가닥 만 건드려도 순간 꼰두설 것 만 같은 긴장감에 휩쌓여 있었다.

반면, 그늘 쪽의 팔은 대리석이나 이조자기가 지닌 차디찬 백색에 물체가 그림자 속으로 소멸되면서 두드러지듯 그녀의 피부와 공간이 마주하는 계면 역시 그늘이 깃드는 방식이었지만, 그늘 속에서 하얗게 부조되며 드러나는 그녀의 팔의 안쪽 풍경에는 체온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간혹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그 하얀 피하지방 속에 감도는 체온을 느껴보고 싶기도 했다.

탁자 위에는 공책과 표지를 감싸는 종이가 너덜너덜 찢어진 사학과의 전공서적과 발자크의 으제니 그랑데로 생각되는 책이 놓여있다.

으제니 그랑데라는 아가씨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그 소리는 사람 이름같지 않았다. 탄력있는 고무가 공허한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다. 골짜기의 백합에 나오는 처녀의 이름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 이름에 대해 가지는 호감은 어쨌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그것과 같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와 나의 뇌리에 맺히는 소리라는 점에서 그것들은 등가인 셈이다. 여름방학 내내 그녀는 나를 만날 때마다 자신이 읽었던 그리스의 신들에 대해서 나에게 하나씩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어렸을 적에 보았던 세계문화대백과사전 속의  그리스 신들의 조각상을 떠올렸다. 벌거벗은 신들의 젓가슴과 성기의 풍요로움을 나는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신들조차 쾌락과 희열을 위하여 생식을 위하여 서로의 몸을 비비꼬며 사랑을 해야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신들의 유쾌한 향연과 음란함과 편협함과 찢어지는 고통이 올림푸스 산 위에도 여전하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방학이 끝난 후 불핀치인지 하는 사람이 쓴 신화집을 읽어주었던 그녀보다, 더 많은 신들의 이름을 나는 기억할 수 있었다.

"어떻게 나보다 더 많은 신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거지?"

그녀에게 신의 음부며 젓가슴 그리고 그들의 체취까지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녀가 신들의 이야기를 하며 살짝살짝 드러내는 이빨과 간혹 마른 입술을 적시기 위하여 입술 위에 올라온 혀, 그리고 웃을 때 콧등을 따라 세로방향으로 구겨지는 주름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 입술에서 소리가 만들어지고, 그소리가 내 귀를 적시는 것을 아주 나른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여름의 오후가 느긋하게 갈피를 접는 즈음에 우리는 나란히 앉았던 어깨를 풀고 오래동안 잡고 있었던 탓에 축축해진 손을 놓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개학 후에는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인가 하는 갈매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갈매기들은 어디에서 사는데?"
"해변!"
"산에 사는 갈매기도 있단 말이니?"
"그러면 샌프란시스코 정도라고 하자! 금문교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그리곤 고개를 살짝살짝 흔들어가며 스콧 매캔지의 샌프란스시코를 불렀다.

이프유고잉투쌔앤프란씨스코우 비이슈어투웨어썸플라워스인유어헤어......

"노래 속에서 러브-인이라는 것이 뭔지 알아?"
"난 영어 잼병이거든, 그런 가사가 노래 속에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런데 혹시 사랑의 여관?"
"쳇! 음란하긴..."

"너 히피라는 것에 대해서 알아?"라고 말을 시작한 그녀는 러브-인(love-in)은 히피들의 모임이라고 했다. 히피는 우리가 알고 있는것처럼 머리나 기르고 마리화나나 피워대는 퇴폐적인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히피라도 되는 것처럼, 히피들은 자신들이 사랑 속(love-in)에 있으며, 꽃의 아이들(flower children)이라고 했다. 1967년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에 그들은 샌프란시스코의 하이트 애쉬버리로 몰려들었고 노래가사 마냥 평화와 꽃의 아이들이라는 표징으로 머리에 꽃을 꽂고 히피들의 모임, 러브-인에 참여했다고 했다.

"마치 새로운 먹잇감을 찾는 갈매기처럼?"
"아니지. 보통 저속한 갈매기들이나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 날지.
마치 너같은 아이처럼. 흐흐
그들은 단지 날기 위해서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샌프란시스코로 갔어.
히피들이 추종하는 갈매기란, 홀로 날고, 먹잇감보다 나는 것만 추구하는, 조나단과 같은 류지.
때론 치앙과 같은 갈매기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는 늙은 현자갈매기일 뿐이야."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그 책 속에 다 나오는거야?"
"아니, 그 사람이 알려줬어."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그녀가 말하는 그 남자는 나보다 두살 위일 것이지만, 사물의 핵심을 바라볼 줄 알고,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희노애락에 휩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쾌락이나 욕구에 물들지 않으면서도 쾌락의 근원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그런 사람같았다. 그러니까 정신 년령은 갈매기 張처럼 아주 늙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는 갈매기 치앙을 좋아하잖아?"

그녀는 나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는 단지 먹고 돈벌기 위해 살기만 하지. 사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서 도무지 생각하지 않아. 바닷가에 몰려들어 꽥꽥대는 갈매기나 아무런 차이가 없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은 동그랗게 커졌고, 눈썹이 올라가며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그 표정이 분노인지 '그렇지 않아?' 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눈을 바라보자,

"마치 나처럼?"하고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한숨을 쉬며, "아니... 미안해! 아무래도 내가 흥분했나봐."하고 나의 머리를 껴안았다.

섬유린스의 냄새인지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체취인지 아니면 비누냄새인지 알 수 없는 냄새 속에서 그녀의 가슴이 조용히 부풀어오르고 내려앉는 그 따스한 질감에 젖어 아늑해하고 있을 때,

"우리가 아는 것, 우리가 배운 것, 그런 것들이 다 실천되고 정말로 이해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천되고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아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거야. 정말이야."

그녀의 말을 들으니 그 말 뜻이 이해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내가 그녀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정말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그녀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20110113 習

2012/07/09 12:23에 旅인...face
2012/07/09 12:23 2012/07/09 12:23
Trackback URL : http://yeeryu.com/trackback/1128
◀ open adayof... Homo-Babiens ▶▶ close thedayof... Homo-Babie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