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2009.09.04일 초판이 1쇄 발행되었다.

올해는 교학사 한국사교과서의 왜곡문제로 시끄러웠다.

이덕일의 ‘한국사…’ 이 책은 교학사의 한국사 왜곡 정도는 우습다고 하는 것 같다.

2006년 중국의 동북공정이 가열되자 정부에서는 교육부 산하의 ‘동북아역사재단‘을 설립한다. 하지만 연구성과가 이병도에서 이어지는 식민사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논리를 제공하기 보다 동북공정을 강화하는 논리를 제공하는 망국적 기구화하고 있다고 이덕일은 지적한다. 물론 이전에도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문제가 되자 한 일 정상의 합의로 2002.05월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발족한 바가 있는데, 한일 간 역사에 문제가 되는 19개의 주제를 가려 2005.06.01일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양국의 사학자들이 인식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찾아 따지고 역사를 바로하기 보다 오히려 한국의 고대사의 연대를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이 비정한 시점보다 더 낮추는 등 더 식민사관이고 친일적이었다고 분노한다. 즉 국민의 세금을 축내는 관변사학기구들이 황국사관이나 중화사관을 지지하는 매국적 보고서나 만들어 내고 있다는 침통한 보고를 하고 있다.

이덕일은 그의 다른 책 ‘역사사랑’에서 황국사관이나 중화사관은 국가권력이 강하게 개입된 관 주도의 어용사학이며 강한 대외팽창성을 갖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공통적으로 우리 역사의 시공간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고 한다. 공간적으로는 우리의 대륙사와 해양사를 모두 소멸시키고 협소한 반도사로 한국사를 국한시키고, 시간적으로는 단군조선을 부인하면서 기자, 위만, 한사군 등 외지인이나 식민지로부터 우리 역사가 시작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사학계가 왜곡된 배경을 한국사의 태두라고 불리는 이병도가 식민사관 맹신에서 비롯한 것에 더하여 우리 학계가 스승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학문 풍토와 1차 사료를 학자 본인 스스로 직접 검토해가며 자신의 이론을 확립한 것이 아니라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이병도 등의 친일사학자들의 눈으로 바라본 역사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해 왔던 탓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즉 지도를 펼쳐놓고 삼국사기, 사기, 한서, 삼국지 등을 교차 대조해가면서 때때로 현지답사도 곁들여 역사를 연구해야 하는데, 선배교수가 불러준 노트나 딸딸 외어 석박사를 땄으니 인식의 지평이 스승에 비하여 넓어질 턱이 없다는 것이다. 또 한국의 상아탑이라는 곳이 스승의 연구가 틀렸다고 반박할 경우 학위를 따고 강단에 설 기회를 잃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틀린 이야기라고 할 수 없다.

이병도는 와세다에 유학, 일본과 조선은 같은 조상이라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주장한 요시다 토우코(吉田東伍) 밑에서 배우고 귀국하여 낙랑 평양설을 주장한 조선사편수회의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밑에서 수사관보로 근무하면서 식민사학을 구축하는 데 일조했을 뿐 아니라, 삼국사기 초기 불신론을 주장한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등의 식민사관까지 흡수하여 해방 후 ‘신수한국사대관’이라는 책을 써서 오히려 식민사관을 강화해왔고, 정인보 등의 민족사학자들이 납북 등으로 부재하게 되자 한국 주류 사학계를 식민사관으로 물들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 때문인지 이덕일은 “한국 주류 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축약한 것이 바로 국사교과서”(171쪽)라고 힐난한다.

이덕일은 4부로 나누어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존재했는가?”,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조작되었는가?”, “노론사관은 조선 후기사를 왜곡시켰는가?”,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가?”등을 묻는다.

1부.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존재했는가?

이덕일은 한사군은 물론 고조선 왕검성과 한사군의 위치, 그리고 패수나 열수가 어디에 있는가를 추적한다. 고대 사서와 지도를 펼쳐들고 이러한 보물찾기에 우리를 초대한다. 이 여행은 인디아나 존스 박사를 뒤쫓아가는 것 만큼 재미있다.

그는 사기, 한서 등에서 요동과 패수와 열수, 그리고 낙랑군 그리고 조선현 등의 사료를 찾아 기원전 1~2세기의 요동으로 간다. 이러한 고대사의 지명과 사건들이 압록강에서 대동강 일대라는 한반도 북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요동의 훨씬 서쪽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부근의 갈석산(碣石山)을 경계로 하고 있으며, 갈석산이야말로 당시로는 중국의 끝이자 만리장성이 끝나는 곳이며, 그 밑으로 흐르는 난하(灤河)야 말로 패수(浿水)라고 한다. 여기에 고조선이 위치했고 한나라와 싸웠으며 그 자리에 한사군인 낙랑군이 설치되었다.

이 글을 보면서 홍콩 중화서국에서 찍어낸 사기의 조선열전을 펼쳐보았다. 거기만도 방대한 주석이 달려 있어서 우리의 고대사가 지금의 북경 부근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는 방대한 자료들을 구할 수 있건만, 이병도 등은 어째서 해방 후에도 낙랑군을 대동강 일대로 남겨두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은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한국사를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우리나라의 학자가 스스로 자신의 고대사를 중국 것이라고 하는데, 중국이 마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2부.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조작되었는가?

우리나라 주류사학계는 쓰다 소우키치의 주장에 따라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모두 가짜라고 부인해버리고 ‘삼국지’ ‘동이열전’은 모두 진짜라고 한다는 것이다. 쓰다 소우키치가 삼국의 성립 시기를 늦추고자 한 것은 북부는 한사군이 있었고 한강 남쪽에는 삼한이라는 78개 소국이 우글거려야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를 존속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국사기에는 한반도 남부에도 백제와 신라라는 강력한 고대국가가 존재함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이병도 등은 삼국사기 초기불신론을 맹신한다.

이러다 보니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에는 쓰다 소우키치 등이 고구려가 태조대왕(53~146년) 때 건국되었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13대 서천왕(270~292년) 때까지 미루고 고대국가 체제는 17대 소수림왕 때나 되었다고 보고할 뿐 아니라, 백제는 이병도가 고이왕 27년(260년)에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완비로 고대국가를 성립했다고 했는데, 이병도가 근거한 ‘백제본기’조차 조작되었으니 더 늦춰야 한다고 하면서 낙랑군 대방군이 고구려에 멸망된 이후 높은 문화를 지닌 유민들이 편입된 근초고왕(346~375년) 때나 건국한 셈이라는 식의 논지를 펼친다. 몽촌토성에서 수습된 목탄, 목재, 토기 등 13점의 유물이 탄소연대측정 결과, BC199 ~ AD231년에 걸친다는 결과가 발표되었음에도 3세기 후반에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축조되었다고 보고서에 기재한다. 그리고 4세기 후반 고구려와 백제는 대방지역의 고급문화를 차지하기 위하여 30년에 걸친 전쟁을 벌인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들이 어느 나라 사학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더 우스운 것은 쓰다 소우키치가 ‘일본서기’를 근거로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부인했음에도 불구, 정작 ‘일본서기’의 14대 천황 이전의 기록에 의문을 달은 탓에 1942년 금고 3개월,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덕일은 고대 국가성립의 필요충분조건인 철기 생산시기가 신라에서도 서기 1세기 전후이며, 고고학계에서는 한국에서 철 생산 시기는 아무리 늦어도 서기 1세기 이전이라고 보고 있다.

3부. 노론사관은 어떻게 조선 후기사를 왜곡시켰는가?

서인들은 진정한 임금은 명나라 황제이고 광해군은 제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광해군이 임금을 배신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광해군을 내쫓은 것은 임금(명 황제)에 대한 충성이라는 논리 아래 쿠테타를 일으킨다. 이런 배경에서 서인의 후예인 노론들은 일제의 대한제국 점령에 협조하고 그 대가로 기득권을 유지했으며, 자기정체성 부인과 사대주의 극대화라는 점에서 노론사관이 식민사관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노론에 의하여 조선의 후기사가 왜곡되었는데, 율곡의 ‘십만양병설’, 송시열이 효종과 함께 북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하는 것이나, 노론계열이 실학의 이용후생학파를 주도했다는 등의 역사가 당시에는 노론, 지금은 이병도 등에 의해서 날조 또는 지지되고 있다고 선조실록 등을 펼쳐 증거를 대고 있다.

정조와 심환지 간의 어찰이 발견되자 연구자들은 이 어찰이 정조 독살설을 부인하는 결정적 자료라고 주장했고 이 주장이 언론에 큰 글씨로 특필되었다. 하지만 이덕일은 어디에도 결정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들은 어찰을 보니 심환지와 정조가 친했고, 몸이 아프다는 구절로 보아 심환지(노론)가 죽일 리도 (독살로) 죽은 것도 아니라고 급히 말한다. 이덕일은 어찰이야말로 항상 대척점에 서 있는 노론세력을 컨트롤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며, 정조와 노론세력 간에는 어쩔 수 없는 의리의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영조가 경종을 죽이지 않았다는 신축년(1721년)과 임인년(1722년)의 사건에 대한 임인의리의 문제는 노론이 주도한 사건이고 정조는 영조의 후손인 만큼 공통의 합의 사항이고, 정조의 즉위 후 반대자인 화완옹주와 정후겸에 대한 사형 후 발표한 ‘명의록’에 대한 의리는 어느 선에서 상호 합의가 가능한 부분이지만,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년의 의리는 결코 타협될 수 있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즉 노론 아니면 정조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 해소될 수 있는 불구대천의 문제라는 것이다. 노론벽파는 뒤주에 갇혀 죽은 일은 노론이 살기 위해서라도 옳은 일이고, 정조는 부친 살해사건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28일 전 오회연교(五晦筵敎 : 다섯번째 그믐날 경연에서 내린 교시)에서 한 이야기가 빌미가 되어 독살되었다고 본다. 그 날 정조는 “그것이(노론 벽파) 한 번 굴러 모년(사도세자 죽은 사건)의 대의리에 관계되었고, 두 번 굴러 을미년(1775년: 세손인 자신의 대리청정 반대사건)이 되었고, 세 번 굴러 병신년(1776년: 정조 즉위년의 즉위 방해사건)이 되었으며, 네 번 굴러 정유년(1777년: 자객의 정조 암살시도)이 되었다. 정유년 이후는 … 나 또한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정조실록 24년 5월 30일조)고 말한다. 이는 이 모든 사건에 노론벽파가 연루되어 있으며 자신의 뜻에 동참하지 않으면 관두지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를 간파한 노론에서 정조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4부.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1910.08.22일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한 그 해 10월 일제는 76명에 달하는 조선인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내려준다. 76명의 명단을 보면, 그 중 당파를 알 수 있는 인물 64명 중 노론 56명, 소론 6명, 북인 2명, 남인은 없다. 단적으로 3부 노론사관과 맥락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노론이 친명 사대주의를 주창한 이유는 성리학을 무기로 국왕과 권력투쟁을 하기 위한 것이며, 임금이나 왕조에 대한 충성이란 개념 대신 개인과 집안, 당파의 이익에 민감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했고 일제 수작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이덕일은 분석한다.

이런 가운데 해방 정국 이후 친일파와 친일사학자가 주류 세력이 되다보니, 독립을 쟁취하고 새 정부가 수립하면 독립운동사 연구가 붐처럼 일어나는 것이 보편현상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까지 상아탑 내에서 현대사 연구는 터부시 되어왔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고통과 가난 속에 삶을 마감하여 자료를 확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독립운동사는 무장투쟁사를 우선하는 것이 원칙임에도 ‘국사교과서’는 무장투쟁보다 식민지 체제 내의 애국계몽운동이나 실력양성운동 등을 위주로 서술하다 보니 마치 항일 무장투쟁이 없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형편 속에서 해방 후 수립된 정부 성격이 민족정체성 수립과 거리가 먼데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표창과 친일세력에 대한 정리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정부 수립 후 과거사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인적 표창과 친일파에 대한 청산고 함께 각종 식민지배 이론에 대한 청산작업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여 현재까지 짐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덕일은 이승만 정부 시절 독립유공자로 표창을 받은 사람은 이승만 자신과 혼자 받으면 비난이 일까봐 준 이시영 부통령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한다. 이러니 독립운동가를 발굴할 이유도 없고 안중근, 홍범도,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열사 그 누구도 독립유공자가 아니었다고 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며, 역사다.

참고로 이덕일은 숭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사회주의계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연구 논문인 ‘동북항일연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This Post Has 2 Comments

  1. 후박나무

    왜곡되거나 주류의 견해만 반영된 반쪽짜리 한국사…
    학계의 풍토도 그렇고, 정부의 정책도 그렇고
    잘은 모르지만 요즘의 역사 이슈들은 답답하고, 안타까운 상황이 많은 것 같네요.ㅠ

    1. 旅인

      지도층이라고 하는 자들 때문에…
      그런 지도층이 형성된 식민지와 대한민국사 때문에…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왜곡과 거짓으로 점철된 역사를 끌어안고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정말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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