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소도시의 하루들

어느 소도시로 일을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숙소에서 자지만, 때론 서울의 집으로 빨랫꺼리를 가져가거나 밑반찬을 들고 다시 이 곳 소도시로 내려옵니다.

이 곳에서 머문 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적에 보았던 반세기가 훨씬 지난 극장 건물에 아직도 붓으로 그린 간판이 걸려있는 것이 보이는 이 곳은, 아주 낡은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무너지고 사라지기 위해서 있는 것 같지만, 제가 어렸을 적 보았던 외갓집 앞의 논과 밭이 있던 자리 위로는 집들이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그 집들 조차 낡았고 사람들이 살지 않는 듯, 퀭합니다. 낡은 것 위로 새 것이 들어섰지만 그마저도 낡아버린, 이 도시의 외곽에는 쓰레기와 맨 땅이 구분이 안되는 들 위로는 비닐봉지가 겨울바람에 날아다니고, 헐벗은 미루나무 위로 차디찬 겨울의 감귤빛 노을이 걸쳐집니다.

이 곳에서 아직 끼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막막합니다. 숙소 근처의 중국집의 벽지에 곰팡이가 1/3 쯤 점령한 것을 본 후, 할 수 없이 컵라면의 아직 제대로 풀어지지 않은 면발을 잘근잘근 씹거나, 싫어하는 빵을 사기 위해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곤 합니다. 겨우 깔끔한 백반집을 하나 찾긴 했지만, 저녁 7시면 장사를 파하기 때문에 저녁 또한 찾아 먹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퇴근 후 일찍 몸을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불현듯 깨어났더니, 아무도 없는 방 한쪽 구석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의미가 없는 공허한 소리였습니다. 무서워 눈을 뜨고 소리가 나는 곳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한동안 들었더니 윗 집인지 아랫 집인지 부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소리였습니다.1후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윗집의 부부가 싸우는 소리였습니다 그 후 아래 윗 집의 방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골목에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소리 그리고 도로 위를 하얗게 헤드라이트를 밟고 지나는 차량의 소리등이 들렸습니다. 겨울의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소리들은 하염없이 많았고, 시계의 인광은 11시 48분을 째깍째깍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숙소에는 TV도 없고, 저에게는 노트북이라든가 하는 것도 없습니다. 단지 스마트폰의 신문기사나 보다가 하루를 마감하곤 합니다.

할 수 없이 소식이 뜸했습니다.

This Post Has 8 Comments

  1. 리얼리티

    일본드라마의 소도시를 연상하면서 글을 읽었습니다.
    목소리며, 손길이며, 눈길이 알려지고 기록된 것보다 더 중요한 것 같다는 답글이
    마음에 남았었는데 이렇게 소식을 접하니 ‘시간의 다른 결’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이 풀어낼수 있는 시간은 간격이 무한정이면서 정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어서 더 그렇게 생각이 드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용한 시간은 긴 하루를 넓게 펼칠 수 있어서 늘 멀리서 바라보는 걸 좋아하는 제겐
    좋은 시간이 되곤하는데…의미없음에 의미를 선물한다는 아이의 말이 생각나네요.

    1. 旅인

      이 곳은 낡은 것들이 사람의 손길을 타서 따스해지고 익숙해지는 일본의 소도시같은 느낌이 아니라 낡은 것 위로 곰팡이가 슬거나 아니면 말라 바스러지는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싫다는 뜻이 아니라, 멸망과 폐허가 가까왔으며 이 곳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라는 신탁을 받은 것 같습니다.
      여태까지의 일이란 기획하고 만들고 성취하는 것이었다면, 지금 제가 하는 일은 시간을 주물러 바스러트려 먼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가혹한 일이지만, 이런 무의미한 일을 한다는 것이 만족스럽습니다.
      아드님께서는 추운데 군대생활을 잘 보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2. 위소보루

    글을 읽고 있자니 마치 그 작은 도시가 어느 경계에 있는 곳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달리 시간은 천천히 흘러갈법한 느낌입니다.

    아무쪼록 타지에서 끼니 거르지 마시고 몸조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1. 旅인

      예 아주 만족스럽게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생각할 것도 많고 좋습니다. 끼니는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거르지를 못합니다.^^

  3. 후박나무

    오랜만에 뵈어요 여인님.^ ^

    타지에서 일하고 계시군요.
    아~끼니가… 환경이 그리 안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건강 단디 챙기셔요.

    1. 旅인

      요즘은 인터넷 접속이라곤 뉴스 정도만 보는 정도입니다.
      끼니, 잠자리, 옷, 통신 모두 불편합니다만 건강은 잘 관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익숙해지겠지요.

  4. 아톱

    오랜만이에요
    그간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살짝 궁금하기도 했는데 소식을 전해주시네요
    글을 읽으면서 소도시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보았어요
    음 좋아요
    때론 시끌벅적한 곳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조금은 느린 곳에서 생활 하는 것도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그러나 끼니는 거르지 마시구요
    건강 잘 챙기시길…

    1. 旅인

      요즘 아톱님의 서울 생활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도통 이웃분들 소식을 엿보질 못해서 말입니다. 저처럼 타지생활을 시작한지 얼마안되어 많이 불편하실 것 같습니다, 저야 일주일에 한두번 집에 들리고 있어서 그나마 괜찮은데, 아톱님은 집이 부산이라…
      아무튼 아톱님께서도 객지생활에 빨리 익숙해지시고 건강 잘 챙기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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