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2/15 16:40 : 황홀한 밥그릇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울산 동구에 가면 가정 주부들이 취미생활을 매우 다양하게 하고 있다. 남편을 직장에 보내고 한가로운 시간에 울산 동구에 사는 가정 주부들은 차를 타고 취미생활을 하러 간다. 취미생활을 하러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가정주부들은 이곳에 가서, 취미생활을 한다. 수영, 헬스, 에어로빅, 볼링…… 그리고 주부대학을 다닌다. 또 주부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은 열심히 노력하면 취미생활을 다양하게 하고 취미생활을 통한 신분상승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고취시킨다. 그리고 노동자 가족이 아닌 중산층으로써, 당당한 시민으로써 살아가게 된다. 주부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가정 주부들은 많은 일들을 한다. 자신의 취미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남편에게 잔업을, 특근을 요구하고, 파업을 할 시기에 노동자인 남편에게 조용히 살자고 요구한다. 그리고 선거 기간이 되면 모 국회의원의 당당한 선거원이 된다.

- 1984, 우리는 합창한다’의 팜플렛 중에서 -

이 글을 읽고 난 후,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 글이 민주화 이전인 1984년에 쓰여졌다는 것을 간신히 알았다. 그리고 이 글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에 대하여 도무지 알 수 없기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이십년이 지난 현 싯점의 퇴폐의 그늘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탁견이라고 생각했다.

이 글에 있어서 노동의 대립항은 자본만이 아니라, 풍요, 문화, 아내로 치환된다. 노동에 대립하여 모든 것이 반동의 그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소외는 노동현장에서 뿐 만 아니라,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도 극단화되어 간다고 본다.

울산의 성인나이트 클럽에 가면 끝내줍니다. 아줌마들이 떼거지로 몰려옵니다. 왜냐고요? 남편들이 야근에 들어간 조組의 부인들이 긴긴 밤을 즐기기 위해, 젊은 애인 하나 만들자고, 그렇게들 오지요.<울산에 장기 출장을 갔던 직원의 이야기>

그 아지매들, 애인도 없는 기 유부녀라 할 수 있나 카며 물 좋은데로 데부달라 카데요.<부산 택시운전사의 한탄>

이렇게 풍요는 퇴폐로 노동자의 외곽을 포위 섬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가정과 현장에서의 소외를 감지하든 아니든, 근로자들은 자기의 소외를 타인의 소외라는 형태로 외화해 간다. 그들은 술집에 가서 저질스럽고 변태적인 수작으로 상품화된 성을 소비하고 결국 접대부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소외시켜감으로써 거시기의 주체를 발기시키는 도착적인 관계의 그물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외는 사회의 음울한 형식이 된다. 아이들은 한 놈을 왕따(소외)시킴으로써 자신이 어느 동아리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가학성 음란증에 시달린다.

그렇다. 어떻게 복합적인 사회를 어떻게 노자의 대립이라는 일면으로 해석할 수 있겠는가? 근대의 주체를 소외해체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모두 자기의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빨갱이일지도 모른다. 결국 인간은, 자기 주체로 어떠한 것을 결정할 수 없으며, 자기 의사에 따라 노동을 하지 못하고, 어떠한 것도 소유할 수 없음을 프로렐타리아라는 대체재로 표현했던 것인지 모른다.

취미생활이나 주부대학이 자본가와 정치 권력이 교묘한 음모 속에서 만들어낸 노동탄압의 기제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는가?

그러나 현실의 담론의 기저에 있는 '돈을 벌어야 한다. 품위가 있어야 한다.'라는 부르조와에로의 충동이 담론 형성을 돕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모든 것은 돈으로 통하는 법이다.

며칠전 회사에서 정직이라는 것을 중시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이것은 균열된 도덕적 특수성을 의미할 뿐이며, 언어의 함수관계와 자의적인 약속 체계가 갖는 의미의 내포마저 김밥 옆구리 터지게 만드는 그 무엇이며, 언어의 기괴성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보는 동기가 되긴 했다.

여기의 정직은 조직 내에서만 그렇다는 것이지, 사회적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쟁사회라는 조직의 밖으로 나갔을 때는 공교로운 술수가 미덕으로 요구된다. 또한 정직이 화두로 올라온다는 것은 불신을 전제로 조작된 것인데, 내가 보기에는 믿지 못할 그 무엇이 명확하게 대상으로 불신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 속에 있는 막연한 불안감이 불신으로 기표 변화된 것에 다름아니다. 그래서 설령 우리가 끊임없이 정직하고자 노력하더라도 발화자는 막연한 불안을 해소하지 못할 것이며, 끊임없이 우리를 불신할 것이다. 그 불신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정직이 아니라, 기대 이상의 수익과 회사의 발전이다. 그러니까 발화자가 자신이 불안에 대하여 정직하게 맞대면하지 못한 결과, 우리에게 정직하라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언어에서 마저 우리는 소외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조차 모를 때가 있다.

2005/02/15 16:40에 旅인...face
2005/02/15 16:40 2005/02/1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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