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川寄宿을 보며….

노천기숙이라는 것은 아무 뜻 없이 내가 예전(대략 87년쯤)에 썼던 글이다. 단문의 논문도 수필도 아닌 잡문이다. 그때 미술을 전공하였던 누님에게 한 번 혜람해 주실 것을 부탁하였으나 너무 어려워 이해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셔서 다시 새로이 글을 고쳐 쓰고자 한다.

1997.12.31일 홍콩에서

화랑의 한 쪽 구석에 『盧川寄宿』이라는 동양화가 있다. 발묵으로 그려진 풍경은 여름의 기나긴 장마 속에 농염히 젖어있다. 寄宿하는 사람은 어디 있을까? 강변의 정자에는 아무도 없고 개천은 미동도 없이 흐른다. 침묵 속으로 풍경은 빗소리와 함께 녹아내리고 유구한 세월의 다양한 싯점들이 묵의 퍼짐과 함께 화폭에 맺힌다. 과연 그림에 있어 사물들은 명료하게 인식될 수 있는가? 과연 그림의 주인공인 기숙하는 자는 어디 갔는가? 혹은 관람자인 내가 노천을 굽어보며 기숙하는 자란 말가?

예술을 싸잡아서 미학이라는 테두리 속에 끼어 맞춘다는 것은 대롱을 통해 하늘을 보고 자신이 본 하늘 만이 옳다는 편집일 것이다. 아름답다, 좋다, 슬프다……등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언변을 통하여 설명한다는 것이 과연 옳을 것인가? 이성적이고 수학적인 것이 아름답다는 것 또한 맞는 말이기는 하다. 우주의 움직임, 그 자체가 피타고라스가 말한 코스모스적인 하모니 하에 움직인다는 점, 그리고 그 하모니야 말로 엄밀하게 물리학적이라는 점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가 아무리 오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육신과 감정 전체가 오성의 굴레에 갇혀 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볼 때 『노천기숙』이라는 이 그림은 서양화의 관점에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양식의 패턴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나는 미학이라는 측면에서 보다는 이 그림을 포괄하는 동양화(동북아 3국의 그림)와 르네상스에서부터 근대(로코코)에 이르기까지의 서양화의 양식 상의 차이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왜 동양화와 서양화는 양식 상 그토록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가?

분명 단순한 논리로 양식 상 차이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며, 양식의 차이를 만들어 낸 무수한 요인이 있을 것이다. 이른바 마르크스의 하부구조(붓이나 종이)가 상부구조(예술적인 관점)을 결정한다는 토대결정론에 입각하거나,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한 배경인 무속이나 제의로 되돌아가 원초적인 인간의 의식을 바탕으로 예술의 발전과정을 유추한다던지(통시적인 분석) 구조인류학적(공시적인 분석)인 입장에서 양식 상의 차이를 규명해낸다던지 하는 능력은 나의 가방 끈 길이 상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내가 아는 좁은 테두리 안에서 사전에 쓰여진 말과 남이 한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섞어 아는대로 씨부리면 되는 문화사적인 입장에서 논구하고자 한다.

밀라노의 싼타마리아 델레 그라치 수도원의 구내식당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템페라화 『최후의 만찬』이 퇴락한 채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다. 벽화는 하도 낡아서 제자들의 얼굴표정이나 다빈치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빛의 미묘한 거리감이나 색조는 사라지고 말았으나, 벽화의 가운데에는 예수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느그들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신 뒤 공허한 표정을 떠올리고 있으며 제자들은 “시방 선상님이 무신 구신 씨나락 까 잡수시는 말씀?”하며 서로를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 지를 의심하고 서로 의혹에 찬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그 날, 그 다락방에서의 만찬 마지막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고 있다.

본래 다빈치는 르네상스 때 개발된 원근법이 지닌 기하학적인 견고성과 입체감으로 인한 투명성과 명확성이 화면 전체의 유기적인 통일과 조화를 해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스푸마토(공기원근법)에 의하여 원경을 뿌옇게 처리하는 방식으로 공간 상에 존재하는 먼지를 그림에 개재 시킴으로써 보다 조화되고 사실적인 화면처리를 했으며, 모노크롬에 가까운 단색조로 화면을 도색함으로써 광선이 사물에 부딪혀 산란하는 미묘한 분위기와 색조를 만들어 냈다. 이리하여 동시대의 여타 그림들과 비교해 볼 때 빛과 그림자가 오묘한 깊이를 더 하는 예술을 창조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시도는 그가 예술을 추구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인간과 자연, 예술과 과학의 세계 간에 나타나는 대립을 해소하고 조화시키는 데 있었다고 하나, 그렇다고 그가 그 시대의 사조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만년에 『원의 구적법』과 『만곡면의 기하학』등을 집필한 점과 『삼왕조래』와 『최후의 만찬』의 습작에서 보여준 치밀한 기하학적인 계산은 바로 피타고라스의 수적 질서와 하모니의 계승자로써 구도와 원근법을 더욱 발전시킨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르네상스의 미술이 지닌 기술적인 특색을 종합해보면 조각이라는 공간예술이 회화라는 평면예술로 치환되는 역사적인 과정에서 평면예술에서 결여될 수 밖에 없는 입체감은 원근법과 뎃셍기법의 괄목할 발전에 의해 보완되었으며 이를 위해서 빛이 사물에 부딪히는 각도와 그림자에 대한 충분한 관찰과 분석이 계속되어 왔을 것이다.

천재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요놈이 바로 누구다」라는 화살표로서의 머리 뒤 광배를 제거함으로써 비현실적인 신격을 배제하면서도 다락방 만찬장의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이마에 소실점을 두어 관람자의 눈이 자연히 드라마의 주인공에게 쏠리게 하는 동시에 화면의 소실점이 관람자가 서 있는 공간과 연결되는 느낌을 주어 싼타 델라 그라치의 그 벽은 단순한 벽이 아닌 『최후의 만찬』이 열리는 그 날의 그 곳으로 시공이 합류하는 차원으로 진입하게 된다. 아멘!

그렇다면 동양화에서 기본원칙은 무엇인가? 나도 잘 모른다.

동양이 테오리아라는 이론지에 입각한 보편타당성을 추구하지 않고 프락시스라는 실천지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사고를 발전시켜 왔다는 점에서 동양의 전적을 통하여 동양화의 미에 대한 보편타당한 답을 할 수 없으며 장자의 미에 대한 소견을 보면 미의 절대성 또는 보편타당성은 장자의 일절, 서시라는 미녀가 물가으로 가면 물고기들이 도망간다는 상대성에 의하여 무차별적으로 폭격 당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어떤 이론적 어프로우치보다는 나의 직감적인 어프로우치로는……

동양화 특히 산수화의 표현양식은 서양화가 취하고 있는 기하학적인 엄밀성보다 도식적인 정형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듯하다.

물론 동양화에서도 중국 淸朝의 『佩文齊書畵譜』에 쓰여진 「山水畵家 繪宗12忌」를 보면 구도는 단순하게(布置迫塞)하게, 원근에 따라(遠近不分), 사물을 입체적(石止一面)으로 표현할 것을 권하고 있으나 이는 曲尺(기하학)에 의한 원근법을 요구한 것이 아닐 것이다. 謝赫은 육법을 내세워 사물의 본래 모양대로(應物象形), 잘 옮겨그려야 한다(傳移模寫)고 하였으나 더욱 중요한 제일원리는 기품과 자아표현(氣韻生動)에 있다.

정형화라 함은 비록 위에서 권고하듯이 보이는 것을 그 모양대로, 구도에 맞게 그리라고 하고 있으나, 동양화는 상당히 양식적인 패턴을 보이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저 그림에서와 같이 산수화는 이런 것이다라는 표준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산이다. 저것은 물이다. 그것은 구름이다라는 묵계가 화가와 감상자 사이에 개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양화를 감상하면서 기본적인 양식을 염두에 두지 않고 부분, 즉 바위나 물 등을 보았을 때 사실 상 판독이 어려울 때가 많다. 저 그림에서 강물은 빈 배가 떠 있음으로써 강물이 되며, 사물들은 서양적 사고방식인 사물과 사안들은 쪼개야 알 수 있다(분석)는 식으로는 이 동양에서는 점점 더 모호해질 뿐이다. 서양의 분석은 원자론적인 가분할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분석된 개체를 조합하면 전체가 종합될 수 있다는 망상은 완전히 기계론적이다. 그래서 생명에 대한 관점은 사그라든다.

물활론적인 동양에서는 相對보다는 相待의 개념이 중요하다. 相對는 대립이나 相待는 서로 교호하는 차원이다. 배가 있음으로 강물이 존재하고 산이 있음으로 하늘이 그려지는, 서로가 의존하는 그래서 융통 화해된 우주(천지)와 사고가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그림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양식을 선체험하고서 그를 바탕으로 그림 전체를 바라보게 될 때 비로서 사물들 각각의 부분들, 돌이나 하늘 그리고 강물 등이 명료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또한 동양화에서는 보이는 것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도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다. 그림에서 폭포나 호수, 산봉우리들은 함축적인 표현일 뿐이다. 노자의 도덕경이 삼천자에 불과하지만 오만자의 해설서로도 그 내포된 의미를 설명치 못하고 본의에서 더욱 멀어져 가듯 그림의 여백이 더 많은 것을 그리고 있다. 이는 노자가 말하듯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지만 쓸모가 있는 것은 텅빈 곳의 충만함이라 하고 바큇살이 모이는 그 중심은 결국 빈 구멍이라 하듯 저 그림에서 배를 그림은 강물을 표현코자 하는 역설이다. 파라독시컬한 로직이 하나의 논리로 자리잡고 수천년을 지속해 온 문명의 보편성, 그 찬란함은 끝내 화면마저 초월해 버리는 것이다. 과연 저 그림에서 산구비를 돌아가면 또 무엇이 있을까? 노천에서 기숙하는 자는 어디 있는가? 혹은 내가 기숙하는 자가 아닌가? 나는 노천을 배회하는 하나의 과객으로 변화하여 그림 속으로 스며들고 서양화에서 느낄 수 있는 대물적인 긴장감은 사라져버린다.

이와 같은 나의 이야기는 단순히 서양화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차이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종말론이 지배하는 서양에 있어서는 시간의 흐름은 천국과 지옥의 도래를 의미하며 역사라는 개념으로 대입해 보면 시간은 인간의 자유 혹은 경제의 발전, 기술의 진보를 이룩하기 위한 동력으로 이해되며 이런 목적론적인 시간의 과정 속에서 질료인 과거의 산물들은 부단히 비판되고 재해석된다. 미래를 위한 부단한 창조라는 강박관념은 또한 새로운 양식의 산출을 촉발했다. 반면 동양은 현상세계나 현재를 지양함으로써 이상세계나 절대존재(신) 속으로 흘러들 수 있다는 발전사관을 취하지 않는다. 현상세계의 파행성, 불완전이야말로 道의 움직임을 가능케 하며 만물이 생성 화육할 수 있는 변증적(서양의 대립 발전적 과정으로서의 변증법적 과정이 아님) 토대가 된다고 본다. 따라서 현상세계와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에 주안점이 두어져 왔다.

분명 인간은 원초의식을 바탕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상을 초월한 어떤 지고의 존재나 이법에 대한 갈구를 계속해 왔다. 그러나 접근법이 달랐으며, 이 차이야 말로 동서양이라는 거대한 문화의 단층을 형성했던 것이다. 플라톤이 현상세계를 초월한 이데아의 세계를 상정하면서 인간은 다시 이데아의 세계로 회귀할 수 없으며 이 세상은 불완전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으며 오로지 이성 만이 이데아의 세계를 상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숲의 천자만홍은 기하학적 질서에 위배되며, 우주 상에는 완벽한 직선이나 원운동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으며, 모든 인간의 노력은 엄밀한 의미에서 근사치에 접근하는 과정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절대온도, 무중력, 절대진공, 초전도 등은 결국 도달될 수 없는 지평인 것이다.

이와 같은 플라톤적인 사고는 결국 기독교의 역사에서 나타나듯 기원후 3백년 경 니케아 공회에서 사도신경을 만들고 교황을 중심으로 한 강령을 채택하여 「신을 알 수 있다」라고 보았던 그노시스의 무수한 전적을 분서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결코 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신과의 결별을 고하였던 것이다. 결국 신은 섭리와 이법 속으로 스며들고 인간의 역사 속을 배회할 뿐 인간 속에 스며들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 후 임마뉴엘 칸트란 작자가 왜 과학이라는 것이 현상세계와 왜 고로코롬 짝 맞아 떨어지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연구 논문인 『순수이성비판』을 씀으로써 종교로부터 과학으로 신권을 이양토록 하였지만, 인간의 이성을 단지 사유하는 기능적 기관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결국 연혼, 시와 예술, 믿음과 사랑, 의지 등은 인간 속의 다른 영역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되었다. 그는 마지막 휘니시 불로우로 인간의 사유구조 밖에 있는 「物-自體」는 결국 인간의 사유구조 상 인식될 수 없기에 알 수 없다는 악 소리도 할 수 없는 불가지론을 맹글어 냈다.

결국 이 전부는 인간의 이성으로 인지할 수 있는 현상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으로도, 믿음으로도, 도덕률에 의해서도 실체와 간격을 줄일 수 없음을 단언한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그림『천지창조』에서 여호와와 아담의 손가락 사이의 틈은 영원히 메워지지 않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안타까움인 것이다.

그러나 동양의 이데아는 誠이며, 인간의 가능성은 誠之이다. 이때 誠(誠者)은 현상세계의 천지만물의 운행(天之道也) 속에 드러나며 이러한 하늘과 땅의 움직임에 참여(誠之者)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도리(人之道也)라고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을 초월한 신이란 동양인의 사고체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염라대왕과 옥황상제도 시공의 제약을 받는다. 단지 특권이란 장생불사하고 초능력을 가지고 인간을 컨트롤할 수 있을 뿐, 천지조화에는 간여할 수 없으며 만약 간여할 시 봉고파직임에 틀림없다.

道 자체도 자연을 지배하는 원리가 아니라 자연을 따르는 것(道法自然)이라고 한 것처럼, 자연이란 생명을 지니고 자기 컨트롤해 나가는 자기원인에 의한 자기 조절 시스템인 것이다. 당연히 신은 자연에 개입할 수 없으며 우주원리에 신적 요소가 배제되고 만다. 대신 우주원리요 인간에게 제시된 규범적 틀인 주역과 음양이 비판없이 수용되고 이의 확충과 다단한 응용이 문제로 남게 된다. 이리하여 서양철학이 플라톤에 대한 각주라면 동양철학이 불교를 수용하고 발전시켜 왔음에도 주역의 각주에 다름없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말도 않되는 논지를 바탕으로 볼짝치면 서양화가 이데아를 배경에 깔고 신의 형상에서 사물로 이전해 오면서 피타고라스의 수적 완전성과 하모니를 바탕으로 양적 엄밀성, 즉 관람자가 보았을 때 빛과 그림자 그리고 표현의 정확성 등에 주안점이 두어져 왔다면 동양화는 그림을 통하여 부단히 변화(易)하고 움직여 가는(行) 자연의 표현은 불가능하므로 정형화를 통하여 질적 깊이 쪽으로 천착해 들어갔다.

사물을 계량화할 수 있다는 양적 세계관은 주관의 개입을 배제(수의 특성)시키고 대상의 객관화를 추구케 하였으며, 이데아론에 입각한 자연(현상세계)에 대한 영혼의 우위는 미의 대상을 자연스럽게 인간에 집중시켰다. 또한 표현하고자 하는 내면세계도 현실세계가 낙원의 변경이며 인간은 고통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비탄과 절망, 분노와 공포, 기원과 갈구 쪽으로 흐르게 되어 그림은 드라마틱해지는 것이다.

반면에 동양은 인간이 하늘과 땅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이상, 자연(현상세계)에 대한 인간의 우위는 주장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의 관심의 대상은 자연에 귀착되는 데 항상 꿈틀대고 숨을 토하는 생명이 충만한 자연은 계량화될 수 없는 엄숙성을 지니고 있다. 측정할 수 없으되 자연을 느낄 수는 있다. 이러한 느낌의 차원을 표현할 경우 불가피하게 부딪히는 것은 표현의 한계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는 이 유명한 언명은 이를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릴 것인가? 표현하지 않는 표현이다. 분명 동양에서도 그리지 않는 그림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화가도 먹고 살아야 한다. 또 어떻게 하면 우미하게 그릴 것인가, 웅혼하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고심도 한다. 그래야 돈을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또 사물을 객관적으로 그리고자 하기도 한다. 그래야 욕을 안 먹는다.

문제는 붓이 스치지 않은 자리, 여백이다.

이른바 烘托(홍운탁월법). 이는 대상(달)을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고 대상이 아닌 것(연기)을 그림으로써 대상이 드러나게 하는 파라독시컬한 방식이다. 이러할 때 산을 그린다는 것은 하늘을 그리기 위함이요, 산중턱에 걸친 구름을 그리기 위함이다. 표현되지 아니한 하늘, 공허한 구름, 사라져 버린 노천에 기숙하는 자. 이와 같이 동양화는 빛과 그림자가 혼돈되고 선과 면은 엄밀성을 잃고 여백 속에 함몰되는 것이다.

이러할 때 그림에서 중시되는 것은 그릇이 아닌 텅 빈 공간,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부분은 결국 그림의 풍부성을 더하면서 작품은 화가가 지닌 觀과 삶의 폭에 있으며 그러한 것이 여백 속에 스며들어 새로운 조화로 관람자를 유혹한다.

이와 같은 사변적인 논지가 과연 동서양의 획을 그을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나의 지적 유희의 하나일 분 아무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그림을 보면서 막연히 생각하고 느꼈던 점을 하나의 글로 써 봄으로써 그러한 막연함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함이다.

노천기숙은 하나의 산수화다. 텅 빈 정자, 텅 빈 배, 공허한 하늘, 부드러운 산허리며, 사립 너머 보이는 초가집, 그리고 여름인지 가을인지 모르는 단색의 발묵, 이러한 그림이나 실존치 않는 그림이다. 즉 동양화와 서양화를 초월해 있는 상상이다.

내다봐 씀

19971231

This Post Has 2 Comments

  1. lamp; 은

    저는 이글에서 고무공처럼 통통 튀는 한 젊은이가 보이는 데요?
    읽는내내 미소를 지을 정도로 보기 좋아요~ ^^

    1. 旅인

      개작을 해도 젊은 혈기가 보이는 모양이네요. 은님의 말씀을 들으니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