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01 10:03 : 언덕 위의 고물 書店

적벽대전 2 최후의 결전을 보았다. 재미가 있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나 사료와 그다지 일치하는 것 같지는 않으며, 진법 등이 1편에 잠시 나오기는 하나, 천부장 등의 용어 및 병제, 기갑체제를 보면 오히려 로마의 군단과 같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제갈량의 지략이나 방통의 연환계, 주유 황개의 고육계 등이 보이지 않는 점, 그리고 조조가 줄행랑을 놓는 장면들이 빠졌다는 것이 아쉽다. 하긴 140분 동안 다 보여주기란 그다지 쉽진 않을 것이다. 오우삼 감독이 너무 화공전에 앵글을 집중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지루하진 않고, 상상으로나 그려보던 화공전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소득이다.

소동파는 그의 유명한 적벽부에서 적벽대전에 대하여 제 삼자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달 밝고 별은 드문데, 까막 까치 남쪽으로 날고... 이는 조맹덕(조조)의 시가 아닌가? 서쪽으로는 하구를 바라보고, 동쪽으로는 무창을 바라보는데, 산과 개천은 서로 얽혀서 울울창창하니 여기가 맹덕이 주랑(주유)에게 곤경을 당한 곳이 아닌가?
바야흐로 형주를 깨부수고 강릉으로 내려가는데, 물길을 따르면 동쪽이니, 뱃머리와 고물이 마주하며 천리까지 이어지고, 깃발들은 하늘을 덮었다. 강을 끼고 술을 거르고, 긴 창을 가로하고 부시를 읊으니, 본시 당대의 영웅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어디에 있는가?

중국 최고의 賦인 이 적벽부가 쓰여진 곳은 적벽대전의 적벽과 번지수가 달랐다고 한다. 후일 이를 안 소동파는 아쉬워하며 후적벽부를 지었다는 일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적벽부가 좋다. 전편이 하나의 풍경화이자, 호연지기와 인생에 대한 회오 등이 뒤섞인 장대한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지는 우리가 심심파적으로 읽는 것이긴 하나, 그 시기는 황건적의 난이 발발한 184년에서 오가 멸망한 280년까지, 약 한 세기에 걸친 전란이다.

삼민서국 간 중국역사를 보면, 동한 환제 영수2년(156년)에 5,006만여명이었던 전국인구는, 진이 삼국을 통일한 시점(280년)에 1,616만명. 125년 동안 자그만치 3,390만명이나 격감했다. 어느 지역의 경우 수백 리를 가도 닭과 개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노라고 참상을 이야기 하고 있다. 서진이 삼국을 통일한 지 25년이 지나지 않아 다섯 오랑캐가 창궐하고 16국이 조석지간에 일어났다 무너지는 부침을 거듭한 것도 오랑캐의 세력이 강성해서가 아니라, 전란으로 국력이 피폐한 탓이다.

삼국지에서 백만대군하는 병력도 적벽대전 이후로 병력 수가 급감하는 것도 위와 같은 사실의 반영이다.

실제 적벽대전은 건안13년(208년) 7월, 조조가 남하하여 유표(형주)를 친 후, 다시 형주군사를 흡수 25만을 이끌고 남하했고, 유비와 주유의 병력은 합해 약 5만 정도였다고 한다. 쌍방은 적벽(호북성 嘉魚 동북)에서 싸워 조조군 대패, 병력의 태반을 잃는다. 적벽 이후에 조조는 크게 다치고 심한 통증을 겪은 까닭에 남쪽 정벌을 꺼리게 되고, 이 사이에 유비가 형주를 꼴딱, 삼국정립의 기틀을 마련한다고 한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에 입각한 삼국정립이야말로, 조조에 의한 통일로 천하가 평화 시기로 접어드는 것에 딴지를 거는 폭거에 다름 아니었다.

삼국지를 심심파적으로 읽을 수만 없는 처절한 전란시기였으나, 학문 문화적으로도 커다란 변혁기이기도 했다.

채륜이 종이를 만든 해가 105년으로 약80년이 지난 시점으로 만권서가 회자되던 때이다. BC86년에 졸한 사마천과 같은 시기에 산 동방삭이 3만 자의 상소문을 지어 우마차로 날랐다는 것과 사마천이 9세부터 자료를 읽기 위하여 전하를 주유했다는 것을 보면 죽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부피를 갖는 지를 상상할 수 있으리라.

유비가 중랑장 노식을 스승이라 하지만 정현(정현과 노식 둘 다 마융에게서 수학한 동문이다)에게도 사사 받았다고 삼국지에 나온다. 정현은 마융의 제자이며, 한나라가 시작하고 동중서가 유교를 국교로 한 이래 최대의 학자로 금고문에 능통하며, 경학(역, 시, 서 등)에 정통하였다. 또한 천문, 역수에 이르기까지 무불통지하며, 역학에 있어 상수학(괘의 형상과 변화를 연구)의 완성자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당시 학문의 흐름이 정현에게서 합치고 다시 갈라져 흐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유비가 그의 밑에서 사사 받았음에도 “나도 글의 대강은 안다”고 했을 뿐 평생에 부시(賦詩) 일편을 남기지 못하였으니…….

동탁에게 발탁되어 좌중랑장에 이르렀다가 동탁이 죽어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시체에 엎드려 호곡하여 사도 왕윤에 의해 처단되었던 채옹 또한 일세를 풍미하던 대학자로 만권서를 보유했다고 한다. 채옹이 죽자 세교가 있던 왕찬에게 만권서가 이르렀다고 한다.

필사를 하던 당시에 만권서란, 일개인이 국립도서관 분량의 책을 보유했다는 것이다.

삼국지에 마음씨만 좋은 늙은이로 표현되고, 위진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진수의 삼국지에는 줏대없는 사람으로 표현되는 형주자사 유표는 팔준(八俊), 팔우(八友) 등으로 불리울 정도로 후한을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탁월한 외교와 내치 면에서도 형주목사로 부임 후 전란을 틈타 자신의 세력 판도를 넓히고 형주를 수비하여 안돈시켜 많은 학자들이 피란을 해옴에 따라 형주가 학문의 구심역할을 할 정도였다고 다른 사서에는 기록하고 있다.

중국 최대의 천재, 왕필(자: 보사 226~249)은 유표의 증외손이다.

애초에 유표는 왕찬의 재주을 보고 딸을 시집보내려 했으나, 그 딸이 왕찬의 용모가 엉망이라고 보이콧하는 바람에 왕찬의 형인 왕개에게 시집을 보낸다. 왕개가 바로 왕필의 할아버지이다. 이러던 중 건안칠자(조조 밑의 문인 학사 중 7인)인 왕찬이 적벽대전에 조조를 따라갔다가 죽고, 왕찬의 두 아들마저 조조에게 죄를 지어 죽어 왕찬의 대를 잇기 위하여 왕개의 아들이자 왕필의 아버지인 왕업을 왕찬의 계자(繼子)로 보낸다. 이에 채옹의 만권서가 왕업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니 왕필의 천재성은 채옹이 남긴 만권서에도 있다고 볼 수 있다.

24세의 나이에 요절했음에도 하안과 더불어 위진현학의 개조가 되었음은 그의 천재성을 들어내며, 노자주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왕보사를 능가하는 자가 없고, 그의 주역주는 당시에 풍미했던 상수학과 참위설을 뒤엎고 의와 리에 입각한 사변적 해석방법을 도입하여 의리파의 개조가 된다.

하안(193?~249)은 하진의 손자다. 어머니 윤씨가 조조의 부인이 된 탓에 조조 밑에서 양자처럼 자라났고, 후일 조조의 딸과 결혼하여 부마도위가 된다. 위애제(魏哀帝) 시 조상이 권력을 잡자 이부상서로 승진하였으며, 소년 왕필의 글을 보고 찬탄하며 상서랑에 등용하였다. 왕필이 장티푸스(?)로 죽은 해에 사마중달이 쿠테타로 병권을 장악하고 승상이 된 후, 조상의 일족과 함께 주살되기에 이르른다. 하안 또한 당시의 학문의 중추로 논어, 주역 등을 노장풍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도입하였으며, 한 세대가 어린 왕필과 친교를 맺고 청담을 주고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반면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병권을 잡은 조상에게 아첨하여 벼슬이나 한 자로 그려지고 있다.

따라서 삼국지 시대는 정현의 유교경전의 경학과 주역의 상수학, 왕필의 노자학과 주역의 의리학이 합류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종교적으로 보면 한 제국이 성립되면서 동중서의 건의로 유교를 국교로 하였으나, 궁중에서는 황노지학을 받들었다. 본시 황노지학은 황제와 노자를 교조로 삼아 신선, 방중, 연단 등을 추구했다. 그러던 것이 후한에 이르러 궁중을 넘어 민간에서 흥기한다. 황건적, 우길, 한중의 장노 등으로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도교의 개조가 되는 자는 한중의 장노의 할아버지인 장도릉이다. 그가 사천의 곡명산에 들어가 도서 24권을 짓고, 신자를 모으되 입교 시 쌀 닷되를 받쳤다하여 오두미도라고 한다. 그러나 원시적인 부록파(부적을 사용하는 도교: 후일 갈홍등에 의해 외단파로 진화, 나중에 전진교에 의한 내단파로 발전하면서 현재의 형태로 변화함)로 종교로서의 교의적인 체계와 이론은 한 세기가 지난 후의 위백양, 갈홍 등에 의해 갖추어진다.

삼국지에 때로 불교사찰과 승려가 등장하니 불교가 중국에 도입된 67년으로부터 백여 년이 흘렀으나, 현세구복적인 불교형태를 띠고 있을 뿐 교의적, 학문적인 정통불교가 아니며, 불교용어 자체도 공, 무 등의 노장적 언어를 빌어쓰는 격의 불교 조차 아직 정착되지 아니했다.

정사 삼국지를 펴낸 진수란 자는 본시 사천성 파서(巴西) 사람으로 그 아비와 함께 촉한에서 벼슬한 자이다. 서진이 통일을 이룬 뒤 진의 학자에 의해 천거되어 치서시어사까지 되었다. 그는 촉지에 쓰기를 제갈량이 명재상이라고 하였으나 군사전략가로서는 그다지 뛰어날 것이 없다고 했다. 또한 자신이 모시던 유선은 인물이 암약한 자라고 했다.

진수의 입장에서 제갈량을 바라본다면 그 또한 맞는 말이다. 제갈량이 찬하삼분지계를 유비에게 이야기했다 하나 당시 형주의 학사들에게는 하나의 일반상식에 속하던 것으로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한다. 삼국지 전편을 통하여 제갈량이 공세적인 전투를 벌인 것은 후반부에 한중에서 장안을 쳐들어가기 위한 노력(出六岐山) 외엔 성도와 한중을 취한 것과 남만 정벌 등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수비에는 능하나 공격에는 약한 점을 장안을 노리기 위한 출육기산에서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명재상이라고 치하한 것은 사천성이라는 협소하고 인구가 적은 지역에 옹거하면서도 위와 오라는 강국과 대치할 수 있는 국력을 유지하고 내치에 뛰어났던 점에 있다.

삼국지연의가 원말명초에 지어진 것이라고 하나, 제갈량에 대한 중국인의 흠모의 정은 그 이전인 당 송연간에도 시, 부의 형태로 읊어지고, 중국 최고의 명장인 송 말의 악비가 제갈량의 출사표를 직접 써 사천의 무후사에 걸어놓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삼국지 감상>

삼국지는 몇 번이나 읽었는 지 기억이 안 난다. 초등학교 육 학년 때 김광주씨의 삼국지를 처음 읽은 이래, 월탄, 삼국지연의로는 가장 정평이 있다는 청대 모종강본을 저본으로 한 연변대학 조선어번역소조의 번역본, 이문열의 삼국지평역, 그리고 황석영의 삼국지까지 읽은 셈이다.

삼국지도 삼국지 나름이어서 이문열의 삼국지평역을 읽고 난 후 내 스스로 자탄하여 삼국지를 이 자가 망쳐놓았다 했다. 이문열의 평역은 유비와 제갈량 중심의 삼국지연의와 조조의 정통성을 앞세우는 진수의 삼국지를 섞어 만든 잡탕인 만큼 죽도 밥도 아닌 것이었다.

그래서 황석영의 삼국지가 나왔다 하자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사서 이문열이 구겨놓은 삼국지에 대한 느낌을 새로 살리려고 했다.

황석영씨의 삼국지는 어렸을 때 읽은 김광주씨의 삼국지 분위기를 내며 새롭게 불려일으키고 있으며, 나를 만족스럽게 했다.

삼국지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있다면 마지막이다. 관운장, 조조, 장비, 유비, 조자룡, 제갈량 등 주인공들이 다 죽고, 가장 세력이 융성하던 위가 사마씨의 진으로 돌아가고, 촉이 함락되고 오마저 병탄되고 나면 영웅호걸이며, 일국의 흥망성쇄가 다 허망한 꿈이런가 하는 비탄 어린 느낌이 삼국지 전편을 감싸 돌며 읽는 동안 느끼는 흥분과 분노와 비탄을 무화시키는 가을날의 소슬한 바람처럼 다가온다.

주) 月明星稀, 烏鵲南飛, 此非曹孟德之詩乎? 西望夏口, 東望武昌, 山川相繆, 鬱乎蒼蒼, 此非孟德之困於周郎者乎? 方其破荊州, 下江陵, 順流而東也, 舳艫千里, 旌旗蔽, 釃酒臨江, 橫槊賦詩; 固一世之雄也, 而今安在哉?(赤壁賦 중 일부)

수정판(2004/10.06일 처음 작성)

2009/02/01 10:03에 旅인...face
2009/02/01 10:03 2009/02/0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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