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참고자료

1. 한국인과 차

한국의 경우는 차가 가장 맞지 않는 지역이다. 첫째 쌀을 주식으로 하며, 둘째 날씨가 대체로 청량하여 각기병 등의 문제가 없다. 따라서 차가 함유한 엽산이나 이뇨성분은 오히려 속쓰림과 강력한 배뇨작용으로 인하여 체내의 양분을 소실케하여 동의보감에 쓰여있기를 하초(아랫도리)를 상하게 하는 바 과다한 섭취는 안좋다고 한다. 현재 한국에서 최근에 각광을 받고 있는 녹차는 특히 한국인의 체질에 맞지 않는 차가 된다. 차 잎을 여름 햇빛에 잠시 말려 차 잎이 공작의 혀와 같은 형상이라하여 작설차라고 하는 녹차는 특히 탄닌함유가 많아 떫고 위에 치명적이다. 우리가 체했을 때 삶아먹는 감꼭지에도 탄닌이 많아 소화작용을 촉진하나 그 외에는 위벽에 부담을 준다. 따라서 한국에서 차를 먹는다면 완전발효가 된 흑차계통이 되어야 하나 우리의 전래 차문화가 일제의 녹차에 경도되고 귀족화하는 경향 때문에 비발효계열인 녹차에 포커스가 맞춰진 것이다. 일본이 녹차에 포커스를 맞춘 것은 녹차에는 각기병을 예방하는 비타민 성분이 많고 습윤한 기후에 녹차가 청량감을 주기 때문이나 한국은 그렇지가 않다. 따라서 우리의 차는 주가 과일차, 꽃잎차, 보리차 등이 될 것이며, 아니면 다과라고 할 때 전통과자와 차를 함께 하거나 곡물을 볶은 것을 혼합 음용함으로써 차의 떫음과 엽산을 감하는 방식으로 차 문화가 형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여진다. 중국이나 영국 등의 경우 우유, 또는 과일, 파 등과 혼합하여 차를 즐기는 방법이 상당히 보편화되었음을 주지하여야 할 것이다.

2. 중국근대사 일절

홍콩의 역사를 말하기 이전에 중국의 역사를 잠시 짚고 넘어가면 청조가 시작한 이후 강.옹.건(강희, 옹정, 건륭) 130여년(1662~1795)을 중국 최대의 태평성대라고 하며 현 중국영토도 이 시절 획정되었으며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대제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50년이 안된 싯점인 1840년 아편전쟁이 터진다. 태평성대는 그 자체로 문제점을 지닌다. 건륭제 치위 60년 중 한 사료를 보면 50년동안 1억4천3백만(1741년)에 달하던 인구가 3억4백만(1791년)으로 늘었다고 한다. 인구의 연평균 증가율이 1.4%로 20세기를 제외하고는 유사 이래 그러한 인구증가가 지속된 예는 없었다. 그만큼 중국이 평화로왔고 의료수준이 높았다는 반증이다. 一治一亂이라고 문제는 여기에 있으니 인구배증이라는 국력을 흡수할 경지면적의 증가는 동기간 중 15.8%에 그쳤다는 문제가 난국으로 접어드는 계기를 만들었다. 통상 우리는 서구의 과학문물과 강력한 무기체제 등에 아시아가 무력했노라고 말하고 있으나, 외압보다는 내재적인 문제가 더 큰 것이다. 일본이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급격히 개화할 수 있었던 점은 자신들의 후진성에서 시작하는 바, 봉건체제에서 메이지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로 변동, 그동안 권력을 쥐고자 하는 지방 번벌의 서구 무기에 대한 열망, 문화의 종주가 없어 외래문물에 대한 저항이 없는 상태에서 요시다 쇼인, 후쿠자와 유키치로 대표되는 난학(네덜란드로 부터 들여온 서구의 학문)에 대한 상당기간의 연구성과, 구백년간 사용해온 가나를 바탕으로 한 전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문명율(독일 빼고는 최고) 등이 믹스되어 서구문물을 내재 토착화시키고 급기야는 태평양전쟁까지 치를 수 있었다. 반면 중국은 당시 이미 자체적으로 시계를 생산할 수 있음에도 전근대적 무기체제를 유지한 것을 보면 아마도 넓은 대륙의 변방에 총포가 배급될 경우 지방군벌이 일어나 중앙정부를 전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다. 또한 마카오를 조차한 포르투칼의 경우 이미 서구에서 쇠락한 국가이며 영,불,독이 헤게모니를 쥔 서구의 문물과 사상을 중국에 제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또 마카오는 북경과 너무 멀었으며, 중국문명 자체가 타문명을 능동적으로 흡수하기에는 너무도 찬란하였다. 또한 서구문명의 총칼을 인식하기에는 너무도 오랜동안 태평성대를 누렸고 급격히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기에는 국민들의 식자율 낮은 점 또한 문제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건륭말기에서 부터 제국의 멸망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는 치세 말기에 당시 여름별장이었던 이화원을 증축코자 하였으며(후에 포기) 양위를 하는 등 정정의 파행을 초래하였고 그 후 각처에서 반청복명 및 내란이 이어져 망국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특히 아편전쟁 이후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었어야 함에도 우리가 서태후라고 이르는 자희태후가 사고까지 쳤으니 1888년 수군 현대화를 위하여 거둬들인 세금 3천만냥을 이화원 증축에 퍼붓고 1894년 청일전쟁(중국은 갑오전쟁)에서 졸지에 일본해군에 대패함으로써 세계각국에 “우린 개꼴”이라고 광고를 하기에 이른다.

중국과 같은 큰 땅덩어리가 물경 이천년을 넘도록 방대한 통일대제국이었다는 사실은 기적이며, 여기에서 아시아의 불행은 시작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왕 정이 전국시대를 종지부찍고 CHINESE ALPHABET을 통일함으로써 중국은 통일제국의 베이스가 구축된 것이다. 한번 한자 맛을 보면 벗어날 수가 없다. 서구 언어의 문자가 공통적으로 로마문자에 터를 두면서도 표음문자로 각 지방의 고유 언어에 따라 쓰는 문자가 다를 수 밖에 없으며 또 음운변화에 따라 문자가 갈라져 또 다른 열방으로 쪼개질 수 밖에 없다는 특징을 지니는 반면, 한자는 표음문자로 음운변화에도 흔들리지 아니하기 때문에 문자가 분화될 수 없으며 이천년전의 고문을 현대에도 읽을 수 있고 머나먼 방역의 소식을 통역관없이 중앙부처의 관료라면 누구든 읽을 수 있다. 따라서 문자 자체가 지닌 보습성이 제국의 방역이 쪼개질 수 없도록 하는 오묘한 작용을 해왔다. 특징적으로 한국의 경우 훈민정음이 창제 반포되었음에도 이조의 사대부들이 물경 사백년동안을 한문을 써온 것을 보더라도 한문이 가진 중독성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통일제국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온 사실 때문에 주변국이 중국의 패권에 도전장을 낼 수 없게 하였고 중국정부가 항상 골머리를 아파한 것은 외세보다는 내란 쪽이었다. 만약 중국이 전국시대와 같이 수개의 국가로 나뉘어져 이천년 이상을 군비경쟁을 계속해 왔다면 그동안 축적된 기술로 인하여 인류는 이미 안드로메다 성운 부근을 헤매고 있을 지도 모른다. 중국이 방대한 통일제국을 유지하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제국이 너무 커서 아무리 우수한 행정제도와 조직을 갖춘다 하여도 제국의 주변부는 썩어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왕조교체 때마다 행정조직의 전면적인 수정 보완을 해 왔음에도 왕조의 수명은 단명하였다. 이러다 보니 고도의 행정력과 외세에 대한 국방력을 키우기 보다는 이념에 입각한 덕치를 주창하고 대내적인 구테타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먹물 중심의 문치에 치중함으로써, 학자=시인=관료=정치가라는 이념국가의 틀을 약육강식, 외세동점의 그 시기에도 계속해 왔던 것이다.

3. 광동어란

광동어는 보통화인 만다린과 틀리다. 혹자는 말한다.만다린은 滿的人에서 어원을 가진다며 북방 오랑캐의 언어와 한어가 충돌하는 과정의 산물이라고 한다. 따라서 송대에 16성에 달하던 음운체계가 현대 만다린은 4성체계로 바뀌어 있다. 반면 광동어의 경우 현재 공식적으로 몇성이라는 규정이 없다. 누구는 5성, 누구는 9성 등. 언어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한다면 이들이 컴퓨터로 한자를 입력할 경우 한국사람보다 몇배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한자의 소리가 규정되어 한글을 치고 한자변환을 하면 쉽게 한자로 전환이 된다. 또 중국본토에서는 알파벳으로 쳐넣고 한자변환을 하면 해당글자를 찾을 수 있으나, 광동어는 성조체계가 확립되지 않아 알파벳으로 쳐넣고 변환을 못시킨다. 따라서 패드에 글을 쓰거나 대만에서 쓰는 주음부호, 또는 창힐자전이라는 한자를 네자리 숫자로 분류한 것을 토대로 글자를 쳐넣는다. 또한 우리가 알기로 홍콩의 간판스타인 성룡이 글자를 모른다고 하는 데 그 내막을 살펴보면 그도 길거리의 간판을 읽을 수가 있다. 문제는 고등교육을 받은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편지를 써보냈는 데 아는 글자 20% 모르는 글자 80% 반죽되어 있어서… 또는 단어의 의미의 아리까리함 속에서 무슨 말인지 도저히 감을 못잡겠다는 그런 것이다. 즉 가방끈 길이가 길면 머리 속의 옥편의 두께 또한 두꺼워지는 글자체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문자 자체가 엘리트 지향이지 방대한 식자층을 만들어 양질의 노동력을 산출하겠다는 근대 산업사회의 보통교육에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때론 이들이 무슨 표현을 하고자 하여도 문득 그 글자가 기억나지 않으면 마참내제쁘들시러펴디몯할노미하니라 가 된다. 그래서 이들은 오히려 영어로 글을 쓰기를 택한다.

말이 나온 김에 씨부리자면 광동어는 남송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인지 한국의 한자음과 유사하다. 한국의 한자가 음운학적으로 오음을 기반으로 하여 송의 성리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소리가 고착되고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자 일자에 한소리가 확정되었다면 우리 한자의 음은 분명 송음을 기반으로 할 것이다. 그래서 광동어와 한글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소리에 종성(받침자)가 많다. ㅅ, ㅋ, ㅁ, ㅂ, ㄴ, ㅇ 등 무수한 받침자가 있고, 이 받침자로 하여금 한글자씩 소리가 똑똑 떨어져 소리의 변별은 쉬우나 소리가 막히는 경향이 있어 소리가 유장하지가 않고 답답하며 무지기 시끄럽다. 얏,니,쌈,세이,음,록,찻,파,까오,삽(일이삼사…) 한번 발음해보면 시끄럽고 발음이 답답함을 알 것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이름이 한자로 寶馬山花園이다. 이 곳 발음으로는 보마산화윤이다. 그리고 변문(특정지역에만 존재하는 한자, 즉 변방에서 쓰는 한자: 예 있느냐 할 때 야우모우를 쓰는 데 이는 有無이나 이 곳에서 무자를 유글자의 고기월에서 사닥다리를 제거해서 씀)을 무진장 많이 써서 한자라도 알아 보지 못하는 글자가 많다.

4. 홍콩역사연표

홍콩역사년표를 간략 소개하면 1200년 송대말에 구룡반동에서 향목재배가 시작되었으며 1570년에 홍콩에서 해적, 왜구가 창궐했다고 하며 1600.12월 영국의 동인도회사 설립과 함께 1637년 영 상선 런던호가 주강으로 광주에 들어와 처음 교역, 1688년 처음으로 홍콩촌(香港村)이 新安縣志에 기록됨. 1757년 만청정부 외국무역을 광주 한 곳으로 제한, 1793.9.14일 조지 메카트니백작 열하에서 건륭제를 만나 국서를 전달, 무역확대 및 무역조건 개선을 요청했으나 건륭제 거절, 1796년 아편금수의 칙령 시달, 1806년 동인도회사 홍콩일대의 해면을 측량하고 홍콩일대 지리도 제작, 1815년 금연장정이 제정되어 아편수입 엄금, 1816년 영정부는 W.p.Amherst 전인도총독을 전권대사로 북경 파견했으나 嘉慶帝를 만나지 못하고 귀국 후 수출입은 물론 제반 여건으로 보아 홍콩의 환경과 지형은 세계에서 비할 곳 없는 양항임을 천명, 1821년부터 아편무역선이 항시 홍콩 정박, 1831년 청정부 아편수입 엄금, 1837년 영국선 대량으로 홍콩에 집결, 해안에 상륙하여 거류지 건설 1839년 청정부 임칙서 파견, 아편밀수 엄금을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함, 1840.2.20일 영정부 중국파병을 결정, 4.7일 의회비준, 동년 6월 아편전쟁 발발, 1841.1.26일 영함대 Braemer총독 홍콩도에 영기 게양하고 영유권 선언, 1842.6.19일 영군 상해점령, 1842.8.29일 남경조약 체결.1843.4월 영정부가 홍콩은 식민지라고 선포하고 홍콩정청이 정식으로 성립, 초대총독 Henry Pottinger, 1851.1월 태평천국의 난 발생, 난민 유입으로 1853년 인구가 4만으로 증가, 1856.10월 애로우호 사건으로 2차 아편전쟁, 1860.10.24일 북경조약 체결, 구룡반도 선단의 할양, 1865년 홍콩상하이은행 개설, 1887.3.26일 청정부 포르투칼과 리스본의정서 조인 마카오 할양, 1892.7월 손문 홍콩 西醫書院 졸업, 1898.4월 맥도널드 주북경공사가 홍콩당국이 현재의 경계에 불만이 있으므로 확장을 요구하여 1898.6.9일 홍콩지역확장에 관한 조약에 조인, 홍콩과 신계의 99년 조차를 결정, 1905.7월 홍콩시가전차 개통, 1907년 인구 40만 돌파(39만이 중국인), 1910.3월 서의서원과 홍콩공학원에 문학부 도입 홍콩대학 설립, 동년 10월 구광(홍콩 광주)철도 개설, 1911.10.10일 신해혁명으로 청조멸망, 1912.1.1일 중화민국 성립, 1921.11월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중국대표 조차지 반환 요구, 1929년 인구 80만 돌파(중국인 78만), 1937.7.7일 중일전쟁 발발 대규모 난민 유입, 1938.10월 일본군 광주점령, 1941.12.25일 일군 홍콩공략 개시 홍콩총독 항복, 1942.2월 일 홍콩점령지 총독부 개설 총독 이소가이 육군 중장, 1945.8.14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였으나 영미간에 홍콩을 영국에 주권있음을 합의, 1945.9.16일 일군 영국에 항복, 1948.12월 국공내전으로 대량의 난민 유입, 1949.10.1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1957.2.4일 뉴스위크지 영국은 홍콩의 반환을 고려 중이라고 보도, 1960.5.23일 몽고메리 영국군 원수 중국방문 전 홍콩은 영국의 일부로 중국과 토의할 문제가 아니다고 발표, 1962.12.12일 후르시쵸프 소련수상 홍콩이나 마카오에서는 고아의 식민지주의가 내뿜고 있는 악취가 발산되고 있다함, 1963.10월 홍콩중문대학 설립, 1970.10월 중국어계 공립중학교와 정청보조초등학교 수업료 면제, 1972.3.8일 황화 유엔대사가 식민지 독립부여선언이행특별위원회에 서한 송부 “홍콩 마카오는 제국주의가 중국에 강요한 불평등조약의 결과 조차 또는 할양된 것으로 중국의 영토이다”고 주장, 유엔의 식민지리스트에서 삭제 요구, 1974.1월 중국어 공용법 성립, 1976년 인구 447만8천, 1976.4.27일 미 월프 상원의원 중국 방문 중 홍콩은 1997년 신계조차기간 만료 후 중국의 일부가 될 것을 발언, 1978.11월 홍콩 광주간 페리 개통, 1979.4월 구광열차 30년만에 재개, 1981.3월 인구 510만, 1982.7월 홍콩 쟁명지 호요방 당총서기가 멀지 않은 장래 1국가 2사회제도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대만통일과 홍콩 마카오 주권회복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 취지 보도, 1982.9.22일 대처 영 수상 중국 방문, 1982.10월 중영교섭 제1라운드 개시, 1982.11.20일 요승지 전인대 부위원장 홍콩산업인 그룹에게 중국은 1997년까지 홍콩의 주권을 회복, 홍콩의 사회제도 생활 법률은 주권 회복 후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 1984.1.10일 허가둔 신화사 홍콩지사장 홍콩대학에서 주권회복 후 50년간은 자본주의제도를 바꾸지 않을 것, 1984.11.21일 홍콩정청 간접선거제의 도입을 주로 한 정치체제 개혁안 ‘홍콩에서의 민주적 정치체제 한단계 위로의 발전’ 발표, 1985.5.27일 중영양국 북경에서 홍콩반환에 관한 비준서 교환, 합의문서 정식 발효, 1985.6월 홍콩특별행정구기본법기초위원회 구성 총 59명 중 홍콩인사 23명, 1986.5월 인구 552만, 1987.4.13일 마카오 99.12.20일 반환 합의, 1987.5.27일 홍콩정청 정치민주화를 위한 청서(Green Paper) 제시, 1988.2.10 홍콩정청 정치민주화를 위하여 백서를 발간, 1989.6.4일 천안문 사태발생, 1990.4.4일 홍콩기본법 채택 공포, 1991.9.15일 홍콩입법평의회 제1회 직접선거 실시, 1992.7.9일 마지막 총독(28대) 크리스 패튼 부임, 1992.10.7일 패튼총독이 정치 선거제도의 민주화안을 시정방침에서 천명, 1992.12.2일 중국이 패튼총독에게 홍콩민주화 개혁 조기 추진말라고 경고, 1993.1.13일 중국 94년에 홍콩에서 화폐발행할 것임을 밝힘, 1993.3.17일 미국 홍콩의 민주화 방해시는 대중국 무역제재할 것임을 밝힘, 1994.11.29일 홍콩행정장관에 처음으로 홍콩인 앤슨 챤 취임, 1995.2.5일 패튼개혁안에 기초한 최초의 지구의회 선거, 동년 9.17일 패튼개혁안에 기초한 최초의 입법평의회 선거, 1995.12.29일 홍콩특구준비위원회 가동, 1996.1.16일 홍콩특별행정구준비위원회 발족, 민주파 의원은 배제, 1997.7.1일 홍콩 중국에 이양.

5. 등소평의 실용노선

등소평의 실용노선에 대하여 언급한다면 모택동이 중국내부의 주요한 사회모순을 무산계급과 자산계급 간의 모순으로 보고 계속적인 혁명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면 등은 이미 무산계급이 혁명을 통하여 정권을 취득한 이후에는 이미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이 때의 목표는 계급투쟁이 아니라 사회생산력의 발전과 노동생산력의 제고라고 본다. 그는 모택동의 사상과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재평가하여 이른바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를 표방한다. 즉 중국의 오랜 역사적 경험을 총괄하여 얻어진 결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보편적 진리와 중국의 구체적 현실을 결합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여기에서 등은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언급한다. 이는 경제적 빈곤과 낙후에서 탈피하는 과정이고 농업국에서 현대화된 공업국으로 전환단계이며 자연경제 혹은 반자연경제 상태에서 고도의 상품경제로 발전해나가는 단계를 말한다. 이와 함께 그는 중국의 주요모순을 인민의 물질적 욕구와 낙후된 사회생산력 간의 차이로 인한 것으로 규정하고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여 상품경제의 발전과 노동생산성을 제고시켜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른바 남순강화를 발표하여 시장이 바로 자원의 흐름과 경제활동을 조절하는 주요수단임을 천명하였다.(동양문고 중국학 개론에서 발췌) 이에서 보듯이 등의 실용주의 노선은 경제는 자본주의와 정치체제로서의 사회주의를 내건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우리 서방이 경제에 있어서는 자본주의이며 정치체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바와 같으며 결론적으로 중국의 자본주의의 앤티테제로서 공산주의의 지양을 포기하고 자본주의로 들어섰음을 공식선언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반면 하부구조는 자본주의, 상부구조는 공산주의를 목표로 한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가질 때 등의 노선이 아무리 이념적이고 숭고한 것일지라도 필연적인 모순에 봉착한다. 이러한 모순이 갈등으로 표출될 것이란 예고편이 바로 천안문 사태이며, 시장이 정글이라면 힘있는 놈이 떼돈을 벌 수 있듯 관료들이 부정과 비리로 떼돈을 벌고, 오랜 역사적 경험을 총괄해 볼 때 돈 밖에 모르는 중국인들이 온갖 모략과 네다바이로 남의 돈을 사취하고 있음에도 법률은 소유관계와 계약 등을 상행위에 필수적인 사항을 정립치 못하고 있다. 따라서 염치불구 떼돈 버는 놈이 장땡인 세상이다. 애시당초 사회주의에 무슨 사적 소유가 있겠는가? 또한 초법적 초인민적 일당 독재가 당연하여 당의 명령이 헌법을 초월하는 만큼 니 죄를 니가 알렸다!식의 행정처리가 만연한다. 결국 중국은 다시금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모순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이 모순이 해결될 것인가는 정치적인 함수관계에 달려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즉 보수와 혁신의 충돌.

6. 도교약사

도교의 역사는 후한 말에 시작한다. 혹자는 노자나 장자가 도교가 아니냐고 하지만 그들은 도교가 뭔지도 몰랐다. 진이 망하고 한조가 들어서면서 백성에게는 공자를 따르라고 하고 궁중에서는 가전으로 노장을 존숭하였다. 아마 도교는 내궁의 학자들에 의하여 은밀히 만들어졌음직하다. 진시황의 불노초와 맥을 같이 하는 신선장생술에 노장의 사상이 믹스되면서 도교의 맹아가 자라나다가 내궁의 담을 넘는다.

도교의 개조는 삼국지에 나오는 촉의 張魯의 조부인 張凌에게서 시작한다. 그는 패국 풍(강소성 풍현) 사람으로 사천에 거주하면서 노자와 태평경을 갖고 학명산에서 교를 열되 노자를 교주로 추존하면서 태상노군이라 한다. 또 도서24편을 만들면서 이야말로 태상노군이 일러 만든 술서라 했다. 장노는 입교 시 다섯말의 쌀을 기부하도록 하여 이로써 기근에 대비하고 구휼함으로써 교세를 넓혀가는 한편 부적과 세례 비슷한 것으로 병을 치유했다. 이래서 五斗米道라는 별칭을 얻었다. 동시대에 거록(현 하북성 소재)에서 장각 또한 태평경에 의거하여 태평도라 하는 한편 황건족의 난을 일으켜 삼국지에서 보면 유, 관, 장에게 작살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후 장각 일당의 태평도는 비밀결사로 잠복한다. 위진남북조가 열리면서 도교는 가일층 발전한다. 이 시기는 또한 외래종교인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갈홍이 나타나는 바, 그는 유교, 묵가, 명가, 법가등의 이론을 흡수하여 도교 이론을 확충하는 한편, 내 외단의 이론을 기초함으로써 단정(내단)파의 개조가 된다. 포박자는 그의 호이자 저술이다. 그 후 구겸지, 육수정 등이 나타나며 당대에 들어서 한 사기꾼이 나타나 노자(李耳)가 당 천자의 선조라고 하여 당 고조가 희락하며 받아들여 노자를 태상현원황제 라고 까지 추존한다. 이에 도교가 급속 중흥하였고 금, 원시대에는 正一派와 全眞派의 양대산맥이 자리잡는다. 정일파는 과거 오두미도(천사도)의 맥을 이은 부록(부적)파이다. 전진교는 김용의 소설에서 유명한 王重陽이 창건한 종파로 도, 유, 불 삼교를 아우르되 부적을 중시않고 외단을 수련하지 않고 단지 精, 氣, 神의 수련에 중점을 둔다. 이들은 출가하여 진기를 닦는 것을 강조한다. 왕중양에게 7대제자가 있어 북칠진이라 하며 이 중 제일 유명한 자가 의천도룡기에 나오는 구처기이다. 그는 징기스칸의 밀지를 받고 이만리의 대장정에 올라 정탐보고를 함으로써 세계제국 수립을 돕는다. 그리하여 원세조로 부터 신선이라는 호를 하사받고 대종사라고 숭배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명 중엽 이후 청조에 이르기까지 抑道揚佛 정책에 따라 도교가 쇠락한다.

도장경은 유불선 삼교의 논지를 아우르는 동시에 내외단의 연구에 따라 고대 화학, 야금술, 약제학, 생물학, 기공 등이 망라되어 있으며 시, 사, 희극, 소설, 회화 등 다방면의 중국문화의 총체를 간직하고 있다.

7. 귀국유감

어떤 사회든지 문제점과 모순이 있기 나름이며, 나 같은 소시민은 그러한 것을 수용하는 데 상당한 인내심이 있다. 분노하거나 좌절하기에는 주어진 생활이 나를 떠밀고 자식새끼와 마누라의 시뻘건 눈이 제자리를 맴돌게 한다. 한국사회가 유난히 모순과 문제점이 심해서 귀국에 즈음하여 유감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 곳에 살면서 이 곳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체험하지 못해서다. 이 곳을 뼈저리게 느꼈다면 환멸과 저주를 바탕으로 훌쩍 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시는 이 쪽을 보고서는 오줌도 누지 않으리 하고 괴나리 봇짐을 싸고 자식을 등에 업고 리어카를 끌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오랜 타향살이를 하다 보면 문득 고향이 생각난다는 데… 삼년여의 이 곳의 생활 속에서 고향은 그저 공해와 쓰레기 더미와 도로를 꽉 매운 차량, 이러한 것들이 아름다운 풍광 위로 오버랩되면서 서서히 투명해지고 결국은 기억 저편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든가 애증 또한 사라져 버렸고 이 곳의 삶에 연연하게 되었다. 결국 아이엠에프와 구조조정과 공해와 실업자와 기타 등등으로 처절하게 유린당한 제삼국인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나라에는 어떤 이념이 있을 지, 내가 오랜 기억 속에서 건져올린 내가 살아왔던 사고방식이 다시 돌아가면 온전하게 통할 것인지도 모른다. 그 나라의 백성들은 내가 떠나왔던 삼년여동안 너무도 많은 것들을 경험했고 나는 이 곳에서 먼발치로 이야기만 들어왔다. 그러한 이야기 속에서 항상 어두운 들을 무거운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 나의 동포를 보고, 영원히 지나지 않을 것 같은 밤이 있다. 이 곳의 창 밖으로 빛이 그득할 때 나의 사념 속에는 집요한 어둠이 금수강산을 뒤덮고 있었다.

이 곳에서의 나의 생활은 언젠가는 돌아간다는 전제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니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랴. 이들이 굶주리고 삶에 절망하여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자본주의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어도 그것은 이들의 상황일 뿐이다. 그러나 체온으로 나의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눈감고 사는 이 곳 생활은 내가 무지한 만큼 편안한 것이었다. 언제나 아낌없이 포기할 수 있는 생활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홍콩을 철벽처럼 두르고 있는 마천루와 아름다운 풍광, 만나는 사람 등등은 인생의 한 싯점을 스치고 지나는 가벼운 훈향인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한 때 그런 시절이 있었고 기억 속에 하얀 반점으로 남을 것이다.

영어라는 제삼의 언어로 서로가 소통하며 그 언어마저 부실하여 서로가 이해를 달리하는 참에 사랑과 우정과 애착이란 것이 생길 것인가? 이제 내가 이 땅에서 살면서 그래도 조금의 사랑과 연민을 가졌던 자에게 귀거래사를 읊어야 할 때가 되었으나 나에게는 이들에게 전할 언어를 찾지 못한다.

돌아가자구나? 밭과 뜰이 황폐하여 욱어지려 하나니 어찌 안돌아 갈쏘냐! 그동안 어리석은 생각으로 몸을 피곤케 하였고 공연히 낙망하고 홀로 서글퍼했었다. 이미 지난 일들이 틀렸음을 알았으니 앞으로 올 일을 알고 그를 따르면 되리라. 내가 실로 방향을 잃어 헤매었으나 갈 길이 멀지는 않고 지금이 옳다는 것을 알았으니 지난 날들은 그릇된 것임을… 배는 바람에 소요하듯 가벼이 물살을 가르고 산들바람이 표연히 옷깃을 스민다. 사공아 앞 길이 얼마냐 하고 물으며 새벽 빛이 희미함을 한탄하노라.(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旣自以心爲形役, 奚惆悵而獨悲. 悟已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 實迷途其未遠, 覺今是而昨非. 舟遙遙以輕이, 風飄飄而吹衣. 問征夫以前路, 恨晨光之熹微.)

도잠이 바야흐로 권력과 명예를 버리고 자신의 작은 삶에 지침을 두고 소박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즈음에 나는 나의 귀거래사를 읊조린다. 그러나 아직 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러니 가야 할 길이 어딘지 조차 모른다. 또한 떠나려 하니 차마 그럴 줄 몰랐으나 이 곳의 세월들이 추억처럼 아니면 그리움처럼 피어오르고 나의 갈 길을 혼미케 한다.

그래서 다시 미래를 향하여 노래불러야 한다.

< 止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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