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05 17:46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 이 글은 카워드에 있던 글을 가져왔다. ##

동산을 넘자, 타인의 정원이었다. 잔디가 깔려있었고, 적지도 많지도 않은 꽃들이 풀 높이로 자라고 있었다. 밤에 기름등을 켰던 흔적으로 그을은 석등과 사람들의 손때가 타서 반들해진 바위들이 보였다. 모르는 사람의 정원에 은밀하게 침입한 셈이지만, 정원에 감도는 색조와 정경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아지랭이와 안개, 햇빛이 섞였고, 갖가지 색으로 피어난 꽃들이 자신의 고유한 음부(音符)로 봄바람 속에서 잔잔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를 따라 나비가 춤추며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나비를 따라 낮은 소나무 사이를 지나 정원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섰다.

솔밭 사이로 단칸짜리 초가집이 있다. 초가의 마루 위에 앉았다. 미닫이로 된 방문이 반쯤 열려 있다. 방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늘 진 방 안은 시원해보였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방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벽이 없다. 지붕도 없다. 단지 다다미로 된 바닥 만 있다. 다다미는 끝없이 이어졌는데, 소실점 끝으로 사라지지 않고, 대륙의 끝에 잇닿아 있다. 대륙의 끝에 하얀 파도가 쏟아진다. 문 틈 사이로 손을 뻗으니 바닷물이 옷깃을 적셨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쪽 벽을 본다. 벽은 없고 어둠이었다. 어둠 속에 빛이 가득하고, 은하수에 이어져 있는데, 우주가 선회하고 별들은 어디론가 바삐 날아가고 있다.

다른 쪽은 길이다. 길은 오래된 궁궐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학이 날개짓을 하며 안개 속으로 날아가고 안개 속에서 폭포가 떨어져 내리거나 높은 절벽이 보였고, 메마른 광야와 높은 고원이 가로놓여 있다.

들어선 문 쪽을 보니, 텅비어 있다. 아무 것도 없는 데 차마 바라볼 수 없다. 없는 것이 아니라, 온갖 것들의 반영이었으며, 시간과 공간이 다양한 소실점과 좌표를 갖고 중층적으로 겹치고 있어서 앞과 뒤가 한꺼번에 조망되고 있다. 혼돈이어서 모든 것이 뒤섞이면서도 이데아적인 질서로 배치되어 엘레아 사람들이 본 세계관과 같이 모든 것은 부동인 동시에, 천천차만만별로 움직이고 있어서 지옥과 천국의 폭죽인 동시에 여기였고 거기였다.

방안의 각 모서리의 경계는 몹시도 뚜렷했지만, 파도가 쏟아져 내리는 방향에서 보면 지붕에는 뭉개구름과 파란 하늘이 보였고, 어둠 쪽을 보고 위를 쳐다보면 행성들이 가파른 속도로 선회하며 스쳐지났다. 행성들을 쳐다보면 속도를 감속하며 천천히 어깨를 스쳐지나기도 했다. 그러면 별들이 시간에 부딪치는 싱그러운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공허 쪽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면서 온갖 것들이 떠올랐다.

어지러웠다. 빛과 어둠이 뚜렷하게 나누어져 있으면서도 그것들은 섞이고 있었다. 빛으로 명멸하면서 어두웠고, 방 안의 넓이 안에 온 우주가 갇혀있으면서도, 가믈었다. 시간이 멈춰있거나 과거와 미래가 포개지고 있었다.

피로해서 다다미를 따라 대륙의 끝, 바닷가로 가서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시 낮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소나무도, 우주도, 바다도, 궁궐과 공허는 이미 없었다.

창호지 사이로 스미는 봄빛으로 방은 밝았고, 한 쪽 구석에 서안과 책꽂이가 있었다. 책꽂이의 책 사이로 갖가지 색의 나비들이 드나들었다. 책꽂이 사이에 자라난 담쟁이 넝쿨에 잎이 자라고 시들고 또 자라고 하는 생성소멸이 자꾸 반복되었다.

조금 열린 창문 사이로 산들바람과 새들의 울음소리가 스몄다.

책꽂이의 책을 고른다. 책을 집으려 하면, 책들이 이쪽 저쪽으로 옮겨다니며 깔깔거리거나 자신들끼리 수근댔다.

한 이백권 가량 될까?

몇권의 책을 뽑아보니 모두 그림책이다.

맨 아랫칸의 오른편 구석에서 세번째인가 네번째의 책을 꺼내들었다. 그 책은 몹시 수줍어했다. 제목도 없고, 표지도 없었다. 아이들이 그네를 타거나 꽃밭에서 뛰어노는 그림만 보였는 데, 풍경은 그 초가집이 있는 정원의 모습이었다.

책이 끝나갈 무렵, 한줄에 여덟 글자, 두 줄로 된 글이 보였다.

한글도 한자도 알파벳도 아닌 처음보는 문자였다. 하지만 그 글을 읽을 수 있었고, 그 의미를 또렷이 알 수 있었다.

16자의 글자에 세상의 모든 것과 과거와 미래에 있었거나 있을 모든 일들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적혀져 있는 것이 진실이거나 진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거짓도 아니다. 너무 포괄적이거나, 너무 미소해서 아무 것도 아니기도 했고, 모두이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책을 얻었다는 것에 가슴이 뛰었다.

불현듯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꿈에서 깨어나면 그 글자들을 잊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급해서 글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무리 해도 외워지지 않았다. 하염없이 외웠다.

시간이 흘렀다. 백년이 지났다.

글자를 한자씩 외우고, 외운 글자들을 배열해 보면 각 글자들의 위치가 마구 섞여 맞출 수가 없다. 배열을 외운 후, 글자를 끼워 맞추려면 글자가 기억나지 않았다. 때론 끼워맞춘 글자들의 모습이 조금씩 변해서 다른 의미가 되거나, 안개가 되어 먼지로 사라지곤 했다.

절망하지 않았다. 단지 꿈이기에...

또 백년이 지났다. 몹시 외로웠다. 아직도 16자를 외우지 못했다. 눈이 아픈지 왠지 눈물이 흘렀다.

호흡에 글자들이 흔들린다고 생각하고, 숨을 멈추고 또 백년을 외운다.

드디어 다 외운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았다." 잠에서 깨어나, 나는 그렇게 외쳤다.

책상 위로 가서 연필을 들고 글자들을 쓰기 시작했다.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너무 막연해서 문자의 처음은 고사하고, 연필로 종이 위에 점조차 찍지 못했다. 종이 위에 글을 쓰겠다는 나의 의지는 공허와 혼돈에 의하여 가로막혀, 가위에 눌린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몇분이 지난 후 내 손에서 연필이 떨어졌다. 가까스로 숨을 내뱉으며 걸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후 때때로 그 꿈을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놓쳐버렸다는 안타까움과 함께, 아무리 꿈이라고 불과 16자에 불과한 글자(기호라고 해도 좋다) 중 단 한자도 기억을 할 수 없느냐였다.

삼백년동안 16자를 외웠는데, 단 한글자도 기억 못하다니...

무의미 때문이었다. 그 글자들이 간직한 의미는 무의미였다. 세상의 지식이나 우주의 존재의 밑바닥에는 거대한 공허와 혼돈이 있고, 그것은 아무런 질서도 없을 뿐 아니라, 의미나 지식으로 다가갈 수 없다. 존재하지 않는 글자를 이해했다는 것은, 결국 언어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했거나, 이해한 것이 무의미에 불과할 것이다.

무의미는 아무런 질서가 없었기에 내가 본 글자는 16자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한 글자 위에 무수한 글자가 중첩되어 있을 수도 있고, 글자가 아닌 감정이나 아니면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기의(記意)와 같은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표(記表)가 없는 기의라...?

아무런 이름이 없는 사물과 언어없는 사유란 불가능한 것이 아니던가.

16자의 배열은 책꽂이의 책들이 나의 손아귀에서 달아나듯 늘 흐트러질 수 밖에 없다. 또 각 글자는 혼돈으로 부터 추출되어 고정된 형상을 유지할 수 없이 늘 흔들리고 춤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 꿈에서 본 그 방을 나는 무의미의 도서관이라고 했다.

그 도서관은 방대해서 그 꿈 속의 꿈 이전에 본 방 안과 같다. 빛과 어둠이 갈라져 있으면서도 섞이고(無極而太極), 우주와 과거와 미래, 바다가 두평짜리 방 안에 공존하는 동시에 공허하며, 세상의 모든 것이 16자로 압축되고 추출되는 이율배반이 무한소급하는 그런 것이다.

아카샤(आकाश)라는 것이나, 화엄(華嚴)이나, 알레프(א)니 그런 것들은 본래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 깃든 모든 사건들의 현전, 그런 것이기에 무의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의미로 다가가려 하기에 모르는 것,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무의미에 다가가기 위하여 의미의 긴 회랑(도서관)을 거닐곤 했다. 그러다가 어둡고 습기찬 서가의 한쪽에서 우르비쉬 느 카이밤의 글을 만났다. 그는 <무너진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양피지가 썩는 이야기와 파피루스로 코덱스(codex)를 만드는 과정, 그리고 오래 전에 쓰여진 글씨를 표백처리하거나 도포한 후 그 위에 필사를 한 문서를 박피하면 그 안에 수백년 전의 글자가 드러난다는 이야기, 썩은 양피지나 찢어져 나간 파피루스를 스캐닝한 후 어떤 프로그램을 돌리면 문서의 없어진 부분에서 사라진 문자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죽은 언어의 영혼이거나, 짤려지고 바스러진 글자들의 비명일지도 모른다.

그 글자들은 고대의 언어로 설형문자이거나, 그림이기도 했고, 자음만 있어서 소리의 분절을 찾아낼 수 없으며, 글이라고 생각했으나 부적이나 신성한 부호에 불과한 그런 것들이 있다고 한다.  

카이밤은 자신은 고대문자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으며, 복원된 문서는 언어학자에 의해서 현대어로 해석되며, 번역된 글은 또 해석학자들에 의하여 검증된다고 한다.

깊은 지층에서 솟아오른 그런 문서들은 재수가 좋으면, 빈틈없이 차곡차곡 쌓인 역사의 허구와 진실들을 재배치하기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학자들의 연구 속에서 서서히 부패해 가거나, 너무 오래 전의 진실이라서 더 이상 인간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또 다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천이백오십칠년전에 있었던 참혹한 영아 살해사건처럼...

그는 전세계에서 발견된 고대문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대충 그 문서들이 발굴될 당시 여러 문서들이 함께 나타나기 때문에 문고라고 한다. 그는 마왕투이, 벽서, 사해두루마리, 나그 함마디 문고, 챠오스 문서 등을 이야기하며, 누구나 어디에 있는 지 알면서도 발굴되지 않는 방대한 문고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 문고는 라테란 바실리카(Lateran Basilica)에 있다.

2014/07/05 17:46에 旅인...face
2014/07/05 17:46 2014/07/05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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