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9/29 14:27 : 그리고 낯선 어느 곳에

01. 일반버스, 농어촌버스와 기차를 타고 여행을 했다. 길에 흘리는 것이 시간이다. 자가용으로는 한두시간이면 가 닿을 곳에 가기 위하여 버스를 기다리거나 갈아타기 위하여 반나절을 보낸다. 때론 잘못 생각하여 지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간 후, 다시 떠나왔던 곳을 스쳐 다른 곳으로 가기도 했다. 하지만 날이 지나가자 기다리는 조급함은 사라지고 길에서 날려버린 시간이 아깝지 않다.

02. 고창 선운사에서 2박, 지리산 쌍계사에서 3박을 했다. 휴식형 템플스테이가 좋다. 공양(밥) 때 기다리고 조석으로 예불이나 올릴 뿐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하루는 금방 간다. 산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각하기조차 귀찮다.

송나라 때 야부 도천 스님은 "밥이 오면 밥 먹고, 잠 오면 잠잔다."(飯來開口 睡來合眼)고 했지만, 산사에선 바빠서 그것 이상 더할 수도 더할 일도 없다.

03. 전주에서 부안을 거쳐 격포로 가는 길, 몇 사람만 탄 텅빈 버스를 몰던 운전기사는 정규노선인 해안도로가 막힐지 모른다며, 내변산을 가로질렀다. 반도의 내륙은 산도 높았고 거친 암벽들의 풍광이 보통이 아니다. 변산은 508m, 내변산은 459m다.

04. 격포에서 낡은 건물의 옥상에 지어논 사람 키보다 작은 삼각형의 방가로를 본 순간, 해수욕장의 여름이라는 지겹고 지루한 의미를 낱낱히 알 수 있었다.

05. 격포에서 떠난 버스는 줄포 쪽이 아니라 부안으로 다시 간 후, 함초가 자주빛으로 피어난 새만금의 들을 지나, 고부, 백산, 황토현 등 동학농민운동(왜 동학혁명이라는 명칭이 바뀌었을까?)으로 유명한 배들평야를 지나 정읍에 다다른다.

06. 선운사는 정말로 절이다.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선운사에서는 동백꽃이나 상사화 아니면 육자배기나 노래할 수 밖에 없다.

07. 만원을 아끼기 위하여 택한 남원의 모텔은 끔찍했다. 남원하면 모텔이 생각날 것이고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될 것이다.

08. 지리산은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뜻이라고 한다. 혹은 멀리 백두산에서 흘러왔다고 두류산(頭流山)이라고 하기도 한다는데, 지리산이 아닌 삼신산 쌍계사에 올라갔으니 지혜로움을 놓쳤는지 모르겠다.

09. 쌍계사는 총림(叢林)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영축총림(통도사), 가야총림(해인사), 조계총림(송광사), 덕숭총림(수덕사), 고불총림(백양사), 5대총림이었으나, 작년에 동화사, 쌍계사, 범어사가 총림으로 승격되어 팔대총림이 되었다고 한다.

10. 쌍계사의 계곡에 앉아 개울이 흐르는 모습을 보면, 가장 아름답고 착한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고 한 노자가 보았던 물은 어떤 물이었을까? 가는 것이 이와 같다(逝者如斯)던 공자가 바라보았던 그 물은 또 어떠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계곡물은 저렇게 맑은데도 쉬지 않고 낮은 곳을 향하여 하염없이 달려가는데, 그 흐름 속에 아상(我相)이 없다. 맑아서 개울의 바닥이 그대로 드러나고 허공 중의 빛을 다 비추인다니...

11. 산 중에는 할 일도 많다. 공양시간 맞추느라 바쁘고, 예불 또한 큰 일이라... 산 중이지만 산은 까마득하고, 개울은 돌돌돌 흐르는데 개울가에 앉아 가을하늘 한번 쳐다보기도 큰 힘이 든다.

12. 쌍계사 금당에서 육조를 생각한다. 돈오(頓悟)가 맞는다 하여도 실상은 점수(漸修)가 필요한 것이 중생이고 이 세상이다. 혜능화상이야 배우지 않고도 아는(生而知之) 사람이라면, 신수화상은 배우고 닦아야 하는(學而知之) 사람이고, 나와 같은 중생들이야 몸을 고달프게 하여도 알뚱 말뚱한(困而知之) 자들 아닌가?

중생이 그러한 데, 돈오는 무슨? 점수조차 가당치 않을 것을...

13. 전라선의 역이 있는 구례구는 다리 건너편의 구례에 속한 것이 아니라 승주에 속한다. 그래서 구례가 아니고 구례구인 것이다.

14. 동익산과 익산의 역 사이에 모텔이 운집해 있는 곳이 있다. 거기에 '아담의 성'이라는 모텔이 있고, 그 옆에 '이브의 그 곳'이라는 모텔이 있다. 어느 모텔이 먼저 생겼을까?

15. 열차가 용산역에 도착하자, 또 어느 곳인가로 떠나가야 할 것임을 직감했다.

2013/09/29 14:27에 旅인...face
2013/09/29 14:27 2013/09/29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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