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xmmxix 테이트 모던에서

새벽에 비가 많이 내렸다. 09:45분경 숙소를 나올 때는 맑은 하늘이 보였다. 테이트 모던에 들어가 창 밖을 보니 다시 날씨가 흐리다.

테이트 모던, 본래 화력발전소였다고 한다

테이트 모던은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곳이다. 하지만 마크 로스코의 ‘색면추상’ 작품 맞은편에는 인상파 화가 모네의 수련이 걸려있다. 아마 작품의 이해를 도우려는 듯하다.

그리스의 조각가 프락시탈레스는 같은 가격으로 2개의 아프로디테 조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옷을 입은 아프로디테’와 ‘벗은 아프로디테’였다. 선택할 우선권이 있던 코스인들은 ‘격식있고 정숙하기’ 때문에 옷을 입은 쪽을 선택하는 순간의 우를 범한다. 크니도스인들은 할 수 없이 벗은 쪽을 가져간다. 얼마 후 크니도스인들은 몰려드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아프로디테의 신전을 원형의 열린 구조로 바꾼다.

이 프락시탈레스의 엉뚱한 실험으로 여신이라는 종교적 존재는 사라지고,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음탕한 눈으로 감상하는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뉴먼은 미와 숭고를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오랫동안 유럽 미술의 전범이 된 그리스의 신상들은 숭고하기 보다 차라리 아름다웠다. 그리스 전통에 따라 유럽의 미술에서 숭고에 대한 열망이 미의 감옥 속에 갇혀버린다.

아름다움은 형태에서 오는 데, 형태는 윤곽이고 윤곽은 유한하다. 반면 신성의 본질은 무한함에 있기에 아름다움에 갇힌 것은 온전한 신성일 수 없다. 유럽 미술은 ‘감각의 현실 내에서 머물면서 순수한 조형성의 프레임 안에서 미술을 구축하려는 맹목적인 욕망 때문’에 숭고에 도달하는데 실패했다고 한다.

리오타르는 뉴먼의 방식을 ‘숭고의 부정적 묘사’라고 부른다. 즉 뭔가를 묘사하기를 포기함으로써 뭔가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한다.

이는 동양의 홍탁1烘雲托月法 : 달을 그리려 할 때 달은 그리지 않고, 달 주위만을 그린다. 그러면 달은 스스로 드러난다. 그래서 그리지 않고 그리기, 말하지 않고 말하는 법을 표현할 때, 홍운탁월법이라고 한다. 용수보살의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또한 거짓을 깨트림으로써 진여가 드러나게 하는(破邪顯正) 홍운탁월법이다.과 비슷하다.

마크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을 보는 이상적인 거리를 45Cm라고 한다. 그러면 색채들의 관계는 사라지고 경계가 무너진 채 하나의 뭉개진 덩어리가 엄습하며 관객은 그 전체 속으로 말려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 밑의 황동규님의 시와 맞을 듯

마크 로스코의 비밀 하나를
오늘 거제 비치호텔 테라스에서 건졌다.
지난밤 늦게까지 불 켜 있던 고깃배 두 척
어디론가 가버리고
이른 봄밤 새기 전 어둡게 흔들리는 바다와
빛 막 비집고 들어오는 하늘 사이에
딱히 어떤 색깔이라 짚을 수 없는
깊고 환하고 죽음 같고 영문 모를 환생(還生) 같은
저 금,
지구가 자신의 첫 바다 쩍 추억을 발라 논,
첫 추억을 반죽해 허허로이 두텁게 발라 논
저 금,
점차 가늘어져 그냥 수평선이 될 뻔한
저 금. 2황동규의 시 ‘마크 로스코의 비밀’

그러나 나는 마크 로스코의 그림 속에 말려들어가지는 못했다. 나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바닷가의 수도승‘이나 아르놀트 뵈클린의 ‘죽은 자의 섬‘을 보면, 가슴이 텅비어 버린 오후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바닷가의 수도승’의 경우 구도가 어쩐지 색면추상을 닮아있다.

인상파나 야수파까지 그림이란 캔버스나 벽 또는 나무판이라는 평면에 색을 칠하여 인물과 사물을 그려내는 방식이었다.

아방 가르드(Avant-Garde : 前衛)라는 열풍이 유럽에 몰아치면서 새로움의 추구는 기존방식의 탈피로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모더니즘이다.

모더니즘에서 추구하는 방식은 많지만, 새로움의 추구란 어떤 면에서 유치함과 광기로 물들어 있다고 한다. 다다이즘이란 바로 조악함의 대표가 아닌가 싶다.

다다이즘을 대표하는 마르셀 뒤샹의 ‘샘’이 전시되어 있다. 소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으로 1917년 뉴욕의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하지만 원작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테이트 모던에 전시된 ‘샘’은 1917년 당시의 사진을 보고 만든 레플리카(모작)이라고 한다. 

테이트 모던 갤러리의 작품들은 모더니즘 작가들의 실험정신과 흐름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고, 간혹 알고 있는 작품들도 눈에 띄어 즐겁게 했다. 아름답다가 ‘알음답다’라고 했던가 모르는 작품들보다 아는 작품이 훨씬 좋았다.

갤러리의 2층은 주로 피카소∙모딜리아니∙몬드리안∙마티스 등의 모더니즘 작가를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다면, 3~4층은 사진과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을 전시한 것 같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미니멀리즘∙개념미술의 작품들은 보이지 않고, 팝아트 한 점 만 보았을 뿐이다. 평소 뭘 잘 찾지 못하는 내 눈 탓인지도 모른다.

아방 가르드는 늘 새롭게 앞서 나가야 하기 때문에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과 재귀성에 기반을 둔 포스트모더니즘이야말로 모더니즘이며, 모더니즘의 강박이라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나타난 가장 큰 흐름은 ‘환영을 만들어내기 위한 미술’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작품(미술)을 사물로 만들어버리는 미니멀리즘, 미술을 그저 문학으로 치환하는 개념미술, 예술이 키치화한다면 키치를 예술로 만들겠다는 팝아트, 물론 팝아트 또한 제스퍼 존스가 그린 ‘성조기’에서는 평면인 성조기를 평면인 캔버스에 그림으로써 ‘공간화된 평면의 환영을 극복하는 과정은 있다. 하지만 팝아트는 복제를 복제함으로써 독창성의 신화를 무너뜨리고 대중의 취향(키치)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미술은 기괴해진다. <참고 : 포스트모던 미술이란 것>

밀레니엄 다리 건너편 시티 오브 런던에 있는 세인트 폴 성당의 돔

갤러리를 나와 밀레니엄 다리를 건너 시티 오브 런던으로 간다. 세인트 폴 성당의 웅장한 모습이 보였다. 잠시 성당 안에 들어가 구경을 한 뒤, 목회순서표를 들고 나왔다.

일요일이라 연 식당들이 별로 없다. 결국 프레타망제에 들어가 샌드위치를 사 먹었다. 맛 없다. 어제 ‘버튼 온 더 워터’에서 먹었던 잉글리쉬 블랙퍼스트보다 더 형편없다. 이번 여행은 음식과 동거가 불편하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방향을 몰라 헤매다가 겨우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간다. 국회의사당은 수리 중.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들어가 예배에 참석할 것을 잘못했다. 아쉽다. 대신 국회의사당 옆의 빅토리아 타워 가든스 공원에서 로댕의 작품 ‘칼레의 시민’ 동상을 보았다. 이 동상도 복제품이 아닌 로댕의 마스터 피스 중 하나라고 한다.

호스가드 문을 지나 St.제임스 파크에서 본 호스가드 쪽 전경

호스가드의 문을 지나, St.제임스 파크로 갔다. 휴일의 오후, 가을 햇빛을 시민들이 즐기고 있다. 다시 내셔널 갤러리를 갔다. 성화들이 전시된 곳을 갔더니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와 라파엘의 소품들이 있다. 카라바죠의 작품을 찾았으나 생각보다 좋지 않다.

런던 거리 야경

결국 저녁을 차이나타운으로 가서 비프 누들(중국음식)을 먹었다. 홍콩에서 먹던 것과 맛이 비슷하다. 저녁을 먹고 템스강 가로 가서 야경을 보았다. 그렇게 멋지진 않았다.

2019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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