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20 09:29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시간은 남아도는 데 글 쓰는 것이 힘들다.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할 일도 없는 나는 쓸 일도 없는 영어를 쓸 데 없이 공부한다. 그것도 쓸 데 없고 재미도 없는 영문법을 말이다.

영문법을 공부하니 말의 얼개를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에 열공 중이다.

사람들을 다양한 갈등과 관계 속에 몰아넣고, 세상을 온갖 소란 속으로 이끌고 있는 말(言)이라는 것이 고작 8품사와 5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은 우습다. 13가지 품사가 9가지 형식의 언어라면 말은 실체와 진리라는 것에 좀더 가깝게 다가갔을까? 아니면 사랑이라든가 슬픔, 아름다움 등 가슴 속을 채우고 있는 것들을 좀더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말이 진실해지고 세상이 조용해지기 위해서는 오히려 6품사 3형식으로 단순해져야 한다.

1형식은 오고 가고 뒹굴고 꿈틀거리며 살고 존재하는 삶(生)의 형식
2형식은 세상의 온갖 사물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형식
3형식은 밥과 애인과 꽃 등 세상과 관계하는 형식

하지만 4형식과 5형식에는 우리의 삶을 고달프게 하고 복잡하게 하는 뭔가가 있다.

4형식 : a는 b를 위하여 무엇을 해주었다. (교환의 형식 : 자본)
5형식 : a는 b가 무엇하도록 했다. (지배의 형식 : 권력)

또한 접속사, 감탄사와 같은 것은 없애서 말을 짧게 하고 감정의 과잉은 없앤다. 짧아진 말은 울음에 가까워질 것이다. 울음이 되면 의미는 퇴색되는 반면, 느낌은 깊고 커진다. 가령 詩처럼 논리적인 결구가 어긋나고 문장이 짧아지면 낱말은 명멸하기 시작한다.

아무 다리아 강의 유역에서 발견된 문자(Ulm문자)들은 결코 말(語)이 될 수 없는 울음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그 곳에 서식하던 고대의 종족은 의미를 발라낼 수 없는 울음을 무슨 사연이 있길래 문자로 기록하고 남긴 것일까? 말이 바벨에서 깨어져 사람들이 방역으로 흐트려질 것과 소리가 의미에 가 닿을 수 없다는 언어의 숙명을 미리 알고 자기들과 물과 바람의 역사를 의미가 아닌 울음으로 기록한 것은 아닐까?

모든 언어(言語 : language)는 결국 언어(偃語 : la linguisterie)이다. language는 말과 지식을 형식화하고 커뮤케이션하는 측면이지만, 결국 말(言)은 그 의미에 다다르려고 할 경우 결국 무너져버릴(偃)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의미와 논리를 다투는 도구로서의 언어가 아닌 詩가 되는 것이 맞지 않을까?

20140619

2014/06/20 09:29에 旅인...face
2014/06/20 09:29 2014/06/20 09:29
─ tag  Keyword Ulm문자,
Trackback URL : http://yeeryu.com/trackback/2351
◀ open adayof... Homo-Babiens ▶▶ close thedayof... Homo-Babie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