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01 08:39 : 벌레먹은 하루

봄이 오기 전에 여름이 덮쳤습니다. 새벽이 지글거리는 여름의 냄새를 피우며 왔습니다. 시멘트 길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죽이기 위하여 도로 위에 물을 뿌렸습니다. 4월 30일 이 곳의 한낮 기온은 30°C, 시멘트 도로 위의 폭염은 얼마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한낮의 폭양은 대단했습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가지가 하나도 잘려지지 않은 플라터너스가 5층 높이로 가지를 펼치고 있습니다. 지난 해의 마른잎이 다 떨어져내리기도 전에 새 잎들이 돋아났습니다. 호박잎 만한 크기로 자라기 위하여 손바닥 반만한 잎들이 햇빛 그리고 비와 바람을 갈무리하여 자라나는 모습이 보입니다. 천개의 가지와 만개의 잎이 햇빛을 가리고 천만개의 그림자가 플라터너스의 가지 위에 드리웠지만, 햇살은 그림자와 그늘 밑으로 플라터너스의 줄기와 가지의 속살 깊숙히 자신을 아로새깁니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며 낮은 음자리의 햇빛과 저녁의 무게를 지닌 그림자가 섞이고 나무의 주변은 바람에 흔들리는 잎과 가지가 뿌려대는 빛들로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밤으로 가는 오후에 남은 이정(里程)은 두시간 반 정도. 도로 건너편으로는 오후의 빛이 장렬함에도 네온이 하나 둘 씩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저녁이 도시를 점령한 시간이면 숙소로 돌아가 전기밥솥을 엽니다. 밥은 열기에 말라 딱딱하고 노랗게 눌었습니다. 겁라면을 사다 먹거나, 스마트폰을 한동안 들여다 본 후, 이불을 폅니다. 이웃의 문이 여닫기는 소리, 윗집 부부가 도란거리는 소리가 방구석에서 들립니다. 누군가는 그것은 귀신이 속삭이는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잠이 듭니다.

낡은 이 도시로 흘러든 후 꿈이란 것을 꿔 본 기억은 없습니다. 꿈꾸기보다는 뒤늦게 숙소로 돌아오고 새벽에 나가는 소리, 밤새 묵은 소변을 풀어내는 소리, 수돗물 소리, 커피포트 속에서 맹렬히 비등하는 물소리 등이 꿈자리 속을 차지합니다. 그런 밤이 지나고 충혈된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여기에서는 퇴근하기 위하여 출근합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다는 시간을, 나는 한근 두근의 무게로 팔고 있습니다. 시간을 파는 사람에게 시간이란 가지 않는 것에 불과하지만, 가지 않는 시간동안 딱히 할 일은 없습니다. 국방부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가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시간의 비가역성 탓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이렇게 무료한 시간들이 따로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때로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1과 같은 음악을 듣습니다. 드뷔시의 음악은 소리를 쫓아가거나 다음에 울려퍼질 소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음부가 새싹이 피듯 터져나와 앞의 시간에 존재하였던 소리를 소거해나가는 방식입니다. 다음 시간이 와서 지금 시간이 소멸되어가는 방식, 그것이 저에게 필요한 시간의 방식인 탓에 드뷔시의 음악과 같은 허무한 방식을 좋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허무한 날들 속에서 때때로 인간의 존엄과 같은 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또는 자유라는 것과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존엄도 없이 자유도 없이 아무런 이유없이 살아가야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만약 그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말입니다. 생애가 이 가없고 초라한 숙명을 돌파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존엄이며 의지이며 삶의 이유라는 이율배반을 질기게 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15/05/01 08:39에 旅인...face
2015/05/01 08:39 2015/05/0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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