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9/19 09:57 : 무지개, 24분지 1의 꿈

<적지와 왕국>을 다 읽었다. 구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형식이 왜 인생에 필요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구원은 실체가 아니라 현상이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 하여도 단지 일과성일 뿐이다. 그래서 늘 죄를 짖고 차에 기름을 채우듯 구원을 받아야 한다. 참으로 기묘한 현상이다. 단 한번의 구원으로 끝난다면, 세상에 사원은 쪼그라 들고 미미해져 버릴 것이다. 교회의 구원은 완결되지 않고 늘 반복되며, 절에서는 구원을 말하지 않고 본래면목을 찾으면 된다고 하지만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얼마나 공교로운가?

그러니까 인생은 낭비하도록 되어있고 구원이 없는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있다.

<적지와 왕국>을 다 읽은 뒤, 책의 1/3을 차지하는 해설을 읽고 있다. 이런 해설을 읽고 있으면 책을 다 읽은 것인지 아닌지 혼란스럽다. 해설의 제목은 <익사와 수영>이다. 바슐라르의 <물과 꿈>의 한 구절 “세계는 나의 도전, 나의 의지”를 앞에 세운 뒤, ‘상상력의 원초적 표현양식인…’ 하고 해설을 쓰고 있다.

해설이라는 것이 왜 필요한가? 과연 해설을 쓴 사람은 <까뮈>의 작품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일까? 만약 내가 <까뮈>에 대하여 잘 안다면 누군가를 위해서 해설을 쓰는 것이 타당할 것인가? 그리고 <상상력의 원초적 표현양식>이란 무슨 말라비틀어진 말이란 말인가? 우리의 상상력이 결국 지수화풍의 이미지로 환원된다는 까스통인가, 석유통인가 바슐라르의 몽상적 철학을 바탕으로 해설이라는 과학적인 작업을 수행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단지 두사람이 불란서 사람이라는 상관성 외에는 까뮈를 이해할 어떠한 단서도 가스통 바슐라르에겐 없어 보인다.

여하튼 해설자의 창작력에 경의를 표하며, 읽고 있다. 해설자는 바슐라르적인 것에 까뮈의 작품을 부합시키기 위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조리 동원하여 익사한 자와 수영하여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자를 골라내고 있다.

그러나 내가 해설에서 찾아낸 것은 어디에서 읽었는 지 몰랐던 이야기의 파편이었다.

스무 해 전에 집을 떠났던 오빠가 어머니와 여동생의 가게로 돌아온다. 그는 가족들을 놀래주기 위하여 자신이 오빠라는 것을 알리기를 잠시 미룬다. 그리고 자신의 성공을 알리기 위하여 지갑의 돈을 내보이는 등의 갖은 장난을 했을 것이다. 자신이 오빠라는 것을 밝히려고 할 즈음에, 어머니와 여동생은 맥주와 차에 약을 타서 먹인다. 그리고 그의 금품을 털은 뒤 댐으로 끌고 가 익사시킨다.<까뮈의 희곡 오해의 줄거리>

여기까지가 해설에 나온 부분이다. 아마 극이 진행되면 그들은 결국 익사시킨 젊은이가 자신들의 아들이자 오빠임을 알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를 익사시키기 까지 이 이야기는 전혀 비극이 아니다. 왜냐하면 동생과 어머니에게는 죄악은 되어도 흥분되는 일일 뿐, 비극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죽인 그 남자가 자신들의 오빠요, 아들인 것을 아는 것에서 비극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길래 이 이야기는 오이디푸스적인 근친 살해의 비극 속으로 침몰하는 것이다.

♠ ♥ ♣

연휴의 밤과 새벽에<씬 씨티>와 <연애의 목적>을 보았다. 둘 다 재미가 있다. 그런데 무엇을 말하는 지 잘 모르겠지만 <씬 씨티>는 죄악에 가득한 도시를 그저 보여주고 있다. <연애의 목적>은 죄와 구원과 이해와 사랑을 보여준다.

<연애의 목적>에서 담임(박해일 분)과 교생(강혜정 분)의 관계는 뭔가 잘못되어 있다.

이 영화의 비정상적인 상태는 학생들이 예쁜 교생에게 전혀 걸떡거리지 않고, 담임이 침을 흘린다. 또 담임은 순수하게 야비하다. ‘한번 자고 싶다’를 노골적으로 말한다. 이 정도로 노골적이라면 학부형에게 돈 봉투 달라고 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을 것 같다. 싫다는 여자가 더욱 혐오할 정도로 악착같이 쫓아다닌다. 이해는 가지 않지만 결국 둘은 같은 침대로 들어간다. 물론 사랑이란 것은 없다. <연애의 목적>은 무슨 목적? 단지 남녀가 맨 살로 이층을 짖고자 하는 목적에 충실한 야비함 밖에 없다.

문제는 사랑에서 섹스로 이전되어 가는 고리타분한 과정이 아닌, 섹스라는 <연애의 목적>을 이탈하여 사랑으로 넘어간 것에 있다.

교생은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유부남인 조교와 사랑에 빠졌다가 조교에게 농락을 당한 후, 스토커로 찍혀 다니던 학교를 포기하고 다른 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그 후 잠을 자지 못하게 되고 더 이상 남자를 믿지 못한다. 그러니까 섹스는 가능해도 사랑은 힘들다.

야비한 담임은 교생을 좋아하게 된다. 사랑의 공식 상 교생에게는 동정심을 불러낼 과거가 있고, 자신은 안달인 데, 섹스를 하고 난 후에도 교생은 자신에게 매달리지 않고 태연하다. 그러다 보니 섹스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교생에게 담임은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담임과 교생이 자신들을 따돌리고 서로 눈이 맞아 여관을 전전했다는 것을 안 학생들은 복수를 시작한다. 학교 홈페이지의 게시판에 둘이서 여관골목에서 나오는 사진이며, 교생이 예전 학교에서 조교를 스토킹했다는 것들을 올리기 시작한다. 담임은 관련 학생들을 불러 두들겨 팬다.

교육청에서 학교로 와서 학생 구타사건을 조사하고 그만 가려는 와중에 교생은 “저도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라고 한 후, 자식이 쪼잔한 담임이라는 권위로 자신을 짓누르고 성추행했다고 폭로한다.

 그 장면을 보면서, 담임의 <야비함>에 가장 어울리는 단어가 <성추행>이라는 것을 그때에서야 나는 새삼 이해하게 되었다.

담임은 결국 학교에서 짤린다. 교생은 동정표를 얻어 실습기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학교에서 쫓겨난 후 학원강사를 하는 담임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만나게 되고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

이 영화는 견고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단 <연애의 목적>이 성교(Sex)라고 대입해보자.

담임은 섹스를 강요하고 충족시킴으로써 그 댓가로 교생에게 배신을 당하게 된다. 그 결과 교직에서 짤렸을 뿐 아니라 여자에 대하여 신뢰할 수 없게 되어 연애의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반면 조교로 부터 배신당하여 연애의 목적인 사랑과 믿음을 상실한 교생은 담임에게 섹스를 제공한 댓가로 복수를 한다. 복수는 어디까지나 대위복수(조교 대신 담임)이기는 하지만, 그를 통하여 숙면을 취할 수 있고, 자신과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자신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남자(담임)를 얻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

그리하여 교생은 그 남자(담임)를 사랑할 수 있게 되며, 남자는 자신을 배신했던 여자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용서함으로써 사랑에 이르는 그림을 그린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무척 해피엔딩이다.

Teacher&1/diagram

담임: 섹스에 만족했으며, 사랑하게 되었고, 배신을 통하여 교생의 처지를 이해하고 비록 학교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교생의 사랑을 얻는다. 합계는 대체로 플러스다.

교생: 복수를 했으며, 교생실습을 완료했고, 불면과 남자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리고 복수의 댓가로 담임을 사랑한다. 합계는 플러스다.

Teacher&2/diagram

그리고 담임과 교생을 둘러싼 학생과 그들의 애인 그리고 유부남 조교까지 위의 표에서 보다시피 별로 손해난 것은 없어보인다.

특히 전체적인 면에서 담임의 야비함이 철저하게 유린당했다는 점에서 합계는 플러스 쪽으로 나오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참고로 할 점은 교생과 그녀의 애인의 헤어지는 방식인 것 같다.

교생: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잠시 침묵...
애인: 잤어?
잠시 침묵...
교생: 응!

그걸로 끝이다.

그리고 '웰컴투 동막골'을 보고 왔다.

참고> 연애의 목적

2005/09/19 09:57에 旅인...face
2005/09/19 09:57 2005/09/19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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