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층의 화장실 창을 통해 내다보는 오후 세시의 西江은 먼지와 산란하는 빛으로 자연계의 찬란한 색감들이 모노크롬으로 바래고 있다. 한강은 늦봄의 오후에 지친 듯 흐르고 나뭇잎의 색조는 이미 무르익었다. 아름다운 날이다.

아마 사람들이 비상하고자 하는 욕구는 넓은 대지를 조망코자 하는 욕구보다 빛 속에 침몰해 흐느적거리는 대지와 그 끝에 비끌어 매달린 창공의 날렵함을 만끽하고 싶음, 그것일 것이다.

빛이 있음으로 모든 사물과 사고에 이분법이 생겨났으리라. 흑암 속에 갑자기 빛이 있으라 함에 빛이 있어 어둠과 밝음이 생겨났다. 누군가 어둠은 빛의 부재라고 하지만 실은 어둠이 본질이고, 빛은 어느 날 공허하고 침잠되어 있는 태초의 무지 속에서 암종같은 찬란한 파괴력을 갖고 태어났는 지 모른다. 빛은 모든 사물의 표면을 어루만지지만 결국 사물 그 깊숙히 스며들지 못한다. 이성의 빛이 대뇌피질을 어루만지기는 해도 결국 인간의 본능과 욕정, 그리고 그 깊은 무지를 뒤흔들지 못하듯 모든 빛은 해맑긴 하여도 피상적일 뿐이다.

종교는 빛을 향하여 해바라기를 한다. 태양신 라의 사제는 사막 위를 작열하는 태양을 바라보며 그 전능에 무릎 꿇고 신은 유일(아톤)하다고 했다.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태양신의 사제였으나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안식일을 태양의 날인 일요일로 옮기고 예수의 탄생일을 태양이 다시 부활하는 동지의 다음 날로 정했다. 조로아스터는 어둠을 밝히는 불을 숭배했으며, 도교의 여동빈은 태을금화종지에서 상단전(요가의 제7의 차크라인 양미간 1촌 깊이의 빈두)에 있는 불빛을 키움으로써 신선의 경지에 이른다고 했다. 예수 또한 빛의 자식들인 옛세네파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빛이 존재하지 않던 始原은 시간도 공간도 없는 차원이었으며, 부처는 일체의 만법(존재)이 (Sunya)함을 알아야 무상정편지(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증득할 수 있다고 한다. 공은 결국 시간과 공간이라는 물리적이고 인식적인 차원을 초월한 단계, 즉 흑암의 차원으로 까지 올라간다. 옴 마니 반메 훔은 남근과 여성의 성기의 결합을 의미하며 모든 이원론적인 선과 악, 빛과 어둠이 결합하여 하나로 융통화해하는 단계를 말한다. 그리하여 불교는 교리 속에서 빛을 지움으로써 어둠마저 없애버리고 결국 종교의 핵심인 신마저 사멸시켜 버렸다.

밤이 오면 두려움에 빠지지만 낮의 치명적인 발광체에 갇혀 잠들었던 지혜를 건져올리거나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잠에 빠지거나 한다. 새벽이 오면 뜰에서 새우는 소리와 또랑물 소리와 함께 골안개를 헤치고 빛이 일어나 아침 이슬을 일깨운다. 빛의 투명성은 대지 위의 공기를 뚫고 사물을 눈 앞에 펼쳐 보임으로써 인간을 고통 속에 매몰되게 한다. 빛이 밝으면 사물에 대한 변별력은 강화되고 차이를 인지함으로써 불행은 시작된다.

젊은 날엔 무작정 여행을 떠나곤 했다. 아버지는 무엇을 보러 가느냐고 물으셨다. 그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나의 답은 항상 “그냥 가요”였다. 목적을 상실한 여행, 여행 자체가 목적이었다.

배낭을 매고 탄 버스의 차창에 눈을 들이밀고 먼지나는 신작로 곁의 나무와 잎새 사이로 보이는 개울의 차디찬 영혼을 보곤 했다. 때론 풍경 속에서 절정을 만나기도 했다. 빛과 그림자. 아침, 점심, 저녁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색조들. 섬진강의 하얀 모래에 부서지는 빛들. 잎새를 투과하여 그림자로 내려앉는 6월의 녹색 졸리움. 차디찬 개울물이 속살을 타고 올라와 그에 명증을 퍼붓는다. 누가 너는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광막한 대지 위에 뿌려지는 빛의 소리를 들을 뿐 이라고 답했으리라.

그러나 어둠을 보지는 못했다. 단지 빛과 그림자를 볼 뿐 참된 어둠을 보지는 못했다. 늘 어둠 속에서도 히끄무레한 빛의 조각들이 흘러다녔다.

어둠은 존재의 안이다. 존재의 안은 우주보다 더 깊고 가물한 어둠이 있다. 따라서 인간은 빛을 향해서 밖으로 볼 뿐 안으로 어둠을 보지 않는다.

명상이란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하다이다. 명(瞑, 冥)은 눈을 감다, 어두움을 뜻한다. 그러나 빛과 어둠이 혼돈된 상태에서 이미지를 떠올림으로써 정신의 정화를 거쳐 니르바나에 도달하며 열반의 쾌락은 존재의 합일 즉 아트만(자아)이 유일자인 브라흐만(범천)임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명상은 양식 상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명상은 어떤 의미에서 심상의 강화(집중)를 통한 정신적 노이즈(잡념)의 배제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모든 수행과 고행을 통하여 명상이 인간에게 유익하긴 하지만 결코 완벽한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고 위파사나 명상을 창시했다. 위파사나는 자신의 행동과 사고 전반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의식의 흐름 전체를 조망한다. 주의를 통하여 의식의 잡음과 모든 의식의 잡음이 자아를 구성한다는 허구성을 알고 자아가 없으면 자아에 대칭되는 모든 존재 또한 없으나 오직 하나 명료한 의식이 있음을 안다.

불교명상에 있어 영혼이나 정신의 우위성은 없다. 이성의 작용이야말로 인간이 무지로부터 초월하는 데 장애요인이 되며, 이성의 주체인 자아야말로 번뇌의 중추일 뿐이다. 자아가 사라질 때 안과 밖, 너와 나의 차별이 사라진다. 빛이 있음으로써 발생된 차이에 대한 변별력은 불교에 와서 무차별적으로 폭격되며 명료한 자각의 세계로 돌아가 태초의 신의 의식과 합일되어 신이 된다.

태초에 신이 있었다. 그리고 빛이 있으라 했고 에덴을 만든 뒤 사람에게 죽음을 주었다. 그러나 신은 죽음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과연 신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또한 인간에게 죽음은 무엇인가?

그 때 남해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태양이 서쪽으로 뉘엿뉘엿 저물고 있을 즈음에 산비탈의 각도와 빛의 각도가 일치하면서 나무의 그림자가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이었으나 나는 그 광경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달리기 시작한 그림자는 어둠 속에 먹물처럼 용해되고 산그림자와 하늘에 바랜 황혼 빛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 속에서 기나긴 여름이 지나가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홍콩에서 살 때, 나는 한국의 햇빛이 더욱 아름답다는 것을 느꼈다. 북회귀선의 아래에 자리잡은 그 땅에서 몇해동안 북쪽을 감각적으로 남쪽으로 느끼며 살아왔다. 태양은 늘 고공을 선회하였고 늘 고개를 젖혀 태양을 찾아야 태양이 보이곤 했다. 마천루 사이로 2차선으로 보이는 하늘의 옹졸함 때문이었는 지도 모른다. 편안히 태양을 보려면 오후에 홍콩과 구룡 사이로 놓인 해로를 지나야만 했다. 60도 각도의 오후 3~4시의 지친 태양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높다란 섬들과 신계를 두르는 연봉들 때문에 노을을 볼 수는 없었다.

빛깔 좋은 가을에 골든 코스트로 나가거나 사이쿵에서 해하로 해안을 따라 달리면 남지나해의 창랑한 푸른 물결과 가벼운 포말을 뿌리는 암석들, 그리고 도로 옆에 흔들리는 수풀들이 한가롭게 열린다. 하나 빛의 파편만이 대기 중에 은백색으로 휘날릴 뿐 태양은 보이지 않고 빛의 맑음과 열기를 감지할 수 있는 차디찬 개울이 척박한 홍콩에는 없었다. 따라서 아름다움을 볼 수는 있으나 차디찬 개울의 감촉으로 흠뻑 맞이할 수는 없었다.

오래 전에 ‘말테의 수기’를 읽었다. 작가는 누구나 아는 시인이었고, 가장 영혼이 깃든 작품을 썼다고 들었다. 책은 참으로 재미가 없었다. 재미의 정도는 구토, 시간을 찾아서 기타 등등의 수준쯤 된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 북구의 음산한 태양과 습기 그리고 뼈가 저릴 것 같은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릴케의 감수성은 창을 통해 스며드는 빛의 갯수를 헤아리고 빛의 움직임을 초속 1~2미터로 감속시킬 수 있을 정도로 발달되어 있었다. 그는 하얀 레이스 장갑을 스치는 빛의 율동과 대기 중의 습기와 온도에 따른 빛의 분산각을 정확히 표현하였다. 그와 같이 빛에 대한 뛰어난 감수성을 그가 갖게 된 것은 북구의 모자란 일조량 탓도 있으나 그보다는 그가 죽음의 육중한 무게를 느끼고 양감을 퍼올리기에는 불가피하게 빛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릴케가 자신의 실존적인 무게를 죽음에 실었기에 빛보다 어둠이 깊다면, 삶 그 자체에 실존의 무게를 둔 까뮈는 빛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의 소설에서 작열하는 빛을 만날 수 있다. 까뮈에게 있어서 빛은 절정이며, 지리한 일상의 구역질나는 허구와 존재의 의미를 투석해내는 무엇이자 인간을 전락시키고 적지 속에 이방인으로 만드는 라(Ra)의 신탁이었다.

빛이 빛으로 존재하기에는 우주의 모든 것들의 껍데기가 필요하다. 인간이 빛을 맞이함에 늘 피상적일 뿐이다. 인간의 물리학적인 모든 계산과 공교로움을 다하여 우주의 저 편 끝에 다가갔을 때 인간이 만나는 것은 죽음의 본질이나 사랑의 깊이 등이 아닌 또 다른 우주와 심드렁할 정도로 거칠고 피상적인 행성을 만나볼 뿐이다. 사랑과 자비 등을 떠들어도 결국 인간이 매몰되는 것은 여인의 껍질에 귀착되고 눈 코 입의 오묘한 하모니 속에 성기의 축축함을 꿈꿀 뿐이다. 결국 표피에 머물고 표피의 마찰이라는 피상적임 속에 노출되어 있음이다.

만약 삶이 윤회의 한 과정이 아니고, 신이 진흙에 입김을 불어넣는 것도 아니고, 그 아무런 가정이 없다면, 결국 엄청난 길이의 허무 속에서 잠시 허무가 불꽃놀이를 한 것이라고 본다면 어찌되었건 생명은 그 단말마의 비명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아직도 서강을 채우고 있는 6월의 태양은 아름다우며, 햇살을 반사하는 차량들이 늘상 거리를 매우고 있으나 어딘지 모르게 뜨거운 햇살 속에 느릿거리며 생활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심드렁하게 바라볼 뿐이다.

20020620일에 작성됨

2004/05/29 17:14에 旅인...face
2004/05/29 17:14 2004/05/29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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