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를 읽다 02 (위정편)

이 편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와 방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하나, 효에 대한 질문이 유독 많다. 그러나 나란 놈과 효는 서로 사맞지 아니하여 또 몇가지만 거론하고 갈까 한다.

오랫동안 어디에서 보았을까? 하는 구절이 이 편의 첫장을 장식한다.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림은 북진(북극성)을 비유함과 같다. (북극성은) 제자리에 있어도 뭇별들이 그 주위를 돈다 1위정-01 :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 라고 되어 있다. 나는 이 구절이 노자나 장자, 아니면 열자 등에 있지 않을까 하여 찾아 보기도 하였으나, 없었다. 그만큼 無爲之治의 노장적인 맛이 깊은 글이다. 천자문에 나오는 ‘수공평장’ 2《서경》<무성(武成)>편에서 나오는 ‘신용을 두텁게 하고 의리를 밝히며, 덕을 높이고 공로를 갚는다면, 옷을 드리우고 손을 마주잡고도 천하가 다스려진다.’ 의 경지를 말한다.

이러한 무위지치의 경지를 노자에서 찾아본 결과, 노자는 道는 함이 없되, 하지 못함이 없다. 제후와 왕이 이를 지킬 수만 있다면, 만물이 스스로 이루어질 것이다 3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自化(도덕경 爲政篇) 라고 되어 있다. 참고로 노대통령을 위하여 한마디를 쓴다면, 멀기도 하여라. 그 말을 아낌이여!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뒤따라도, 백성들이 다 말하길 나는 스스로 그러하다. 4悠兮, 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謂 我自然(도덕경 淳風篇) 고 한다. 장자는 대저 천하(중국)를 다스리는 것이 말에게 꼴먹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이까? 이 또한 말에게 나쁜 것을 없앨 따름이니다. 5小童曰 夫爲天下者, 亦奚以異乎牧馬者哉? 亦去其害馬者而已矣.(장자 雜篇 徐無鬼) 라고 말한다.

아버지께서 정년퇴직을 하신 후, 집 앞 공터를 한조각 얻어 푸성귀를 심으셨다. 아버지는 매일 그 곳에 나가 땡볕 아래에서 푸성귀를 가꾸셨다. 거길 가면 땡볕 아래 아버지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나는 한사코 가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아버지께선 나에게 푸성귀가 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기에 “간혹 와서 깻잎하고 배추, 파 등을 가져가라”고 넌지시 말하시곤 하셨다. 할 수 없이 그 곳으로 가서 보면, 아버지의 푸성귀들은 부실한 데, 옆의 밭의 푸성귀들은 여름 땡볕 아래 푸풋하게 자라고 있었다. “아버지! 저 밭의 주인은 자주 와요?”, “아니! 일주일에 한번이나 올까?” 그래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아버지가 매일 와서 이렇게 극성이시니, 시달려서 놈들이 잘자라겠습니까? 저기 주인은 가끔 와서 물이나 주고 퇴비나 주니까 지들이 알아서 더 잘 자라잖아요?”

정치란 이와 같아서 훌륭한 것을 하기 보다, 논의 피를 뽑듯 막히고 응어리진 것을 풀고, 잘못된 것을 제거해 나가면, 나머지는 民 지들이 다 잘먹고 잘 살기 위하여 뭔가를 뽀작뽀작 해나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구절에 나오는 德이란 무엇인가? 사실 동양고전을 읽다보면 부딪히는 문제는 용어의 개념을 언뜻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仁(어질다)도 그렇다. 어질다는 것이 어떻다는 것이냐? 주역의 원형이정의 貞(곧다)의 곧음은 무슨 뜻이냐 하는 의문에 의문을 거듭할 수 밖에 없다.

덕의 正字는 行+悳이다. 悳은 直+心이다. 즉 바른 마음을 행하다이다. 혹은 자신의 마음을 거짓없이 드러내다이다. 그러나 이렇게 푼다고 덕을 알 수 있으랴? 논어에서도 “중유(자로)야, 덕을 아는 자 적으니라!”(由, 知德者鮮矣: 위령공편)라고 되어 있으니, 나같이 싸가지가 없는 놈이 알 턱이 없다. 논어에서 단정적으로 말한 것은 “중용의 함이 덕이다”(中庸之爲德也: 옹야편)라고 되어 있는 데, 점입가경 더 어렵다. 삼련서점은 덕을 그저 도덕이라고 풀어썼는 데 이 또한 재미없다.

동양고전의 언어는 서양의 언어처럼 개념적인 술어가 아니다. 서양의 언어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바탕으로 개체(철수, 순이)가 실재하는 것이냐, 이름(사람)이 실재하는가하는 씨잘때기없는 것을 놓고 중세를 보냈다(보편논쟁), 윌리엄 오컴은 “개체가 실재(實在)이고, 보편자(普遍者: 명칭)는 실재가 아니며, 또한 개체에 내재하는 실재물도 아니다. 보편자(개체를 포괄하는 명칭)는 정신의 구성물이며, 정신 속에서의 개념으로서, 또는 말로서만 존재하고, 정신 속에서의 보편자의 존재는, 정신에 의하여 사고되는 것으로서의 존재이다” 라는 주장으로 개체(철수, 순이)를 실재로 하기로 했지만(이렇게 아무 것이나 재판이 가능하다), 중세의 이와 같은 쓸데없고 기나긴 논쟁은 언어를 개념화하고 술어화하는 데 성공하여 서양 근대과학(자연 및 사회)의 비약적인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한자 자체가 표의문자인 만큼 Feel의 문자이다. 또한 인과론에 입각하기보다, 관계론적이다. 대기설법이나 공자의 때에 따라 하는 뜬금없는 소리는 견고한 서양의 개념과 다르다. 그래서 개념은 유동적이며, 시적이다. 그래서 서양의 책을 읽으면 머리에 쥐나고, 동양의 고전은 가슴이 뻐근하다.

시경의 삼백오편을 한마디로 하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 6위정-02 :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는 것은 무슨 뜻인가? <신영복 교수>는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의 사실성에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지만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국풍(國風)에 주목합니다. ‘시경’의 국풍 부분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시경’의 국풍 부분을 읽는 이유는 시(詩)의 정수(精髓)는 이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정성(眞情性)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한다. <집주>에 보면 무릇 시(경)의 말이 선한 것은 사람의 착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말이 그른 것은 사람의 지조가 사라지는 것을 경계하고 또 불러일으킨다 라고 되어 있다. 나는 그것이 이익을 바라는 어느 일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집단적, 자연발생적 산물이기에 사특함이 없다고 판단된다.

또 <집주>에 보면 일언이폐지(한마디로 요약하면)에 대하여, 범씨(범증?)가 말하길 공부하는 사람(學者)은 반드시 핵심(要)을 아는 데 힘써야 한다. 핵심을 알면 능히 묶을(約) 수 있다. 묶을 수 있을 때, 광범위한 지식을 다할 수 있다고 한다. 아마 요약의 출전은 여기에서 나온 것 같다. 그러니까 요약은 요체를 두루미로 엮다일 것이다. 공자는 시경을 다 읽고 나서 노송의 마동(馬同)편의 思無邪 한마디로 요약했다.

그러면 논어를 일언이폐지하면 忠恕( = 吾道一以貫之)일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와 공자를 비교해보자. 공자는 자로야! 네게 가르쳐 주마. 그것 아니?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른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7위정-17 :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라고 하고 있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나는 단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근원적인 회의는 지식의 엄밀성에 주안점이 두어졌다면, 공자는 알고 모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솔직한 행위와 배우겠다는 수용성에 주어졌다. 즉 소크라테스는 테오리아(이론지)를 향한 무지라면, 공자는 관념적인 지식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알면 알고 모르면 묻는다는 실용성에 기반을 둔 지식을 추구했다. 이것이 동양과 서양의 차이이다.

다음은 팔일편과 함께 편장의 구성, 훈고, 고증, 성리학 등에 대하여 생각해 볼까 한다.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다리우스 09.01.22. 13:10
    위정편, 흥미롭습니다.^^
    ┗ 旅인 09.01.25. 03:23
    계속 논어 20편을 다 써나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난 향 09.02.08. 19:56
    궁금하면 아무리 쉬운것이라도 창피하거나 말거나 바로 질문해야 직성이 풀리는…내가 가장 좋아하던 공자님 말씀이 드디어 나왔군요..지금도 가끔 써먹는 말..아는 걸 안다고 하고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 앎이니라….정말 멋진 말인데 전 궁지에 몰릴 때마다 이 말을 써버리니 공자님의 크신 뜻하고는 별개가 아닌지 모르겠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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