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하루에 하루

1.

잠은 쉽게 온다. 그러나 여지없이 깨어난다. 네시간이나 다섯시간이면 불충분한 수면 속으로 새 날이 꼼지락거리면서 스며드는 것이다. 밤 사이에 뱃속에 든 음식물이나 술은 반쯤은 소화되고, 반쯤은 부패하면서 몸 속으로 스며든다. 그것이 양분이거나 독소의 형태로 몸 속에서 숙성되고, 다시 정신이나 영혼이 될 것이다. 그러니 정신은 늘 흐릿하고 혼란스러우며, 영혼이 맑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2.

그것이 무엇이었더라?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해 낸다 하여도 그 뿐일 것이다. 그러나 망각의 저 쪽 기둥 뒤에 숨어있을 것이 뻔한 그것을 알아챘을 때의 잠깐동안의 허무한 기쁨을 위해서, 약간의 초조는 그 댓가일 수도 있다. 노인들의 틀에 맞지 않는 수다란 그런 것이다. 그들은 중얼거리며 레테의 개울 밑으로 가라앉은 기억의 조각이 다시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마침 떠오른다. 그럼 “그래! 그 친구는 철수라고 했어!” 하며, 소리가 커지고 중얼거리기는 연장전을 시작하는 것이다. 나의 담화도 점차 사람들과의 대화의 틀에서 어긋나기 시작하고 있다. 내가 하는 말의 가닥을 잡으려고 그들이 멈칫할 때, 나는 그런 말을 하고 싶다. “아까부터 당신한테 말하고 싶던 것이 있었는 데… 그것은 당신의 거시기 있는 곳의 자쿠가 열려 빤쓰가 보여.” 아주, 몹시, 야비하게 말하고 싶다.

3.

담배 한 갑, 커피 여덟잔 설탕 듬뿍. 이른바 좋지 못한 공기와 좋지 못한 물을 마시며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하는 술 자리에서 나의 잔은 언제나 비어 있다. 자신의 주량을 모를 정도로 딸궈지는 술을 날름 위장 속으로 밀어넣는다. 얼마 안먹었는 데 왜 이렇게 취하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4.

모차르트의 음악을 싫어한다. 머리가 나쁜 모양이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안단테) 만 좋아한다. 그 명칭보다 <엘비라 마디간>으로 기억한다. 엘비라 마디간은 어느 처녀의 이름이다. 가슴 떨리게 아름답던 곡마단의 처녀! 드레스를 입고 제비넘기를 하던 그녀의 종아리가 푸른 초원에서 아지랭이 속에 희미하던 그 영화… 고등학교 이학년이었던가? 그 영화 속에서 모차르트의 음악이 흘렀다. 그 음악과 함께 육군 중위 스파레 백작은 엘비라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조금 더 앞으로! 줄을 타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그리고 줄에서 내려오는 그녀를 품에 안는거야! 그렇지! 그래 이번에는 그녀의 입술에…” 왜 그녀와 백작이 자살을 해야만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그 음악을 아냐고… 놈은 턱을 쳐들고 웃으면서 말했다. “엘비라 마디간 !” 그 곡의 이름은 <엘비라 마디간>이 아니었다. 그 영화로 인하여 그렇게 불려졌다는 것을 놈은 알지 못했다.

5.

엘레니 카라인드로우, 테오 앙겔로폴루스…, <영원 그리고 하루>의 연쇄선 상에서 <율리시스의 시선>이 실린 글을 보았다. 삶이 음울하고 절망적이며, 얼마나 허무하며, 변경에서 목숨들이 얼마나 값싸게 처분되는 가를… 그리고 그 삶에 얼마나 불필요한 것들이 매달려 있는가를… 추억? 아니 기억이라고 하자! 욕망과 청춘, 서글픔, 시선, 돌아봄, 사랑… 이따위 것들이 자리잡고서 우리를 그냥 머물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없어 그냥 살아간다면, 또 얼마나 공허할 것인가?

This Post Has 5 Comments

  1. 엘비라마디간.. 언젠가 같은 학원을 다녔던 어떤 분이 제게 이 영화의 주인공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해주셔서 이 영화를 찾아보았던 적이 있어요.
    저랑은 단 하나도 닮지 않았더군요. ㅡ.ㅡ;;
    그 배우는 이 영화만 찍고 다른 영화엔 출연한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2. 여인

    외모도 있겠지만 자태라든지 그런 것이 비슷하다는… 그런 것이 아닐까요?
    제가 이 영화를 본 때가 고등학교 2학년 아니면 3학년 때 였는데, 영화를 보면서 정말로 한번 연애라는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들 넓은 곳에서 아가씨의 다리 위에 머리를 얹고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햇빛의 향내를 맡을 수 있다면… 하고요.
    저도 이 배우가 이 영화를 보고서 더 이상 더 아름다운 영화를 찍울 수 없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무수한 제의를 뿌리치고 이 영화 한편으로 배우의 생애를 마쳤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3. 슈풍크

    요며칠은 영화 엘비라마디간에 대한 향연 같습니다. 하하.
    영화는 비극인데, 기분은 몽롱하니 좋네요.

    엘레니 카레인드로의 음반을 구하려고 무척 용썼던 기억이 납니다.
    친구가 탐을 내서 결국 줘버렸고.
    안개속의 풍경은 대사까지 적으며 수차례 봤었는데, 다시 볼 자신은 없네요.
    음울하고 낯설고 어려운 그의 영화들이. 그런데도 좋은 걸보면
    그 공허속엔 마음을 당기는 뭔가가 있는가봅니다.

    1. 旅인

      “사랑하는 아빠, 우린 낙엽처럼 여행하고 있어요.”

      앙겔로풀루스의 영화가 어려운 것은 그 내용 자체가 아니라, 영화 속에 깃든 심연과 같은 우울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안개 속의 풍경을 보면서, 아이들을 길거리에 유기하고 안개 속에 총성을 울리는 앙겔로풀루스가 미웠습니다.

  4. 旅인

    그라시아 09.01.23. 18:51
    앙겔로폴루스 감동 영화는 철학적면이 너무 좋아 그의 다 봤습니다. 불필요한 것들이 두엄처럼 나를 치켜세운 공로가 아닐까요? ^^
    ┗ 旅인 09.01.23. 20:11
    저는 두편의 영화만 보았는데, 그의 영화에 대한 맛과 멋을 아직은 못느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본 후, 앙금처럼 가슴 속에 남는 것은 있더군요. 사람은 필요한 것을 하는 시간보다 불필요한 것 속에 머무는 시간들이 훨씬 많고 그것이 정말 삶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라마 09.01.23. 21:55
    “… 아주, 몹시, 야비하게 말하고 싶다 … 모차르트의 음악을 싫어한다. 머리가 나쁜모양이다 …” 담배맛 북돋우는 맛깔진 문장입니다요^^
    ┗ 旅인 09.01.25. 03:00
    증말로 전 모차르트의 음악을 싫어합니다. 베토벤의 음악은 참고 들을 수 있는데…

    유리알 유희 09.01.24. 11:07
    오래 전의 일기를 통해 그 시절의 모습 그려봅니다. 여전히 지금처럼 커다란 눈으로 한 곳을 직시하면서 이런 사념들을 하셨군요. 이것은 필요한 시간을 산 것으로 쳐 드릴게요. ㅋㅋ
    ┗ 旅인 09.01.25. 03:01
    커다란 눈이긴 해도 시력은 영 형편없어서…

    집시바이올린 09.01.25. 02:23
    율리시스의 시선……전에도 어디선가 언급을 하신거 같은데…..
    ┗ 旅인 09.01.25. 03:02
    알렙님의 글이었지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 집시바이올린 09.01.25. 13:06
    어랍~ 2005년에 쓴글이군요….근데 글을 쓰실때 한줄 한줄 간격이 어떻게 딱딱 맞아 떨어져요? 참 신기해요 단어가 다 틀릴텐데 그게 어찌 딱딱 맞아 떨어지는지!~ 무슨 칼로 싹둑 오려 놓은 듯해서~ 힛^^
    ┗ 旅인 09.01.25. 14:15
    줄 맞추고 하는 것은 Tag를 써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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