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그것 만으로도 역사인 책

어떤 책이 있다. 1989년판이다. 그러니까 민주화가 된 후, 중판을 낸 광장이다.

광장은 1961년 군사혁명 직후 첫판을 냈고, 거기에는 혁명공약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읽은 광장은 1973년판이다. 그러니까 1972년 10월의 유신헌법이 발효되어, 민주화가 봉쇄되고 언론이 입을 다문 때, 나온 두번째 판을 나는 읽었다. 거기에는 혁명공약은 들어있지 않다.

최인훈의 <광장>은 불운한 문학적 광장에 서 있는 이정표 정도가 될 것이다. 아마 그는 이승만 정권의 말엽이나 4·19 혁명 후의 민주 공간에서 희망을 가지고 <광장>을 썼을 것이나, 결국 군사정권에 접수된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제 삼국을 희망하였던 이명준이 타고르호에서 인도양에 몸을 던지는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 그의 자살은 군사정권이 쿠테타로 집권하는 것을 본 작가의 절망의 은유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소개된 책은 <광장>발간 40주년 기념의 89년판 <광장>이다. 나는 그의 개작을 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분명히 이명준은 죽었기에 그의 부활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내가 읽었던 광장에는 부록으로 <총독의 소리>와 <주석의 소리>가 들어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없는 것 같다.

<광장> 이후 많은 그의 책을 읽었다. <서유기>, <회색인>, <소설가 구보씨의…> 그리고 중단편들. 그의 책을 읽으면서 그의 주지주의적인 성향은 표현이 거세된 소설가의 앓는 소리란 것을 알았고, 언젠가는 그가 더 이상의 소설을 쓰지 못할 것을 안다.

그리고 그는 오래 소설을 쓰지 못했고, 칩거 끝에 <화두>를 썼으나 아직 읽어볼 기회를 나는 갖지 못했다.

광장과 함께 최인훈 또한 이 시대의 불행한 노작가가 아닐런지?


서문: 『새벽』1960.10월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가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로운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1961년판 서문 : 1961년 2월 5일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울부짖음이 새어나온다…

<그러나 이글을 쓴 그 해 5월16일에 쿠테타가 일어난다.>

1973년판 서문·이명준의 진혼을 위하여 : 1973년 7월 1일

나는 12년 전, 이명준이란 잠수부를 상상의 공방에서 제작해서, 삶의 바닷속에 내려보냈다. 그는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심해의 숨은 바위에 걸려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나를 탓하였다. 그 두가지 숨은 바위에 대한 충분한 가르침도 없이 그런 위험한 깊이에 내려보내서,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를 세상 버리게 한 것을 나무랐다…

<최인훈은 1972년 10월17일 유신헌법이 발효된 후, 더 이상 광장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일역판 서문 : [일문판: 김소운 역, 『광장』(동수사, 1973)]

…남은 일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스스로 풀지 않으면 안될 숙제다.

그저 막연히, 산다고 절로 풀릴 숙제일 리 없지만, 어쨌든 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소설이 아니라 역사에 들어간다…

전집판 서문 : 1976년 7월

<다섯번째 개정임을 밝히고 한자어를 비한자어로 바꾼 것과 표현을 조금 바꾸었다고 밝히고 있다.>

1989년판을 위한 머리말 : 1989년 4월 30일

이 전집판이 가로쓰기로 바뀌게 되었다…

이 작품의 첫 발표로부터는 30년, 소설 속의 주인공이 세상을 떠난 날로부터는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주인공이 살았던 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정치적 구조 속에 필자는 여전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최인훈 씨는 6·29선언이 있은 지 2년이 가까운 시점에서 60년과 61년의 서문에서 보이던 희망과 열정을 보이지 않고 민주화를 주시하며 불안감을 간직한 채 차분하게 머리말을 달고 있다.>

참고> 광장(발간 40주년 기념 한정본)

This Post Has 3 Comments

  1. 위소보루

    서문을 읽으니 히스토리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서문에서도 많은 시대적 상황과 작가의 현실을 읽을 수 있군요. 전 예전에 읽었던 기억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그나저나 여인님 블로그 들어왔을 때 옆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고 순간 제 모니터에 벌레가 붙은 줄 알고 떼려고 하다가 혼자 뻘쭘하게 웃었습니다. 하하

    좋은 주말 맞이하시기 바랍니다.(제가 쉬고 있으니 좋은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라고 적었다가 지웠습니다, ㅡㅡ;; )

    1. 여인

      1961년 서문은 이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 旅인

    샤 론 09.06.11. 09:56
    설명 잘 듣습니다.
    ┗ 旅인 09.06.11. 18:12
    그냥 서문들을 파 온 수준인데요

    이슬 09.06.11. 10:11
    저도 잘 읽었습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 旅인 09.06.11. 18:11
    최인훈씨는 작금의 사태를 어떻게 보고 계실지?
    ┗ 이슬 09.06.11. 18:57
    밀실만 충만하고 광장은 죽어버렸다. 생각하시겠죠…
    ┗ 旅인 09.06.12. 07:52
    빙고!

    라마 09.06.11. 14:08
    89년 즈음 <구운몽>과 함께 읽었는데, 저의 기억에 남았 있는 것은 어둠컴컴하고 텅빈 광장의 회색기운 가득한 맨홀과, 맨홀 속을 흐르는 매캐한 안개 같은 구름들…로 이미지화된 풍경입니다. 두터운 2권짜리 <화두>는 오래 전 사놓고 서두만 열어보고, 책장에 꽂아둔 이후 그 책의 등짝만 힐끗거리고 있고요…
    ┗ 旅인 09.06.11. 18:06
    저도 구운몽의 기억이 잘나지 않네요. 서유기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나오고 인터뷰 내용도 나오곤 하는데… 너무 오래전에 어려운 글을 읽었던 모양입니다.
    ┗ 샤 론 09.06.11. 18:20
    구운몽은 팔 선녀 나오는 얘기 아닌가요?…
    ┗ 旅인 09.06.11. 18:42
    최인훈씨의 구운몽은 그 구운몽과 좀 다릅니다.
    ┗ 라마 09.06.11. 18:46
    여인님의 말씀대로, 최인훈의 <구운몽>은 김만중의 <구운몽>보다 더 어둡고 이데올로기적이었던 것으로 아련히 기억되는 군입쇼^^

    라비에벨 09.06.11. 15:19
    광장은 사람간 소통의 즐거움을 누릴 공간일진데…정치적이 될까봐…폭력적이 될까봐… 개방을 못하는 정부가 안쓰럽네요…살면서 시종일관하긴 어렵나 봅니다.
    ┗ 旅인 09.06.11. 18:08
    오늘 보니 미국의 은퇴정치가가 한국은 답답한 대의정치를 하느니 직접민주주의를 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제의를 했던데…
    ┗ 라마 09.06.11. 20:47
    라비에벨님 덕분에, 묑솽 하나가 떠올라버렸는데요, 아무래도 쥐박이가 ‘광장공포증’을 앓고 있는 듯하다는…ㅋㅋㅋㅋ, 광좡공포줭은 곧 일종의 사랑병이기도 한데, 쥐박이가 궁민을 쩡말 솨뢍하기는 하는데, 그런 자신의 절쩔한 솨뢍을 궁민이 거부하고 자꾸만 오해하는 듯이 보이니까(자기가 자기의 솨뢍을 오해하니까), 궁민을 직접 만나기(광장에 나가기)는 무섭고 겁나고 부끄럽고, 하지만 속으로 저것들을 패죽여말어하면서 씩씩거리고…킷킷킷

    truth 09.06.11. 21:39
    불안하군요….어수선합니다..글 잘 생각했습니다..여인님.
    ┗ 旅인 09.06.12. 08:00
    불안한 것은 지나쳐 온 망령들이 모조리 되살아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리알 유희 09.06.11. 22:22
    저도 판이 다른 광장을 두어번 읽은 기억이 나는군요, 명준, 고뇌하는 지식인의 가야 할 곳이 용궁이었다니…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존재들, 그들의 등을 떠미는 것은 무엇인지, 저는 잘 모른다고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극한의 대립은 피해가고 싶을 뿐입니다. 화두, 그 책도 저는 소설로써 재미나게 본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ㅜㅜ
    ┗ 旅인 09.06.12. 08:04
    극한의 대립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소통이 필요한데… 아쉽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 우리에게 던져진 화두는 무엇일까요?

    집시바이올린 09.06.19. 04:36
    광장 공포증………나중에 시간나면 다시한번 읽어볼게요 여인님 잘 지내시죠? ^^;;
    ┗ 旅인 09.06.19. 09:54
    예 잘 지냅니다. 요즘 딴 짓을 하느라고 레테에 잘 들어오질 못하고 있을 뿐이죠.^^ 요즘 정부가 좀 광장공포증이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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