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여인의 향기

20세기 문명의 축복은 꿈을 볼 수 있게 한 점이다. 비록 그것이 3S(Screen, Sports, Sex)라는 우민화 정책의 한 도구라도, 영화란 세상의 어둠 속으로 은빛 혹은 천자만홍의 빛을 밝혀 행복과 슬픔의 구렁텅이로 빠트리고, The End와 함께 극장 밖 비정의 현실, 그 城市에 우리를 다시 내동댕이친다.

이 영화 속에서 우리는 아릿다운 사람의 사랑의 이야기를 훔쳐본다거나, 아니면 다가가 잡을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는 배우들의 얼굴과 육신에 매료되기도 한다. 영화는 이러한 곁눈질, 관음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욕구를 채우고 또 헐떡이게 하는 것이다.

남자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랫동안 영화를 보면서 가장 잘 생긴 남자 배우를 들라고 하면, 여지없이 타이론 파워(Tyrone Power)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 남자 배우를 들라면, 신성일 조차도 아버지에 비하여 그다지 잘 생겼다고 할 수 없기에 없는 셈이다. 참고로 아버지는 여든이 넘었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얼짱 노인으로 무슨 노인대학의 잡지 표지모델로 나와 달라는 요청에 따라 얼짱 할머니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가 할머니들을 편집되고 아버지만 단독표지 모델로 오른 적도 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여자 배우가 누구냐고 물으면, 한국에서는 정윤희가 당첨이지만, 외국배우 중는 항상 헷갈리게 된다. 특히 중고등학교, 여인에 대한 동경과 성적 감정들이 요동을 치던 시절에 보아온 여인에 대한 관점은 늘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그때에 영화관에 걸리던 영화들은 따끈한 동시개봉작은 거의 없고, 리바이벌되던 영화가 더 많아서 어느 시절의 영화인지 조차 모를 40년대에서 60년대까지의 배우들이 70년대의 극장가에서 활개를 치고, 주말이면 흑백으로 방영되던 <주말의 명화> 속에 빠져 자정을 넘어 자야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자배우들은 살이 알맞게 올라 있었다. 그것은 오랜동안 남성들을 유혹하던 꽃의 향기였고, 여인에 대한 축복이어서, 그 배가 비옥하여 열매가 풍성하고 그 가슴의 젖은 달콤하여 자식이 강건해질 것이라는 은근한 속삭임이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여배우들은 <카사블랑카>에서 공항의 불빛 속에서 눈물 짓던 잉글리드 버그만, 타이론 파워의 따스했던 아내로 출연했던 <애심>에서의 킴 노박, <비밀의 장원>에서 신비로운 밀림의 여인으로 나왔던 오드리 헵번, <초원의 빛>에서 사랑에 울었던 나탈리 우드, <젊은이의 양지>에서 가난한 시골청년을 사랑했던 천사와 같은 여인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리고 워털루 브릿지에서 몸을 팔다가 죽은 줄 알았던 애인과 만나야 했던 <애수>의 비비안 리이다.

그러나 금세기 최고의 섹스심볼이라던 마릴린 먼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가질 않았다. 그녀의 영화가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에서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들지 않은 바비 인형과 같은 역으로 나오던가 아니면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 눈을 고혹적으로 내리 깔고 도톰한 입술을 앞으로 내밀고 치마 사이로 허벅지가 보이도록 다리를 드러낸 채 술집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들은 여인의 성적 아름다움을 상업화해야 하는 영화 속에서 마저 또 다시 상업화되어 속화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그런 느낌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나를 사람이 아니라 무슨 거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봐요. 그들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음란한 생각을 보는 것이죠. 그들은 나를 음란하다고 몰아붙이면서 자신들은 결백한 척하지만, 그들은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알려 하지 않죠. 그 대신 나라는 사람을 마음대로 지어냅니다. 나는 그들과 시비를 가릴 생각은 없어요. 그들은 내가 아닌 그 누군가를 무척 좋아하는 듯하니까. 지금껏 살면서 내가 바란 것이라곤, 사람들한테 친절하게 대하고 그들도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야 공평한 거래지요, 그리고 나는 여자예요. 한 남자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요.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나는 정말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어요.

먼로가 아닌 자연인 노마진으로 하려던 위의 이야기가 구체화된 사진은 이 사진같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마릴린 먼로의 모습은 내가 생각하던 뇌쇄적으로 가슴을 앞으로 들이밀며 눈을 절반쯤 내리깐 채 웃어야만 했던 금세기의 섹스 심볼,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비록 한쪽 어깨를 절반쯤 내놓았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표정에는 호기심과 애원과 원망같은 것이 한무더기로 녹아 있고, 이마에는 한줄기 수심이 어려있다. 어둡고 때가 탄 벽을 등지고 낡은 계단 위에 낡은 공단으로 만든 치마와 값싼 장신구를 걸치고 서 있음에도, 석양빛처럼 은은하게 그녀의 자태는 떠오르고, 흘러내린 어깨는 여린 풀줄기처럼 가냘프다. 응시는 기다림처럼 깊어서 보고 있으면 눈 속으로 빨려들어가 아예 그녀의 모습이 흐려지기도 한다. 그래서 애처로운 심정으로 다가가게 만드는 집요한 관능이 그녀의 입술에 잠시 반짝인다. 그리고 앵그르가 <샘>에서 보여주던 고전적 몽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육신의 관능이 아닌, 그를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초월한 몽상. 그래서 거기에서 어릴 적부터 찾아가려고 하였던 여인의 그 따사로왔던 향기와 아름다움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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