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4/22 19:44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오래 전에 일주일에 한두 번은 가라오케에 가곤 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객지의 외로움이 거리에서 배회토록 만들었는지 몰라도, 후끈한 홍콩의 밤 골목을 지나 밤새도록 에어컨 바람이 실내를 적시는 그곳에 들어서면 틀에 맞지 않던 일상들이 덜커덕 접합되었죠. 그래서 이국에 있다는 것을 불현듯 망각하게 됩니다. 계산을 한 후 문을 열고 후끈한 밤 골목으로 내려서면 고적감이 집요한 밤의 습기에 뒤섞이는 냄새는 더합니다만...

어쩌면 동료들이 택시를 타고 떠난 텅빈 타국의 밤 골목의 끝을 바라보며 ‘여기가 어디일까?’ 하는 자문은, 바삐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후닥닥 일어나 충혈된 눈으로 출근해야 하는 서울이 부과하는 무게에 비하여, 터무니없이 가볍고, 그 끝에 팔랑거리는 외로움은, 값싼 십이년산 양주의 안주거리로 적당한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다음날 출근은 합니다.

때때로 습기찬 골목으로 서울에서 아가씨가 옵니다. 늘 그렇듯이 저는 새로운 아가씨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알던 지내던 아가씨들에게도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그것은 아가씨들이 저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에게서는 아무런 체취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저에게 마담이 늘 말을 걸게 되고, 시간이 흐르다보면 마담의 온갖 인생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됩니다. 마담의 인생의 그 끝에 가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우정과 사랑 둘 중 하나입니다.

물론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사람을 달래서 자신의 술집의 단골로 만들자는 상업적인 계산에서 저에게 말을 건 것이겠지만, 대화를 이어가자면 억지춘향으로라도 가슴 속에 상대편에 대한 호감을 한쪽 정도는 가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첫눈에 필이 꽂혀 죽네 사네 하기보다는, 마음에도 없으면서 장난삼아 한 유혹에 스스로 빠져버리는 경우가 더 많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다지 할 말이 많은 인생도 아니고, 주색잡기에도 능한 사람이 아니며, 언변도 형편없어서 대부분 마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저는 굉장한 이야기를 듣는듯한 표정을 떠올리며,(그러나 대부분의 남의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는 몹시도 흥미로운 것입니다) 시간을 보냅니다. 노래를 다 부르고 술에 취한 동료들이 집으로 돌아가자고 할 때 즈음이면, 마담은 자신이 무려 두 시간 동안이나 제 곁에 앉아 있었다는 것에 놀라지만, 다음에 꼭 한번 들러달라고 말합니다.

술값을 깍아 주리란 보장은 없지만 말씀입니다.

다음에 그곳에 가면 마담은 달려오는 것처럼 내 옆자리에 앉아서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모든 인생은 세 시간으로 축약되는 것 같습니다. 진실에 해당하는 차 떼고 포 떼가면서 아름답고 서글펐던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세 시간 이상 말하기란 몹시 어렵다는 것을, 그 골목의 마담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저는 경험했으니까요.

마담의 독백이 끝나고, 저에게 늘 강요되는 것은, 저의 일방적인 오해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자~! 너는 이제 나에 대해서 다 알았으니... 나를 사랑하던지 친구로 지내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무언의 압력이었습니다. 그런 강요는 손님인 제가 해야 하는 그런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골목의 방식인지 몰라도 늘 그랬습니다.

저는 비겁하기 때문에 늘 값싼 쪽을 택했습니다. 사랑보다는 우정이죠.

사랑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저의 우정이라는 값싼 선택은 모독으로 비쳐졌던 모양입니다. 그 후론 늘 푸대접을 받았으니까요. 그리고 얼마 지난 후에는 저와 같은 형편없는 작자에게 사랑을 강요했던걸까 하며 거울을 보거나 아직도 탱탱한 자신의 엉덩이를 내려다보며 후회했을 겁니다.

어느 날, 그 골목의 A집에서 술을 먹고 있는 데, B집의 마담이 그곳에 나타나 나에게 “의리도 없이 우리 집을 코 앞에 두고 여기 와서 술을 먹을 수 있냐? 우리 집에 끝내주는 아가씨가 와서 한번 소개시켜주려고 했는 데... 왜 한번도 안 오는거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A집에 계산을 하고 나와 B로 끌려갔습니다.

이것 또한 우정의 방식이구나 하며, 이러한 싸구려를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마담과 한번 데이트라도 한번 할까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마담이 한 아가씨를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그 아가씨는 정말로 끝내주었습니다. 그 골목에서 본 아가씨 중 가장 형편없는 얼굴이었으며, 또 무뚝뚝하기가 그지 없었습니다.

홍콩 가라오케의 팁값이 아무리 시간제라지만, 기본요금을 두 번 낸 꼴이라며 투덜거리며, 동료들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의 노래가 질펀해지고 아무도 다른 사람들의 노래에 신경을 쓰지 않을 무렵, 새로 온 아가씨가 조용히 일어나 노래를 선곡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노래가 시작될 때 아무도 그녀의 노래에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저는 늘 별로 할 일이 없고 그 아가씨가 맞은편에서 노래를 불렀기에 그녀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가 부른 노래가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마이크를 잡고 조용하게 일어나 눈을 바닥에 내리깐 채 한동안 있다가 노래가 시작할 즈음에 눈을 들어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눈은 나를 본 것이 아니라 접신과 같은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저는 그녀의 얼굴에서 희미한 광채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고 그것을 조명 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눈을 땔 수가 없었습니다.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노래는 담담했고, 가라오케 아가씨들 수준이었기에 술잔을 비우고 동료들과 잡담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아까의 광채가 떠올랐으며, 그녀의 노래가 격랑처럼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슬퍼졌고 알지 못할 열정이 가슴 속에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노래가 우리들을 압도했고, 저는 길거리로 뛰어나가 차라리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에어컨의 냉기가 실내를 채우고 있었지만 몸속의 피는 헐떡이고 더웠습니다.

호흡이 멈춰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노래가 하염없이 계속되기를 애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노래가 흘러가면서 그녀의 모습은 점차 광휘에 휩싸이며 변해 갔습니다. 그 모습은 우아했으며, 이마에서 코를 지나 입술까지 완벽한 선을 그리고 있어서 그 골목에서 본 그 누구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노래가 끝났을 때, 우리는 침묵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차례 불어대던 항구의 폭풍우도 끝나고, 머리 속에 맴도는 그녀의 노래를 가슴을 식히며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녀는 감았던 눈을 뜨고 저를 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때 어둠 속이지만 그녀의 눈썹과 눈이 투명하면서도 짙은 흑색으로 뚜렷하다는 것을 느꼈고, 저는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내가 술에 취한 것이야. 그 놈의 빌어먹을 지겨움 때문에, 항구라는 이 도시의 습기에 지쳐서, 있지도 않은 외로움과 한방울도 남지 않은 사랑에 대해서... 일상이 못 견디도록 심심해서... 아니 색깔없는 나날들에 그냥 미쳐 버린거야.”




애린님의 리스본 스토리를 보고난 후에,

무어인의 피가 섞였는지 아니면 집시인지 모를 여가수의 거부할 수 없는 관능적인 모습에 빠져...

2006/04/22 19:44에 旅인...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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