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대한 조그만 생각: 집

미궁님의 포스트를 보고 덧글을 달려다가…

작년 봄에 직원과 함께 거래선을 가다가 그만 길을 잃었고, 태릉에서 창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서 달동네를 보았다. 마침 나무에 봄물이 들기 시작하였고 달동네의 정경이 마음 속에 찬란하여 차를 세우라고 했다. 꼬방동네의 비좁아 터진 방과 어깨를 비비적거리며 지나야 하는 골목, 그리고 산꼭대기를 향하여 집과 집들이 하염없이 포개지는 광경 속에서…

무릎이 삐져나온 추리닝을 입고 좁아터진 마당에서 찬물에 세수하는 사람과 점방 앞에 놓인 조그만 평상 위에 가스곤로를 올려놓고 꽁치찌개를 끓여 소주를 털어부으며 캬!하고 하루의 고달픔을 달래는 모습과 죽여 살려 하며 골목으로 새어나오는 빈곤한 부부싸움… 이런 것들이 눈 앞에 선하게 떠오르며 삶의 적나라함이 여과없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오늘의 벌이가 결코 내일의 밥그릇을 보장하지 못하는 그 곳에서 왜 찬란함을 느꼈던 것일까?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예수의 말씀처럼 호주머니가 텅빈 사람의 마음 또한 끊임없이 가난하여 산 몇번지의 허가받지 못한 방 한칸에서 불구멍을 꽉 틀어막은 한장의 연탄과 서로의 체온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나라(정부)는 늘 하나의 적이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간디는 카스트 제도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이들은 카스트적인 개념에서 인간이 아니다)에게 <하리잔>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이름의 뜻은 <신의 자식>이다. 우리 시대의 천민인 달동네 사람들은 신의 자녀처럼 신과 가장 가까운 달동네로 올라가 나라의 보호를 구하기 보다 신의 은혜로우심에 그들의 가녀린 숨을 기대어 보지만 늘 공권력을 등에 업은 재개발 업자들은 불도저와 포크레인, 때로는 각목을 들고 이 산 몇번지로 쳐들어오곤 했고, 달동네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하여 목이 찢어지도록 소리치고 항거하여도 늘 어디론가 쫓겨나곤 했다.

행복의 조건이라고 해야 할 지 삶의 조건이라고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지만, 땅의 소유가 부유의 기준이 되어버린 지 오래고 땅과 집이 없는 자들은 대지와 아무런 혈연을 지니지 못한 채 부평초처럼 떠돌게 된 이 좁아터진 땅덩어리에서 행복을 측정하는 척도는 그 놈의 땅이다.

한 평(坪)이란 장정 한사람의 편안하게 누우면 위 아래 좌 우로 10Cm 쯤 남는 공간으로 인본주의적인 척도이다. 방칸에만 한하지 않고 부엌과 화장실 등을 감안할 때 3평 정도의 면적이 한사람이 살아가는 데 최소면적이 될 것이다. 4인 가족을 기준으로 12평이 필요한 셈이다. 천만의 인구가 살아가는 서울에 최소한 삶의 면적을 계산한다면 삼천만평의 연건평에 삼백만호가 필요하다. 그런데 서울의 연주거평수는 얼마나 될 것인가? 대충 계산해보면 오천에서 육천만평 정도로 최소면적의 2배 정도의 면적에서 천만인구가 살고 있다.

그런데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서울에는 3백만세대가 있고 2백만이 채 안되는 집에서 서로 포개져 살고 있으며, 최소면적 이하의 공간에서 사는 주거수가 13.6%나 된다.

또한 주거의 시설을 보면 부엌이나 화장실, 목욕시설을 공동으로 사용하거나 없는 비율이 각 2.2%, 6.6%, 7.9%나 된다. 그러니까 방 한칸만 딸랑 있는 데에서 어디에서 받아온 물로 석유곤로에 라면을 끓여 몇식구가 저녁을 지어먹고 새벽이면 어디에선가 대소변을 해결하고, 세수를 해야하는 사람들이 이 도시에는 허다하다는 이야기이다.

이들에게 자유나 평등은 공허한 추상일 뿐이다. 이들의 삶은 쌓아올려지지 않고 늘 허물어지며 위태롭기만 하다. 그러나 이들이 위태로울 때 우리는 늘 조금이라도 더 넓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은행으로 달려가 돈을 빌어다가 재개발지구의 분양권을 사들임으로써 나날의 삶이 위태로운 이들을 더욱 더 곤핍한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이성이 모든 것을 압도하던 근대에는 모든 사람에게 이성이 있으며 자신의 이성에 따라 합리적으로 노력을 하면 행복과 부를 누릴 수 있다고 보았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게으르고, 천박하며, 신의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치부했다. 그래서 이런 낙관론을 배경으로 정부는 복지나 경제 등에 개입하지 않고 단순히 치안과 국방을 전담하는 야경국가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그러나 인간은 제로 베이스로 기투되었으며, 자신의 고유한 체험을 통해서 세상을 인식한다는 현대적인 세계관 속에서는 이성의 힘보다 환경과 교육이 한 인간의 삶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만큼 복지적인 틀에서 사고를 확대해 나가고 있는 셈이다.

다시 한번 보자.

서울의 인구는 2005년 3/4분기 현재 10,296,394명이다.

<인구주택총조사>가 있던 2000년에는 서울은 인구 9,612,053명에 가구수는 3,085,936호 주택수는 1,916,537호였다. 주택보급율은 단순 산출한다면 62.1%이다. 그러나 주택보급율은 총가구에서 가구라고 할 수 없는 단독가구(1인세대), 기숙사 등의 집단시설에 거주하는 집단가구, 비거주자인 외국인 가구를 빼야 하기 때문에 산술적인 보급율보다 높아진다.

2000년의 서울시의 통계에 의하면 보급율은 72.0%이다. 그런데 서울시의 주택보급율은 2003년에 이르면 86.2%에 달한다. 특히 2001년 보급율이 72.9%였던 것이 2002년에는 82.4%까지 10% 가까이 점프하는 데, 이와 같은 통계를 믿어야 할 지 아니면 코웃음을 쳐야할 지에 대하여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게다가 중앙정부의 통계와 서울시의 그것은 인구수조차도 일치하지 않고 있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보고서>의 주택의 점유형태별로 보면 서울에서 자기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41%에 불과하다. 물론 자신의 집을 타인에게 전세를 주고 자신은 또 전세를 사는 경우도 있겠지만 전세가 또 41%이다. 그런데 전세라도 살면 좋다. 18%의 가구는 월세나 사글세 또는 무상으로 살고 있다. 무상으로 사는 사람을 빼고 세를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저소득층으로 허드렛일을 하고 날품을 팔아 월세를 내야 하며 매달 집주인과 방을 빼라, 집세가 올랐다를 가지고 실랑이를 벌인다. 이들은 호주머니의 돈을 가지고 <밥을 먹어야 하는 가>와 <잠을 자야 하는 가>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셈이다.

때로 행복에 이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때가 있다. 그것은 분명 의식주이다. 과거 오륙십년대에는 먹는 것이 정말 중요했다면, 이제 자신의 조그만 공간이 생존에 몹시 중요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서울의 면적은 1억8천만평(605.41㎢)이다. 그리고 천만의 서울 시민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은 3천만평이다. 그리고 서울에는 약 오륙천만평에 연건평에 해당되는 집들이 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정부가 도시 빈민들에 대하여 적절한 정책을 갖지 않는다면, 자유와 평등을 말하기에 앞서 우리는 생존이라는 진실한 욕망의 무게 앞에서 저들을 <하리잔>이라는 이름으로 부름으로써 인간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야할 것이다.


자신의 도덕적 신념에 따라 윤리적인 삶을 지향하며 근검 절약하는 자들에게서 우리는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때 빼고 광낸 차림으로 멋진 장소에서 품위있는 목소리로 자신을 연기하는 불한당에게 매료될 지도 모른다.

사후 공사비 자료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당초 서울시가 예상하는 청계천 복원공사비는 약 3,600억원이었다. 그리고 통수 및 유지에 소요되는 비용은 년 70억원 쯤 된다고 한다.

3,600억원이란는 비용은 평당 건축비를 3백만원으로 잡을 때, 십이만평의 주택을 마련하고 사만명의 주거를 해결할 수 있는 돈이다. 인구 천만명의 도시에서 사만명이란 숫자는 소수점 밑으로 꺼져버리는 허망한 숫자다. 그러나 0.4%의 빈민이 아무 걱정없이 등을 눕힐 수 있는 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환상적인 이야기이며, 현재의 우리의 국가 시스템 상으로는 바랄 수 없는 꿈이다.

청계천 복원 사업은 생태 환경하천을 만들고, 서울 남북의 문화적 불균형을 해소한다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기는 하다. 그리고 공원 녹지 사업 등에 투입되어야 할 재원을 한 곳으로 집결시키고 문화의 거리로 만들고 도심의 미관을 괄목할 만큼 개선했다는 효과면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복원사업을 통하여 도심의 미관과 문화적인 향유에 노출될 수 있는 사람들은 결국 가진 자들이다. 또 서울시 예산은 지방세를 낸 시민 전반에 돌려져야 하며, 도시빈민층의 주택문제는 서울시의 몫이 아니라 중앙 정부 산하 건교부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 빈민들의 주거문제를 서울시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어 집중화 과밀화 현상이 심화된다고 그들은 말할 수 있다.

이래서 가난의 문제는 나랏님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리라.

청계천 복원공사가 어찌되었던 간에 결국은 시장님의 때 빼고 광내는 역사이다. 청계천이 비까 번쩍하는 그 날도 달동네의 그늘은 더욱 우거졌고 재개발 놀이에 놀아난 산동네 주민들은 서울에서 차츰 밀려나 경기도의 달을 바라보았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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