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고아 라스무스

거창하지만 이 책은 <내 생애 최초의 책>이다. 그것도 생애에 처음으로 들어가 본 도서실에서 읽은…

내용보다는 제목에 이끌려 책을 읽게 되는 경우가 많은 데, 이 책도 그러하며, 오랜 기억 속에 가라앉아 있는 이 책의 제목은 <라스무스와 방랑자>가 아니라, <떠돌이 고아 라스무스>였다.

어린 나는 적산가옥의 처마가 이어진 골목 길의 정주민들 틈에서 살았고, 그들은 늘 정주민이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나에게 요구했다. 글을 읽어야 했고 구구단을 외워야 했으며, 싸움하지 않고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잘 하지 못했고, 늘 지탄의 대상이었으며, 형편없는 성적과 잘 해가지 않는 숙제들로 해서 교단으로 올라가 선생님에게 하루의 매를 벌어야만 했다. 아이들은 그러한 나를 비웃었지만 그다지 외롭지는 않았다.

아직도 책이 어떤 인간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 날은 아마 사학년 이학기가 시작되고 가을이 무르익기 시작한 때 쯤이었을 것이다. 삼학년 말에 겨우 깨친 글을 그때에서야 그나마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방과 후의 학교 복도를 호주머니에 손을 질러 넣은 채 어슬렁 거닐고 있었다. 그때 학교 도서실의 문이 잠시 열렸고, 우습게도 아이들이 그 지겨운 책에 코를 쳐 박고 읽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깨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고, 한동안 잘난 놈들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학교 도서실이 책을 주욱 늘어놓은 개가식이 아니었다면, 책을 빌리기 위하여 대출카드에 이름을 적어 넣고 하는 일 때문에 그만 나와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없었다면 그냥 나왔을 것이다.

그때 나는 더 이상 학교 가기를 포기하고 정주민들의 틈을 벗어나 멀리 떠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행복이나 꿈과 같은 것을 몰랐어도,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나가 책가방을 어느 집 쓰레기통에 버리고, 버스를 잡아탄 후, 종점에 내려 하루종일 걸어가기만 하면, 더 이상 정주민들이 사는 볕이 들지 않는 골목과 오후 서너시까지 지리하게 이어지는 수업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들과 산의 냄새가 가득할 것이란 것도.

도서실 안을 살펴보겠다고 돌아다니던 나는 서가에서 <떠돌이 고아 라스무스>라는 제목을 얼핏 보았고, 자유를 갈구했던 만큼 그 책을 뽑아 들었던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책의 내용은 고아원의 못난 라스무스는 누구도 양부모가 되려 하지 않았기에 고아원을 몰래 나와 방랑을 시작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물론 동화이기에 끝은 그 후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내가 이 책에 대하여 리뷰로그를 잘 쓰려면 다시 책을 한 권 구입하여 읽어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이 책에 대한 감동은 다른 느닷없는 곳에 있다.

가출을 위하여 펼쳐든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이미 창 밖에 새까맣게 밤이 쌓여 있었고 도서실 안을 꽉 채웠던 아이들은 그 사이에 다들 집에 가고 없었다. 다 읽은 책을 서가에 꼽아놓고 도서실을 나와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에 빠져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일까 하며 마침내 학교 건물을 벗어나 교문으로 향하는 즈음에, 아직도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밤 하늘의 별을 보자, 허기와 함께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 배가 고파요.그리고 제가 책을 한 권 다 읽었어요.태어나서 처음으로요.아시겠어요? 엄마?

책을 읽었다는, 읽을 수 있다는 자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이후 허겁지겁 책을 읽었고, 어느 사이에 어린 나이에 위장병으로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는 가출을 꿈꾸지 않았으며, 자유를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이 책에 별다섯을 주는 이유는 이 책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내 생애 최초로 읽은 책>이며, 그 이후 어떤 형태로든 내가 변화되었다는 그것 때문이다.

This Post Has 4 Comments

  1. ree얼리티

    2006년 두 아이를 자퇴를 시키고 저희가 찾은 곳을 도서관이었어요.
    아마’모든 것의 시작은 신비롭다’라는 책이었을거에요.
    오랜 시간 멀리했던 책과의 만남이 시작된것이…여인님의 회상이 저에게 오버랩되면서
    모든 것의 시작은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게 시작한 도서관 기행은 학교로부터의 자유가 주는 최대의 성과였어요.
    하루에 세권 네권…나는 지금까지 뭘하고 살았나.~~
    무엇을 읽어야 할지, 어떻게 읽어야 할지, 왜 잃어야 하는지도 모른채 빠져드는 기분은
    ‘아, 이런 거구나…온전히 나에게 바치는 시간은…’
    아이들의 학교밖 시간은 서로가 서로를 찾을 수 있는 그래서 모두 아이같았던 시간이었어요.
    다른이들의 시선은 겁나지 않았지만 책 다 읽었다고 자랑하면 들어줄 엄마가 없어서
    아이도,엄마도 아닌 그 무엇도 아니었던 그래서 변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여인님의 글을
    읽으면서 드네요. 이곳은 저에게 또 다른 도서관이 되고 있습니다.~~

    1. 旅인

      아무도 읽지 않은 이 글을 읽으셨네요. 저에게는 트라우마가 많습니다. 그것들을 극복했느냐 하고 묻는다면 자신은 없습니다.
      ree얼리티님의 2006년의 결심을 생각한다면, 님 뿐 만아니라 부군, 그리고 자녀들에게 대해서도 존경심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재를 위해서 진정한 미래를 위해서, 지금의 상태와 틀에 짜여진 미래를 포기하고 매순간이 도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책을 오랫동안 읽었지만, 요즘은 회의가 많이 듭니다. 읽고 느끼고 체화되어야 하는데, 읽은 것으로 끝나버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배출되지 않는 지식을 여기다 토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2. Lee

    이 책의 제목을 여기서 보다니..정말~
    50년전쯤 글을 읽을 수 있을때부터 집에 있던 책장에 12권 전집으로 꽂힌 책들 중 하나였던..
    오늘 갑자기 저의 어린 시절 아련하게 다가오는 가본적 없던 먼 나라가 배경이었던 그 책들의 제목을 상기 하려고 애쓰다가 이 제목이 불현듯 생각나서 검색해봤는데 여기서 만나네요~^^
    감사드립니다 😊

    1. 旅인

      딱 한번 읽었음에도 아직도 줄거리를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아마 처음 읽은 책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같은 책을 읽은 분이 있다는 것도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네요.

      이렇게 오셔서 댓글을 달아주시니 고맙습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