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9일 그날에서 부터

4월19일은 누군가와 만나기로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나는 그와의 만남이 어떠했는지 알고 싶어 노우트를 뒤적여 보았지만 없었다. 그러나 나의 기억 속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 기록은 1978년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것을 개념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느낌으로 맞이한다면 그 해에 분명 나는 자유로왔다. 너무나 행복해서 산보를 하면서도 슬픔이 몰려오기도 했고, 비록 행동은 치기 어렸을 지라도 나의 일상은 정적의 부근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봄에 마당의 목련은 짧기는 했지만 밤에는 전신주에 매달린 등이나 현관의 등불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으며, 벚꽃은 산보 길에 피었다가 다시 꽃잎을 바람 결에 흩날리곤 했다. 밤에도 야릇한 광휘로 밝았으며, 군복에 검은 물을 들여 입고 다니던 얇은 스모르복 사이로 스미던 바람은 차지만 약간의 온기를 품고 있었다.

시간은 남아돌았지만, 수업에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고 교실에서 배워야 할 것들은 너무나 무가치하여 나는 교정을 배회하거나 아니면 종로로 나가 아무 곳에나 앉아 음악을 듣다가 보고 싶은 사람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그 시절이 언젠가는 끝날 것을 알았지만 나는 아낌없이 시간을 낭비했다. 나의 손끝이 사랑에 저릴 때, 입술에는 미소가 감돌 수 밖에 없었다. 친구는 나에게 종교적 경건성이 보인다고 했지만, 그것은 아마도 세상이 나에게 신비해보였기 때문이었으며, 또 한 친구가 나에게 경멸하는 어조로 박식하다고 했다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도 단조로웠기에 아무 말이나 떠들어 댄 탓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때, 나의 사명은 가슴 속을 비우고 또 뭔가를 또 채우는 것이었기에 나는 술도 마시지 않았고 친구들과도 만나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나를 떠나갔다. 우정이라는 것이 필요 이상의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했던 나의 말에, 그들은 내가 의무를 질 생각이 없는 만큼 우정에 대한 권리 또한 없다는 것을 여실히 알려주었던 것이다.

친구들이 적어지자 단순했던 나의 생활은 더욱 단순해져 수업시간에도 한 시간 내내 창 밖을 바라보며 지내거나 혼자 여행을 떠나 시골 찻집에서 두세시간 다음 소읍으로 떠나갈 버스 차표를 들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나는 때로 외로움에 누군가 나에게 다가오기를 바랬지만, 나에게 다가온 사람들에게 일정 거리를 두고 지내다 그들로 부터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치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 해는 자유로왔고, 그만큼 외로워야만 했다.

대부분의 여행을 홀로 갔던 나는 조그만 마을의 여인숙에 깃들어 때론 편지를 썼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이라면 이런 편지를 쓸 것이다.

여기는 섬진강의 옆에 있는 하동의 어느 여인숙이다. 방바닥에 누워 한 시간 가까이 천장 도배지의 무늬를 헤아리다 갑자기 너의 이름이 기억났고 그리움에 견딜 수 없어 편지를 쓴다. 그러나 편지에 쓸 것이 하나도 없다.

쓸 것이 없다기 보다, 사실 너에게 쓸 수 있는 주제는 단 한가지 뿐이기 때문이다. 그 한가지의 주제로 수천만가지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고, 천년이 지나도 그 이야기들은 다함이 없을 것이다.

오늘 낮, 화개에서 섬진강의 봄날의 끝을 보았다. 강은 다리 위까지 꽉 차 올라 강물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정오의 태양은 따스해서 전라도와 경상도가 갈라지는 화개천 위에 걸쳐진 다리 위에서 삼십분쯤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고 단지 섬진강의 강심 만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화개에서 봄바람에 떨어져 내렸던 벚꽃 잎들이 연분홍 빛으로 재잘거리며 강으로 강으로 번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때 강 건너편에서 뻐꾸기가 울었고 봄바람이 내 얼굴을 간지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가슴에 차오르던 봄날의 강바람을 너를 껴안음으로써 전달하고 싶었다.

여인숙의 방문을 열어놓으니 바람에 섞여 오는 봄의 미적지근한 냄새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사람들이 지나는 소리가 나의 가슴을 흔들며, 오늘 쉽사리 잠들 수 없을 것임을 말해주는 것 같다.

내일 이 편지를 네게 부칠 수 있을 지 모르겠으나, 너에게 쓸 수 있는 단 한가지의 주제란 ‘사랑한다’ 그것뿐이다.

다음날 우체국에 가서 편지봉투를 사서 주소를 적고 우표를 붙인 다음 편지를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 주저하는 기쁨과 보낸 후의 흐뭇한 후회, 이런 것으로 여행이나 외로움은 때론 나즈막한 감동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무수한 시간이 흘렀던 그해가 지나고 또 많은 시간이 지나 오늘에 와서야 4월19일 저녁에 그 사람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는 지 알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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