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쪽

그러니까 지난 주 토요일, 지하철에서 생애의 마지막 오분을 맞이한 듯한 잠깐 이후, 부평에서 용산으로 향하는 직행 전철을 타고, 용산에서 국철로 왕십리로 향하며 헐벗은 나무가지에 걸리는 토요일 오후의 햇빛을 그윽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책의 중간 쯤을 읽다가 253쪽이든 361쪽이든 마지막 페이지를 보는 이유는, 결말을 빨리 알고 싶은 조급함이거나, 아니면 책이 지루했다는 이야기 쯤 될 것이다. 그러나 토요일의 그 느낌은 죽음이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오분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고, 나는 만족스럽게 석양빛에 그을리는 내 지나간 삶을 애처롭게 쓰다듬으며, 온갖 갈등과 괴로움과 자기연민 그리고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에게 미소지으며 이제는 안녕이라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무 따스하게 마지막이 가슴에 스며들었고 긴 한숨 속에 모든 세월이 흘러나왔지만, 현실적인 시간으로는 거의 영점 몇초에 불과했을 것이다. 아마 그 순간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오분전까지의 나의 온갖 세월을 모두 이해했던 것 같다. 오지도 않은 세월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억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느끼는 것이었고, 나의 느낌은 마지막 순간에 나의 생을 내가 아주 부드럽게 포옹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현실인 지금으로 다시 내쳐졌고, 전철의 바퀴가 덜커덩거리는 경인전철 속에서 언제고 원하기만 한다면 다시 미래의 한 싯점으로 흘러내려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싯점으로 다가갈 수 있는 열쇠를 어거지로 말로 한다면 갈망, 시간이 접혀지는 시점으로 가고 싶다는 갈망 아닌가 싶다.

아주 어렸을 때, 경부선을 타고 밤이 풀어져 내리는 들판에 외로운 집의 작은 창에 걸쳐진 불빛을 볼 때, 나는 그 창에서 밤에 서울로 달려가는 기차를 바라보는 소년의 가슴이나, 아니면 해소기침으로 헐떡이며 낮은 기차바퀴 소리를 들으며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촌로의 가슴으로 스미는 것 같은 아리아리한 고통을 느끼곤 했다.

때론 늘 다니는 거리에서 조차 세상의 끝과 같은 지점을 만날 수도 있다. 어느 골목이나 어느 들 길에 놓여진 어느 지점, 나는 그곳을 지나기만 하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지점을 살면서 몇번 만났다. 그러나 아직도 내가 이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면 한번도 그곳을 스쳐지날 용기를 가져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왜 요즘은 이따위의 것들에 사로잡혀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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