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자의 꿈

Hermeneutical Limit

여기에서 작자의 고문서 학자로서의 프로페셔널리티를 느낄 수 있다. 분명 작자는 해석학에 대한 학문적인 지식은 없지만, 텍스트와 이해라는 상호관계를 뼈저리게 느꼈던 것 같다.

해석학적 한계(Hermeneutical Limit)를 왜곡된 관념, 즉 읽는 자의 꿈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추체험’을 통한 해석의 지평을 열고자 하더라도, ‘세계 내 존재’인 나를 통하여 해석을 할 수 밖에 없기에 말하는 자의 관념에 도달할 수 없고, 읽는 자의 꿈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솔직하게 노정하고 있다.

진실도 타인의 관념의 끊임없는 변화일 뿐 이라는 언표로 다원적인 能記(기표: le signifiant), 즉 관념의 변화가 진실인, 所記(기의: le signifie)를 대변하지만, 소기에 이를 수 없다는 소쉬르적 구조언어학의 종점에 이르고, 언어로서는 진리에 다다를 수 없다는 언명을 남기고 있다.

현대의 해석학자들의 논의를 들여다 보면, 전제된 이해(선입견)이 없으면, 주어진 텍스트를 수용(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주어진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식 또한 선입견에서 완전한 이해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오해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호와라는 텍스트가 주어졌을 때, 그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식은 각자가 세계 내 존재로서 살아온 세계에 대한 독특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이 이해의 모습은 인간 개개인 모두가 세계 내 존재인 바, 자신의 독특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호와를 해석하고 그 이미지를 투사하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는 사람마다 독특하고 다르며, 사람마다 자신 만의 여호와에 대한 심상을 지니는 것이다.

또한 신이나 죽음과 같은 형이상학적 주제는 본래 내용(체험)이 없다. 즉 기의가 없는 기표의 끊임없는 연쇄에 불과해서, 그것을 증명하려 할 경우 칸트가 말하는 이율배반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어떠한 논의도 공허하다.

따라서 신에 대한 모든 논의는 정언적이어야 하며, 증명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믿음 만이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