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6/28 09:47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갔다. 삼남에 내리는 폭설로 길들이 끊어졌고, 노인네만 사는 동네에선 닭장 높이로 쌓인 눈을 치우지 못하여 닭들이 목을 날개 깃털 사이로 접고 폐사했다는 소식과 함께 공주와 정읍과 순천의 적설량은 몇 쎈치 라는 뉴스가 정류장의 텔레비에서 보도되었다. 먼 길을 가는 사람들은 오늘 집에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듯 서성였다. 그러나 나는 갈 곳이 막연했다. 그때 읍내를 지나는 강을 따라 섬으로 가는 버스가 보였다.

허물어진 나날들을 차가 갈 수 있는 남쪽의 해변에 부려놓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민박에서 내리는 눈이 바다에 부딪혀 흔적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고 싶었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수근거림과 식구들의 침묵과 앞으로의 대책을 묻는 친구들, 빌어먹을 모멸로 가득한 나날들을 광막한 수평선에서 다가온 포말에 그만 잊고 싶었다. 흔적없이 내가 사라진다 해도 무방할 듯 싶었다. 잊혀졌으면 했다.

그 해변에서 하루를 지내거나, 영원한 시간을 보내거나 관계가 없었다. 하루 하루를 쌓아올려 결국 요 모양 요꼴이 된만큼 관계가 없었다.

나는 섬에 가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내륙과 섬 사이의 여울에 휩쓸렸고, 가난한 삶의 해변에 간신히 가 닿았다. 가난에 닿았을 때, 처음으로 겉치례에 길들어진 나의 삶의 무의미를 뚜렷하게 알아차렸고, 가난에 깃든 텅빈 외로움과 슬픔에 처절하게 떨며, 마침내 사랑이라든가 진실, 그리고 나의 생이라는 물색없는 것들을 온갖 세상의 수채구멍과 같은 바다에 던져버릴 수 있었다.

섬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자 눈발은 더욱 심해졌다. 창에 맺힌 이슬을 손으로 닦자 강의 모래톱 위의 대숲과 빙점 밑으로 서서히 흐르는 강심 위로, 동천이 무너진 듯 눈은 하얀 사선을 그으며 하염없이 내려앉았다. 버스의 앞창 와이퍼가 끼윽 쁘드득 눈을 긁어내리는 사이로 섬으로 이어진 붉고 흉측한 다리가 보였다. 오후 네시 밖에 안됐지만, 교각 너머로 섬은 어둠 속에 침침하게 솟아있었다.

“기사 양반 여기서 세워주쇼!”

도로 저 아래로 바다에 면한 스레트 집들을 보며, 무심결에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운전기사는 버스가 털썩 주저앉을 정도로 브레이크를 밟았고, 버스는 눈길에 찌익 밀렸다. 욕을 해댈듯한 표정으로 그는 돌아다 보았다. 왜 세워달라고 했을까 하면서도 그의 눈빛 때문에 배낭을 들고 무작정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기사의 짧은 소리와 함께 버스는 부우웅 교각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눈발이 굵었다. 간신히 마을로 내려가는 길을 찾았다. 옷깃을 세웠으나 목덜미로 눈이 쑤시고 들어왔고, 머리에서 녹은 눈이 이마로 흘렀다. 발작하듯 열기가 몸에 감돌았다. 턱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고 온몸의 관절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간신히 마을에 당도했다.

<커피>, <라면>, <재첩국>이라고 색이 바랜 글씨가 문에 쓰여있는 집이 보였다. 물이 스민 미닫이 문은 잘 열리지 않았다. 간신히 들어선 곳은 몹시 좁았고 어두웠다. 식당이라고 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 개수대와 꺼멓게 그을은 가스렌지, 그리고 합판으로 만든 식탁과 엉덩이 반쪽을 붙일만한 비닐의자 세 개가 보였다. 비닐의자 위에 배낭을 올려놓고 “여보세요!”라고 주인을 불렀다.

창호지로 덧댄 문의 유리창으로부터 흘러드는 미미한 빛으로 어렴풋이 그곳이 보일 즈음, 가스렌지 옆 반짝 자리 문이 열리고 “누구세요?”라며 한쪽 눈동자가 보였다. 눈동자는 몇 번인가 껌뻑거리다 할 수 없었는 지, 문이 슬며시 열리고 여자는 속옷이라도 보이는 듯 가슴께로 옷깃을 꽉 여며 잡고 나왔다. 그리고 여자는 문가에 서서 나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뜨거운 커피 한잔 주시오.”하고 나는 의자 위에 허물어졌다.
“여기 장사 안해요.” 여자가 말했다.

여느 때라면, 아 그래요? 실례했습니다. 하고 나갔을 나였다. 밖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여갔고 온몸 곳곳에서 한기가 번져 올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문에 쓰인 글씨를 보고 여길 들어왔어요. 장사를 하지 않는다 해도 커피 한 잔 정도는 끓여줄 수 있겠지요?”

여자는 생각에 잠긴 듯 그렇게 서 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가 커피를 끓여온 여자에게 마을에 잘 곳이 있냐고 물었다. 여자는 개수대에 다가가 몇 개 안되는 그릇을 씻으며, 더듬거리며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침이 나왔다. 버스가 언제쯤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 곳이든 괜찮다고 했다. 섬이든, 읍이든, 아니면 더 먼 곳이라도 괜찮다고 했다.

한참 있다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그럼 여기서 자세요.”라고 말했다.

방 값으로 삼만원을 주었다. 그녀는 받지 않았다.

“받지 않으시면, 제가 어떻게 자겠습니까?”하고 이만원을 더 얹어주며, “저녁도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치맛자락에 손의 물기를 닦고, 돈을 받은 여자는, 머리가 땅바닥까지 닿게 절을 했다.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오늘 실례를 하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하고 목례를 했다.

“조금 기다리세요.”하고 여자는 반짝짜리 문으로 다시 들어갔다.

잘 곳이 정해지고, 따스한 커피를 마시자, 온기가 감돌았고 나른했다.

여자가 소주 한 병과 오징어, 그리고 나물 같은 것을 가지고 나왔다. 소주를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칼칼하던 목이 한결 가벼웠다. 또 한잔을 했다. 반병 쯤 비우자 그녀가 돌아와 가스 불을 켜고, 냄비를 올렸다.

“부군께 죄송하다고...”

대답 대신 도마를 꺼내 조용히 칼질만 했다.

“눈은 언제 그치려나?” 다시 한잔. 나물을 씹었다. 모르는 맛이었다.

찌개가 보글거리며 끓고 있을 때, 소주는 이미 끝나 있었다.

여자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열린 문 틈 사이로 눈이 내렸다. 시각이 퇴적되는 집요한 침묵의 소리를 내며, 풀린 뱃속을 따라 가슴 속에 눈이 녹았다.

뽀드득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하얀 눈을 얹은 채 여자가 소주 두병을 가슴에 품고 들어섰다.

찌개와 소주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여자는 의자를 끌어 한쪽 구석에 앉았다.

소주 한 병에 뼈 속까지 취한 것 같았다. 일주일동안의 침묵을 풀어내고 싶었는지, 여자에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치맛자락 끝을 말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여자의 흑단같은 머릿결이 어깨를 지나 무릎까지 늘어졌다. 목이 가늘고 길었다. 여자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스물? 아님 마흔?
내일이면 눈은 그칠까?
여기는 어디지?
지금쯤 식구들은 뭘 하고 있을까?
지금 몇시지?
겨우 일곱시. 아홉신줄 알았는데...
그래 비러머글 인생이야,
비러머글...
몹시 춥군.

“아줌마, 술 더...”

2007/06/28 09:47에 旅인...face
2007/06/28 09:47 2007/06/28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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