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세지에 대한 추억

음악에 대해서는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나의 어린 기억으로는 라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면 울었거나, 정적이 흐를 때 보다 더한 막연한 공허감을 느꼈던 것 같다. 특히 Sad movie, ‘빨간 불이 켜지고 뉴스가 끝나면, 나는 깜짝 놀라 미칠 것만 같았죠. 오오라 쌔애드 무우비’ 로 기억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면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권태로움과 절망감에 휩쌓이곤 했다.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담배갑 속의 은박지에 묻어난 묵은 담배향기를 맡으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권태와 절망의 간지러움으로 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노래를 싫어했다.

서기 쌍육년도인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반 아이들이 라디오(당시는 라듸오)방송국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방과 후 노래연습을 했지만, 나는 집으로 갔다.

반에서 문제아라고 찍힌 애들을 담임선생이 의도적으로 방송국에 가는 것에서 빼버렸던 것이다. 나와 같은 제 정신이 아닌 애들을 방송국에 데리고 갔을 때 벌어질 미구의 사태- 예를 들면, 방송국 마이크를 확 뿌롸먹는다던가, 계집애 머리 끄댕이를 심심한 김에 잡아디닌다던지, 서로 어깨를 밀쳐대다가 쌈박질을 한다던지, 괜히 키들거리는 등의 사태 – 를 담임으로써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으리라.

그러나 나로서는 선생님의 왕따가 싫지는 않았다. 학교라는 지겨운 곳에서 한시라도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애들의 노래연습 때문에 수업시간이 단축되고, 할 일이 없는 나같은 애는 집에 일찍 갈 수가 있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그리고 계집애처럼 두 손을 꼭 잡고, 입을 금붕어 새끼처럼 동그랗게 만들며 노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나의 자존심에 구미가 맞았다.

그러나 불행은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다가왔다.

학교당국은 조막만한 아이들이 방송국이란 권위있는 기관에 가서 노래를 하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아무개학교 이학년 몇반 아이들의 합창이었습니다 라고 맨트가 울려 퍼질 것이란 것에 흥분해서, 아주 대단한 발상을 했는 데, 그 날은 오후반은 쉬고 오전반인 우리 반 아이들이 방송국에 다녀온 뒤 오후에 수업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담임선생은 도시락을 싸 오라고 말씀을 했고, 소풍, 운동회를 빼고 처음으로 우리는 도시락을 싸 가지고 학교를 갔다.

나는 왜 도시락을 싸 가느냐고 묻는 어머니에게 ‘에이씨! 오후 수업한다고 싸 오라는 데 어떡해. 굶으란 말이야?’하고 도시락을 챙겼다. 학교에서 오후까지 개겨야 한다는 불행한 사태에 우울해 하면서 터덜터덜 학교로 갔다.

담임은 남은 우리에게 가방이 아닌 도시락을 잘 지키라는 소리와 함께 애들을 데리고 방송국으로 총총히 떠났다.

아이들이 사라지고 담임이 없으면 재미있게 놀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교실은 침울했고 창 밖에선 무료한 시간들이 아예 움직일 생각을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때 한 놈이 ‘우리 애들 도시락 구경 한 번 해보자!’하고 제의를 했고, 무료하던 참에 잘 됐다하고 아이들의 책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리는 한 계집애의 도시락 반찬 뚜껑을 열게 되었다.

반찬통 안에는 분홍색의 동그란 것이 계란말이와 함께 놓여 있었다. 우리가 그때까지 본 반찬은 멸치볶음, 콩자반, 김치, 덴뿌라 등 익히 먹어왔던 것이지만, 부잣집 딸내미가 가져 온 반찬은 화려했을 뿐 아니라 신기하기까지 했다.

우리 세놈은 한번 먹어 봐? 하고 눈을 맞추었다. ‘따악 하나씩 만 먹자’ 하고 그것을 하나씩 입에 집어 넣었다. 그 맛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우리의 결의는 그 맛의 유혹에 와작 금이 가 버렸고, 우리가 우의를 다지며 공평하게 세개쯤 먹자 그 반찬은 바닥이 나 버렸다. 계란말이에도 침이 넘어갔지만 최소한의 양심을 가지고 ‘이제 그만 먹자’하고 반찬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 다른 애들의 반찬 감상이 끝나고 나자, 방송국에 갔던 아이들이 조잘조잘 교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담임과 아이들은 방송국에 갔다 온 감상 등을 이야기 하다가, 점심을 먹자고 물을 떠와라, 뭐해라 분주했다.

그때였다.

뒤에서 재잘되던 계집애들의 소란이 갑자기 뚝 끊기는가 했더니, 으앙~하는 소리가 아이들의 웃음 소리 속으로 번져갔고 교실은 이내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울 엄마가. 울 엄마가, 으앙~’

말을 잊지 못하는 아이에게 담임이 다가갔고, 흐느낌 소리 속에서 뭔가를 이야기하더니 담임이 교단으로 올라갔다.

나는 담임의 치마 밑으로 보이는 육중한 종아리를 보면서, 그 계집애의 반찬통 속의 분홍색 반찬이 우리를 음산하고 좋지 못한 곳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러나 담임은 나를 부르지 않고, 두 놈만 교단으로 불러 세우고는 그 계집애의 도시락 반찬을 먹었느냐고 추궁했다. 두 놈은 분노로 타 들어가는 담임의 눈동자 앞에서 자백을 했고, 담임은 도둑놈들, 거지같은 놈들, 나가 뒈질 놈들 하며 놈들의 따귀에 모질도록 손찌검을 해 댔다.

지금도 왜 담임이 나만 교단으로 부르질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지만, 그 다음에 벌어진 일 때문에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다.

담임의 고함소리 속에서 계집애 중 하나가 저 애들이 어떻게 반찬을 훔쳐먹었느냐고 물었고, 나는 어리석게도 상상력을 발휘해가며 그 광경을 설명했고 놈들을 아주 못된 놈으로 몰고 갔다.

그때 선생에게 꾸중을 듣고 있던 놈 중 하나가 고개를 들더니, 적의에 가득 찬 목소리로 ‘새끼야! 너도 쳐 먹었잖아?’ 하고 말했다. 내가 깜짝 놀라 놈을 쳐다보자, 벌겋게 부어오른 볼을 씰룩이면서도 자신의 폭로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담임은 ‘너도 나와!’하고 울부짖었고, 나는 죽었다 하며 교단 쪽으로 갔다.

담임은 교단 위에 나를 올려 세우고 아이들 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얘는 거짓말장이이고, 배신자야! 얘를 잘 봐!’

담임의 소리가 아련해지기 시작하더니, 교단이 하늘을 향해 하염없이 올라갔다. 아이들이 저 아래 에 보였고, 교실의 벽은 저 뒤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커져버린 교실 안으로 어둠과 그림자가 스며들더니 나를 동그랗게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 사이로 키들거리며 배회했다. 그리고 담임의 육중하고 매서운 손길이 아득하게 내 뺨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교단에서 내려와 교실에 가득한 그림자와 귓 속을 울리는 이명 소리를 가라앉히기 위하여 내 자리에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어둠과 그림자의 웃음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더 이상 거기에 앉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책가방을 들고 호주머니 속에서 부딪는 구슬소리를 느끼며 운동장으로 나왔다.

교문이 아득하게 저 멀리로 보였다.

나는 비칠비칠 교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생각났다.

오후 수업을 한다고 도시락을 싸 간 자식이 그냥 돌아온 것이 걱정될 것이고, 자식의 뺨이 타들어 가도록 물들어 있는 것이 안타까와 할 것이기에, 집으로 가기 보다 인왕산으로 가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둠이 내리면 집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에이, 개 같아! 씨이~ 다신 노래부르나 봐라. 나 노래 안부를꺼야! 씨이”

나는 다리에 맥이 풀려 정글짐 아래의 모래밭에 앉아 그렇게 소리치며, 울기 시작했다.

한동안 맥놓고 울던 나는 교문을 나왔고, 느즈막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학교에 가지 않았다. 일제고사 때처럼, 길거리 점포들의 함석문을 놓아두는 벽 사이에 가방을 감추고 인왕산으로 올라갔다. 다음 다음 날 학교에 갔을 때, 담임은 아팠냐고 물었고 나는 네!하고 대답함으로써 모든 사태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몇년 후, 나는 우리가 먹었던 분홍색의 동그란 것이 쏘세지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계집애가 자신의 첫 도시락 속에 놓여 있던 쏘세지를 생각하며 보냈을 감미로운 그 날의 아침과 쏘세지의 상실에 얼마나 처절한 점심을 맞이했는가를 내 도시락 반찬으로 쏘세지가 처음 올라왔을 때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난 지금은 쏘세지를 보면, 이 맛없는 쏘세지가 왜 그 때는 그렇게 강력한 유혹으로 우리를 타락하게 했으며, 도둑놈과 거지같은 놈과 맞아 뒈질 놈과 배신자로 만들었는 지를 추억할 수 밖에 없도록 한다.

왜 다시는 노래를 안하겠다고 소리치면서 울었는 지 지금도 의문이지만, 이 빌어먹을 노래시키는 사회에서 아직도 노래를 잘하지 못한다.

중학교에 들어가 어느 정도 공부를 하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모르는 척 했어도 다 안다. 반 성적이 떨어진다고 네 담임이 일제고사 때 오지 말라고 해서 학교도 가지 못하고 우리 몰래 인왕산으로 올라간 것을,

어느 날인가 도시락을 분명히 싸 주었는 데, 그 날 오후 네가 만화가게에 있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리고 밥때 놓치면 죽는 줄 아는 놈이 밥 먹었다고 들어와 자는 데, 네 뺨이 퉁퉁 불었더라.

어린 저 놈이 혼자서 얼마나 심심했을까? 마음이 어땠을까 하고 많이 걱정했다. 또 네가 사람이 될까 참 마음이 아팠다.

이제 됐다. 이만큼이라도 하니 엄마 맘이 아주 편하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어머니에게 묻고 있다.

어떻게 해야 되지요?
아직도 외롭고 살아가기엔 너무 어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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