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기행 6- 잡설의 마지막

공항잡설 2

정말 신경질나는 곳이다.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커버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그대로 들어나는 곳이 북경의 신공항이다. 長蛇陳을 친다고 할 때 오래 기다린다는 뜻을 함유한다면 북경공항의 장사진이란 이쪽가고 찍고 돌아서 저쪽가고 헤메이는 발길이다. 결국 Check in 카운터에서 Gate에 도착했을 때는 이륙시간을 지나고 말았다. 다행이 짙은 안개가 비행기의 이륙을 막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비행기가 출발을 하지 않아도 아무런 방송이 없으며 Gate의 전광판은 불이 꺼진 채 침묵하고 있다. 질문을 해도 답변조차 않는다. 밖으로 전화를 하고자 해도 카드를 쓰는 전화밖에 없으며, 사용할 카드를 구입할 곳조차 없다. 어찌어찌하여 비행기를 타고서 한시간여를 지난 후 비행기는 활주하기 시작했다.

만약 중국이 홍콩과 같이 아니면 선진국같이 소프트와 하드가 결합한다면 어찌될까를 생각하니 한편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며, 북경을 며칠간 채운 그 안개가 스모그라는 생각에 오히려 소프트와 하드보다는 공해를 해결함이 급선무라고 생각이 들었다.

잡설의 마지막

홍콩에 내리자 마자 햇빛은 창랑하였다. 밝은 빛이 안경에 끼인 먼지의 존재를 일깨우고 더 이상 한가로울 수 없다는 경고를 발하였다. 일상은 무서운 것이었다. 공항청사의 낯익음. 투명한 태양광 속에서 보이는 것들이 친숙하고 눈에 익을수록 거기에 녹아있는 기억의 앙금들이 갑자기 포말처럼 일어나 일상의 업무와 삶의 부단한 연쇄과정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급해지면서 하는 것도 없으면서 이십일세기를 몇시간 앞으로 남겨놓게 되었다. 이십일세기가 되면 과연 국가, 기업, 이데올로기 등을 멀리 하고 인간들이 행복해질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기행문을 쓰면서 하고픈 말은 북경을 갔다 왔으나 아뭇 것도 본 것이 없다는 그래서 쓸 것도 없다는 허무감을 매우기 위한 쓴다는 행위가 무익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기행이라는 행위 자체는 이성적인 행위가 아니라 보고 듣고 그리고 느낀다는 행위가 주이고 문이라는 행위는 촉발된 감정을 기록하는 행위라고 볼 때 내가 쓴 기행문은 공부에 해당한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알고 있는 중국에 대한 지식에 대한 연계고리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고 산일잡박한 지식들을 응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된다.

지식은 智者에게는 삶의 폭을 넓히고 덕을 깊게 하며 수양이 되나 나와 같은 우매한 자에게는 오히려 천진한 감정을 해치고, 덕보다는 기교를 즐기게 하며, 삶의 폭을 넓히기 보다는 교만과 이기심을 북돋는다. 하여 불혹을 넘어선 이 시점에서 소학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1999.12.31일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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