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기행 5- 북경잡설

북경잡설

북경은 무엇이든 크다. 그리고 광장이 있다. 광장은 그리스 시대에는 온갖 잡놈이 모여서 수다를 떨고 노가리를 피워 대다보니 민주주의라는 것이 꽃을 피웠다나? 그러나 산업시대에는 약한 놈은 서로 떼어놓아야 한다. 이것들이 모아놓으면 대가리를 쳐든단 말씸이야. 그래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광장이 중요하다.

약한 민초, 프롤렐타리아들이 추위에 목을 움추리고 담배를 꼬놔 물고서 광장으로 모인다. 그리고 고향에 있는 부모, 배 곯은 이야기, 그리고 얻어맞았던 이야기, 여동생이 팔려간 이야기, 마누라가 자식 놈 팽개치고 이런 삶이 지겹다고 옆집 갑식이와 줄행랑친 이야기- 이 쯤이면 그의 눈가에 물기가 비친다. 그리고 광장의 한 쪽 구석에서 웅성거린다. 그 소리는 커진다.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이 붉어진다. 소리는 광장의 한 모퉁이에서 파도처럼 일어나 커다란 염원으로, 쓰린 가슴으로, 굳건한 의지로 “전세계 프롤렐타리아여 단결하라!”

광장은 그래서 위험하다. 사람이 모이면 위험하다. 그래서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다. 광장이 없는 곳에는 혁명은 없다. 소요도 없다.

공산주의는 종교연구가에 의하면 기독교 신파에 해당된다. 원리는 신학에서 조직은 바티칸에서 나왔다고 한다. 원시공산사회는 에덴, 그런데 돈과 권력(선악과)을 알게 되면서부터 인간들은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되었다. 그러면서 역사단계에 접어든다. 선과 악은 프롤렐타리아와 부르조와, 예정조화는 유물론적 사관, 결국 혁명가(구세주)의 출현으로 전세계의 노동자는 단결하고 숙적 부르조와를 쳐부심으로써 역사의 단계는 종언을 구하고 공산사회로 복귀한다는 기독교의 신학적인 구조 속으로 빠져든다.

자본주의의 담론 속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지닌 용어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특히 자본주의냐 민주주의냐를 혼동하는 한국사람들에게는 더욱 더하다.

* 공산당 일당독재 :

애시당초에는 전세계의 프롤렐타리아가 단결하면 후기공산사회로 돌아가리라던 유토피아적인 환상은 봉건사회에 머물던 러시아가 혁명에 의하여 무너지면서 아직 공산주의로 넘어가기에는 시간이 무르익지 않았음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과도기적 정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들의 체제를 공산주의로 넘어가기 위한 일국 사회주의로 단정한다. 그러면서 타국의 산업사회에 위치한 노동자, 무산자 즉 프롤렐타리아들과 긴밀한 연계를 유지하면서 어느 날 전세계의 프롤렐타리아들이 대동단결, 혁명의 그 날을 맞이할 것을 희망한다.

일국 사회주의는 과도기적 정부단계로 반동(산업사회로 복귀하려는 불순분자나 움직임)을 막고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갖는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과도정부와 체제를 보호해야 한다. 따라서 불순분자가 섞여 있을 지 모르는 인민들의 의사에 의하여 통치되기 보다는 공산당 일당에 의하여 컨트롤되는 독재체제를 취할 수 밖에 없다.

* 주석과 총서기 :

이론 상 국가의 개념보다 공산당이 상위의 개념이며 공산당이 국가를 지배한다. 따라서 총리보다는 당비서, 주석 등이 높을 수밖에 없으며 권위의 상층부에 속한다. 공산주의가 기독교의 모사품이라면 주석과 서기관은 교황의 복제품인 것이다.

* 담론 :

제반 언어는 그 사회가 속한 담론 속에서 해석되지 않으면 왜곡되고 지저분한 의미를 지닐 뿐이다. 또한 한심한 것은 사람이 체제에 속하지 체제가 사람에 속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이 속한 체제 속에 용해되어 있는 담론을 수용할 뿐이지 담론의 결정자가 아니라는 서글픈 면,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또한 상위의 담론 안에 들어있는 하위의 속성 상 또이또이패에 불과한 것이며, 사람은 그 질곡을 넘어서지 못하며 담론의 체제를 형성하지 못한다는 점이 인간은 결국 초월할 수도 초인이 될 수도 없다는 한계를 부여한다. 반면 인간이 담론을 해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면 결국 신도 이데올로기도 인간의 존재 자체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래서 구조주의자는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말한다고 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에 의하여 말을 한다고 하나 그 말은 타인이 말을 하는 불가해한 구조, 내가 나라고 할 때 나는 내가 아닌 타인들이 부르는 아들, 부장, 아버지, 남편 기타 등등의 해체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집단적인 타인의 부르짖음을 어거지로 붙들어 묶는 하나의 대명사임을, 그래서 나라고 하는 소리는 정신병리학적인 뒤틀림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는 타당하다. 만약 타인이 부르짖는 해체된 자신을 올실로 엮지 못한다면… 결국 타인의 조각난 정신(언어)으로 살아가는 분열증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아리까리한 구조 속에서 우리의 언어는 타인의 언어이며, 타인 또한 타인의 언어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데 어디 주체가 있어 담론을 해석하고 이를 해체할 것인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공리 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저것은 각도 45도요, 그런데 이것은 43도 인데…하는 것이지 180도가 틀렸다고 소리칠 수는 없는 것이다.

과연 천안문 광장을 메운 사람들을 프롤렐타리아라고 규정할 수가 있을까? 그것은 규정에 불과할 뿐 사람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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