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기행 2- 만리장성

만리장성

명십삼릉을 보고 난 후 동북방으로 차를 달리다 보니 일망무제(그러나 안개가 눈 앞을 늘상 가린다)의 하북평원을 떨치고 준령들이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한다. 산들은 눈 앞에 지층과 암반을 드러내고 북으로 기지개를 켠다. 차가 언덕을 올라가면 갈수록 안개는 엷어진다. 북경을 뒤덮은 공해로부터 그만큼 멀어진 듯. 만추의 오후 3시경의 약간은 졸립고 느슨해진 햇살이 산과 들을 고적감 속으로 몰아낸다. 밀레의 만종에서 볼 수 있는 금빛으로 사그러져 가는 저녁의 색조. 모노크롬의 색조는 항상 사람을 우울하게 하거나 침잠케하는 마력을 지닌다. 그 색조는 모든 것이 종언을 고하는 듯한 색조로 가을날, 오후 3∼4시에 그 빛을 항상 드리운다. 한국에서도 그랬다. 그 색은 단색조로 모든 것을 황금빛과 짙은 음영으로 차별하기에, 그 빛이 지고 난 후 어둠과 겨울이 오기에, 일상을 권태롭게 하고 명상과 묵언으로 사람을 이끈다. 그래서 누군가는 밀레의 그림 어디엔가서 가을 저물녁 들을 가로질러 장중한 저녁 종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내가 간 팔달령의 장성은 아마 관 이름이 거용관(居庸關)일 것이다. 이 장성은 동으로 달려 발해의 산해관(山海關)에서 끝을 내린다. 서로는 감숙성의 가곡관(嘉곡關)까지 라고 하니 그 옆이 돈황이다. 장성을 따져보자면 진나라의 장성은 서쪽은 임조(감숙 岷縣)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는 요동에 닿으며 거리가 5천여길로미터에 달한다 (秦代長城 西起臨조 東흘遼東 長達五千餘公里)라고 하니 현재의 장성의 위치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 후에 漢代에 일부 증축과 명대에 마지막으로 개축을 거쳐 현 장성이 된다.

이 중 산해관 이북을 요(遼)라고 했다. 遼란 멀고도 멀다는 뜻이다. 현재의 북경과 하북은 전국시대에는 전국칠웅 중의 하나인 燕의 땅이었기에 중원이 틀림없으나, 遼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땅, 금기의 땅이었다. 그래서 이 곳을 먹기가 힘들어 연왕을 분봉왕으로 세워 요를 방어하곤 했다. 역사 속에서 당태종 이세민이 요를 지나 안시성에서 고구려의 장수 양만춘에게 수차에 걸친 패배의 굴욕과 한쪽 눈을 잃었을 뿐 아니라, 더 이전에는 수양제가 요를 지나 고구려를 침범했다가 떼죽음을 당한 것은 을지문덕과 양만춘의 용전 탓도 있겠으나 요를 지나 요동을 정벌한다는 자체가 힘든 탓도 무시는 못하리라. 감숙성의 가곡관은 과연 장성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에 의문을 달게 한다. 장성의 안과 밖이 다 오랑캐이거늘 오랑캐를 막겠다고 장성을 세운 바는 아닐 것이다. 가곡관의 아래로는 기련산이 하늘을 가리고 있으며, 감숙성의 성도인 난주에서 시작되는 실크로드의 하서회랑(산맥과 사막사이로 회랑같이 이어짐)은 가곡관을 지나 천산에서 천산남로와 북로로 나뉘며 남로는 파미르고원의 옆으로 난 캐러코람 하이웨이를 통하여 인도로 이어지고 북로는 카스피海로 이어진다.

말이 나온 김에 오랑캐와 漢族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중국의 역사는 산서성의 분수(汾水)에서 시작한다. 舜이 虞(산서성 平陸縣)에 나라를 세우고, 堯가 唐(산서성 臨汾縣)에 나라를 세우니 이 지방이 화(華)가 될 것이다. 이른바 화하(華夏)라고 하면 중국을 가르키는 지칭인 바 夏는 크다는 뜻이 되겠으나 禹가 세운 夏나라의 지명 또한 될 것이다. 夏는 禹가 治水 시 거북 등의 洛書를 보았다 하고 殷이 하남성 언사현(偃師縣: 洛水 上)에 도읍을 두었다면 중국민족은 汾河와 洛河가 黃河에 합류하는 지점 즉 산서성의 동남부와 하남성의 서북부를 반경으로 하는 지역에 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후일 공자가 이상국가로 보는 周의 역사를 본다면 史記에 기록되었으되 주왕실의 시조 후직(后稷: 농업을 주관하는 직위에서 나온 이름일 것임)의 증손인 공유가 하왕조로 부터 관직을 잃고 서융으로 이주 빈(섬서의 분州) 땅에 근거를 삼아 周文王(昌)의 할아버지인 고공단보(古公亶父)까지 9대째 오랑캐인 서융(西戎) 속에 살다가 고공단보가 기산(岐山: 섬서성)에서 周國을 일으켰다. 그러니 섬서성은 원래 오랑캐의 땅이었으며, 周왕실 또한 그 피가 오랑캐와 섞여 화족(華族)이 아니라 할 것이다. 그 후 서백(西伯=주 문왕 : 은의 서쪽의 伯爵 位를 득함) 昌이 유리에서 자기 자식의 고기를 씹는 고통을 겪으면서 완성한 것이 周易이라 하며 古易(連山易과 歸藏易)과 다른 별체를 이루며 역의 완성자라는 명분 하에 문왕으로 추존된다. 昌이 유리에서 풀려나 다시 돌아온 후 위수(渭水: 감숙성에서 발원 섬서성에 위치)에서 견융(犬戎)을 몰아내고 장안을 접수하는 한편, 그 강가에서 낚시하던 강여상(태공망:고공단보가 기다리던 인물이라는 뜻)을 만나 치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결국 강태공은 창의 아들 發(무왕)을 도와 서진, 殷을 무너뜨림으로써 중원의 무대를 분·락(汾·洛)에서 위(渭)로 넓히게 된다.

오랑캐를 구별하는 용어가 東夷, 西戎, 南蠻, 北狄, 東北 , 西南羌이라 하였는 바, 이는 중원이 산서남, 하남북, 섬서동을 중심으로 한다는 반증이며 중원의 범위 또한 극히 협소했다는 느낌을 준다. 이 중 戎羌이 장성하여 특히 서융이 周를 약화시켜 춘주 전국시대로 돌입하게 되었으며, 후일 서쪽의 戎羌이 힘을 잃자 북방의 흉노가 일어나 중국을 침노해 왔기 때문에 秦, 趙, 燕의 북방장성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여 장성이 현재보듯이 秦의 가곡관에서 趙의 안문관을 지나 燕의 산해관까지 이어진다. 어찌된 일인지 후일 흉노는 갑자기 중국역사에서 사라지고 흉노의 자취는 터어키, 더욱 멀리 폴란드 헝가리 핀란드등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잡설하자면 東夷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기로는 한민족을 뜻하지 않는다. 東夷라는 명칭이 춘추전국시대에 만들어졌다면 어느 정도 한민족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으나 한대에 들어 史記에 이미 조선이라 언급하여 한민족을 이미 변별해 냈던 점으로 볼 때 東夷는 한민족이 아니다. 후대의 魏志東夷傳에서 東夷라 할 때와 의미변화가 상당하리라 생각한다. 오히려 가깝기로는 동북맥과 상응하리라 생각한다. 맥의 칩거한 지역이 요동이라는 점에서 고구려의 부여족과 상통하리라 생각한다. 중원의 개념이 汾·洛·渭三水, 반경 삼사백킬로에 해당한다면 동이는 필경 산동을 중심으로 발해를 둘러싼 일대를 이야기 할 것이다. 이후 중원의 개념이 동으로 산동에 이르게 되자 동이가 한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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