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침 건너기

아침에 지하철 속에서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다시 읽었다. 보르헤스의 그 단편에서 내가 느꼈던 공포의 구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글의 거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칼어, 라틴어를 습득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사고를 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의심이 들곤 했다.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며, 또한 일반화를 시키고 개념화를 시키는 것이다. 푸네스의 풍요로운 세계에는 단지 거의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세부적인 것들 밖에 없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경험의 폭죽들이 터지는 그 순간 순간들과, 그 매순간에 우주의 넓이로 다가오는 경험의 무늬들을 생각했다. 시공간에 펼쳐지는 그 무한한 세계를 생각하자, 절망적인 공포가 다가왔다.

아마 개와 개구리와 여치들은 매순간 공포와 경이에 사로잡혀 그 무한한 세계를 받아들이고 또 흘려보낼 것이다. 마치 말을 모르는 갓난아이의 눈 위에 스쳐지나는 정체를 모를 다양한 표정들처럼 말이다.

결국 언어란 우리의 뇌가 감내할 수 없는 이 무한한 경험들을 잠재의식 속으로 흘려보내고, 감각의 경험을 추상화하는 것, 그래서 기억과 사고를 가능케 하는 감쇄장치가 아닐까?

그리고 조금 시간이 더 남아 <칼의 형상>으로 넘어갔다. 거기에는

아일랜드는 우리에게 유토피아적 미래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견딜 수 없는 현재이기도 하지요.

라고 쓰여 있다.

이 글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그럭저럭 견딜 만 하다. 그러나 아무런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럭저럭 살아갈 뿐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3번 출구로 올라오자, 짙은 구름과 안개 밑으로 미적지근한 아침이 낮게 깔려 있었고 담배를 피우거나 김밥을 사 먹으러 가는 회사 직원들이 드믄드믄 보였다. 그러자 땀냄새와 같거나, 비린내와 같은 여름 하루가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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