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영화들

1. 다빈치 코드

다빈치 코드에 대해서는 이전에 써 놓은 글이 있어서 영화의 줄거리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소설의 긴박감을 영화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다. 그것이 영화와 소설의 차이점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간에 쫓겨 가며 암호를 풀어나가던 소설 속의 긴장감이 영화에서는 전혀 살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가 무덤덤하다.

소설은 독자가 읽는 시간과 사건의 전개시간이 일치하는 리얼 타임 기법으로 쓰여졌다. 소설은 24시간짜리이다. 영화의 러닝 타임은 불과 147분(2H27M)이다. 이 시간에 24시간을 압축하기란 사실 상 무리다. 그럼에도 원작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았을 때, 그 내용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지는 약간 의문이다.

의문점 하나, 왜 성배는 소피라는 여자에게로 흘러가는가?

그것은 남자에게로 성혈이 흘러갈 경우, 부인이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면 성혈은 그만 단절된다. 그러나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자손에게는 성혈은 늘 흐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성혈보다는 모계혈통적인 성배 중심의 신화가 탄생한 것이 아닐까?

예수에서 지금의 성배(소피)까지의 댓수는 80~90대이다. 이 계산이라면 예수의 피가 지금의 성배인 소피에게 섞여있는 비율은 8.27의 -25승(0.5의 80승)에서 8.08의 -28승(0.5의 90승)에 해당된다. 나노가 10의 -9승(0.000000001)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소피의 몸에는 예수의 피가 한방울도 없는 셈이다.

성혈과 성배는 중세의 이야기이다. 파르찌팔이나 아이반 호와 같은 중세의 이야기. 이러한 신화가 암흑시대를 거치면서 서구의 영혼을 만들어 왔다는 사실은 그만 근대의 합리주의에 의하여 감추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문화 속에 깃든 연금술과 까발라, 오컬티즘, 그리고 코르도바와 그라나다에서 불어온 회교적인 것들과 북서부에서 흘러든 마니교도적인 것들이 뒤섞인 암울한 전승들, 그리고 뮈토스를 다빈치 코드와 같은 이야기가 아니면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2. 엘렉트라

딸내미가 재미있다고 하는 데, 거론할 가치조차 없는 킬링타임용 영화, 환타지도 아니고 킬빌도 아닌 영화, 허리우드가 이런 류의 영화만 만들어 낸다면 스크린 쿼타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한가지 이상한 점은 왜 허리우드가 총보다 칼을 선택하게 되었느냐는 점이다. 스타워즈 이후 허리우드는 총보다 칼에 대하여 신성을 더 부여하며, 칼 중의 최상은 닛뽄도이다. 그리고 일본의 무도에 신격을 부여하면서도 사악한 적을 일본인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경향은 스타워즈 이후, 킬빌과 가라데 키드, 그리고 여러 영화에서 접할 수 있다. 일본이 선악을 함께 내포한다면, 중국은 선이거나 악으로 양분된다. 이러한 싸인은 일본을 동양문화의 대표로 존경하면서도, 적으로 간주하는 양면성에 근거한다고 보인다. 마치 적국에 진주한 맥아더가 일본 문화를 보고 열광하였던 것의 역전이 아닐까?

3. 나니아 연대기

비록 기독교적 상상력에 근거하긴 했지만, 느티나무 옆에서 순우분이 꾼 남가일몽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단지 옷장 속이라는 것과 개미집이라는 차이 밖에 더 있을까

해리 포터보다는 어린아이에게 덜 해롭겠지만, 상상력의 측면에서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보다는 훨씬 빈곤한 영화.

4. 오만과 편견

간혹 이런 훌륭한 영화를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만큼 최근에 좋은 영화가 없었다는 반증이다. 나처럼 멜로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오만과 편견은 현대적이고 도시풍의 사랑이 아닌 클래식하고도 전원풍의 사랑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행복하게 이 영화를 보았다.

영국의 어느 지방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전원과 낡은 목조건물의 베넷가와 엘리자베스가 들고 있던 귀퉁이가 찌그러진 오래된 책, 그리고 낡은 책상. 이런 것들은 풍요와 시간이 서서히 익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오만과 편견에서는 짜릿한 사랑을 볼 수 없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한켠에서 사랑이 익어가기를 기다리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사랑이 결코 절대적일 수 없는 시대에, 온갖 관습과 불합리한 제도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시간을 들이고, 품위와 수줍음을 간직한 채, 사랑을 그려가는 다아시는 조용한 침묵과 남자로서의 자긍심을 보여주었고, 강인한 지성과 경쾌함을 겸비한 엘리자베스의 눈동자는 명료하여 바라보기에 눈이 부신 것만 같았다.

이러한 고전적인 사랑이 이 시절에 다시 부활했으면 싶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고요와 품위와 덕성에 휩싸일 때, 가장 빛난 광휘로 찬란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과연 이 오만과 편견을 읽는다면 재미있을까? 영국 놈들의 문학적 상상력과 표현력은 눅눅하고 음침하여 도시 재미란 것이 없으니… 세익스피어에서 폭풍의 언덕, 테스, 채털리 부인의 사랑 등등을 보면 몽땅 한개도 재미가 없고 인습과 전통의 굴레에서 빛을 보지 못하는 인간상 밖에 보여주질 못하고 있었으니…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목련
    품위와 수줍음을 간직한 채, 사랑을 그려가는 영화 ‘오만과 편견’이영화 넘꼭 보고싶습니다.
    오 으~저도 그런 품위를 지키는 멋있는 사랑을 넘꿈꾸고 싶오요!ㅎㅎ
    그런데.. 때론, 관습을 뛰어넘은 사랑을 꿈꾸기도 하고 또 하고 싶어하는것 같습니다.
    시대가 넘변해서 그런지..ㅎㅎ 농담입니다.
    여인님 안녕하셨어요.
    더운여름 더 시원하게 보내시고 행복하세요..~~
    └ 여인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본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한번 보시지요.
    날씨가 점점 따끈해져 갑니다.
    마음 만이라도 건강하게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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