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5/23 18:59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코타키나바루에 가 보신 적 있습니까?"
"아니요."
"거기에 가면 한국음식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요?"
"주인 아주머니가 굉장한 미인이지요."
"......!!?

우리는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꿈꾸는 데 익숙하지만, 지금 여기를 바라보지 못한다. 현재를 기억하고 기록할 수 없는 서글픈 숙명을 지녔으면서도, 과거 또한 제대로 살지 못했기에 단지 추억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론가 가지만, 결국 아무 곳에도 도착하지 못한다. 단지 끊임없이 갈 뿐이다.

대학교 때 축제를 딱 한번 갔을 뿐이고, 가을에 있던 대학 간 경기대회도 딱 한번 관전했다. 그 외의 시간은 열차와 시외버스 아니면 낯선 읍의 여인숙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의 병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 또한 여행이라면 입원 중에라도 벌떡 일어나 가방을 챙기실 정도였기에, 배낭을 꾸리면 자식이 어디론가 떠남을 알았고, 며칠 후 집으로 돌아와 팽개친 수건처럼 꾸겨져 깊은 잠을 잘 것을 아셨다.

직장생활이 무엇보다 괴로웠던 것은 여행을 마음대로 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직장생활 일년이 지나고 물경 8일이라는 연차가 나왔다. 그리고 7월초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6일의 하기휴가(당시는 무급휴가였음)를 신청하였다.

그러나 어디로 갈 지, 누구와 갈 것인지 모든 것은 미정이었다.

7월이 되자 임원항(삼척부근)에서 울릉도까지 세시간에 주파하는 쾌속선 항로가 뚫렸다는 광고가 나왔다.

결국 강릉 가는 첫 고속버스를 홀로 탔다. 강릉에서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임원에 도착하자 승객들은 이미 탑승을 하고 있었다. 소변 볼 여가도 없이 올라탄 배는 엔진소리를 내며 떠나기 시작했다.

쾌속선의 진동은 심했다. 웅웅거림과 진동으로 등이 따가웠다. 배가 한참 난 바다로 나가자, 날치들이 뱃전을 스치고 총알처럼 바다 위를 나는 모습이 보였다. 선창으로 둘러보니 사위가 모두 바다였다. 섬도 없는 깊은 바다 위에 떠 있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잔잔한 두려움, 그리고 홀로 가는 여행. 배가 항로를 이탈한다면 하염없이 흘러 태평양으로 나갈 것이라는 망상에 휩싸였다.

엔진의 진동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 울릉도가 보였다. 파도의 포말과 은은한 안개 속으로 백여 미터에 달하는 단애를 드려낸 섬은 분명히 숨쉬고 있었다. 거대한 동물처럼 숨을 토하고 고독에 지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배가 섬을 반 바퀴 돌아 저동 항으로 들어섰다.

저동항의 방파제 너머로 널빤지로 잊대어 만든 하꼬방들이 해풍에 찌그러질 듯한 모습을 보며, 도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달리는 듯 언덕을 넘더니 그냥 서 버렸다.

그 곳이 도동이었다. 항구까지 삼사백 미터 남짓의 계곡에는 탑을 쌓듯 집들이 옹기종기, 얼기설기 뭉쳐져 있었다. 맨 아래에 있는 집의 한쪽 기둥을 뽑아내면 동네 전체가 폭삭 주저앉을 듯 했다.

방을 정하고 나서, 도동을 둘러보았다. 식당 둘 셋, 다방 하나, 가게 몇 군데, 그리고 목욕탕이 있었다. 그것으로 도동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버스가 돌아 선 도동의 끝에서 선착장까지 발걸음을 세면 오백 발자국을 넘지 못하리라.

민박 마당에서도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앞, 옆, 뒷집이 시야를 가리고, 세면을 위하여 만들어진 듯한 마당 위론 플라스틱 스레트가 하늘마저 가렸다.

다음 날, 울릉도를 도는 유람선을 탔다. 8시간짜리의 유람선의 선장은 “오늘 같은 날의 바다를 울릉도에선 장판이라고 합니다”한다. 바다는 호수의 수면 같다. 때론 햇빛이 맑은 해면으로 굴절을 일으켜 노란 띠와 같은 것이 심해로 흘러 내려간다.

1983년의 울릉도는 일주도로의 공사가 막 시작됐던 때였다. 부분 부분 암벽에 시멘트를 이겨 붙인 곳은 있었으나 대부분 민짜의 벼랑이 유람선을 위협하듯 늘어서 있다.

배를 타고 가면서 울릉도가 공도였음을 불현듯 기억했다. 조선 세종 조까지 정착 주민이 있었으나, 왜구의 출몰로 치안에 애로가 있어 본토로 주민을 이주(도민쇄환령)시켜 공도(島)가 되었다. 그러던 것이 구한말이 되어 국제정세가 급박하게 바뀌자, 이 불모지에 16가구 54명을 강제 이주(1883년)시켰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러니 내가 간 때는 민간인이 이주한 지 한 세기가 지난 셈이다.

선실에서 깜빡 졸았던 모양이었다.

기적이 울렸고, 섬의 서면의 선착장에 배는 접안하고 있었다. 큰 황토구미라고도 불리는 태하였다. 울릉도에는 드문 백사장이 있었다. 개울과 몇 포기의 벼를 심을 수 있는 뜰도 있었다.

사람들은 7월의 뙤약볕을 가리기 위하여 양산을 펼쳐 들거나 손으로 눈 위를 가리면서 작열하는 태양으로 하얗게 바랜 성하신당으로 가는 골목길을 걸었다.

예전에는 태하가 군청소재지였다고 한다. 제법 돌로 쌓아 올린 담도 있고, 동백나무며, 향나무도 있어 동네가 아늑했고 살만해 보였다.

도민쇄환령 시기에 안무사 김인우가 도내 전반에 대한 순찰을 마친 후, 잠을 자는 데 해신이 나타나 동남동녀를 놓고 가라 했다. 아무도 없는 섬에 어린 아이 둘을 놓고 떠난 수년 후 다시 돌아와 보니 둘이 이미 백골이 된지라 고혼을 달래기 위하여 사당을 지었다 한다. 그 사당이 성하신당이며, 울릉도에서 제일 염험이 있다 하여 농작, 어업, 새 배의 진수 때에 여기에서 제사를 지낸다 한다.

전설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으며, 배고픔과 외로움, 비바람이 몰아치는 고도에서 어린 아이들 둘이 죽기까지 얼마나 처절했을까 했다.

선장은 한 시간 후에 출항할 테니 점심이나 하라고 했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 관광객들은 삼삼오오 어디론가 가는 데, 나는 혼자였다.

홀로 여행하는 것에 이골이 날 만도 한 데, 그리고 홀로 여행을 할 때의 홀로됨을 즐기기도 했건만, 때론 몸살하듯 외로움이 몰려오곤 했다.

태양이 뜨거워져 하얗게 달구어진 길바닥 위에 서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가게에서 담배와 빵을 샀다. 다방으로 들어가 그림자 속에서 커피를 시켜 빵을 씹어 먹을 생각이었다.

빛을 피하러 들어간 다방 안은 후끈했다. 바다 쪽으로 난 조그만 창을 통하여 수면에 반사된 빛이 폭양처럼 쑤시고 들어와 서너 평의 다방 안은 창 밖처럼 밝았다.

다방 안에는 나와 여자 종업원 단둘이었다.

냉커피를 시켰고 빵을 먹으려 하는 데, 카운터에서 여자 종업원이 턱을 괴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빵을 먹을 수 없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바닥에 남은 얼음을 한 알씩 깨 물으며, 그녀가 다른 곳을 보기를 기다렸다.

여자는 계속 나를 바라보았고, 그 눈길에 빵을 못 먹게 되자 허기가 몰려왔다.

여자의 눈 길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좁아터진 다방의 이 곳 저 곳에 괜스런 눈길을 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밖의 폭양보다는 덜덜거리지만 선풍기 바람을 쐬며 불편한 여자의 눈길을 감수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배낭에서 책을 꺼냈다.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하자, 그녀는 내 앞에 와 앉았다.

“학생이지요?”

학생이 아니었건만 귀찮아 책에 고개를 박고 그렇다고 했다.

“혼자 왔어요?”

나는 이 여자가 시골다방의 레지가 그러듯, 매상을 올리기 위해 차 한잔 사달라고 그러는 줄로 알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 그녀의 눈을 마주 할 수 있었다. 망연한 것 같기도 하고, 흥미가 깃든 것 같기도 한 그녀의 눈을 보면서 그녀가 예쁠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혼자 왔다고 말한 후, 얼굴과 목, 어깨 선들을 따라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관찰했다. 그리고 우습게도 섬마을 처녀와 도시의 청년, 다방 레지와 회사원 등등의 이른바 쏘시얼 포지션을 저울질하면서 거만해지려고 노력했다.

한갓 다방 레지라고 다방에 들어설 때엔 안중에 두지 않았지만, 지금 눈 앞에 있는 여자는 가슴이 떨릴 정도의 미인이었다.

“서울에서 왔지요?”

여자는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의 권태로움으로 느릿했지만, 그 속에 깃든 차분한 숨결과 가슴이 조용히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도동은 어때요?”

그녀는 그 조그만 태하에서 몇 년 째 벗어나질 못했다고 했다.

반경 오백 미터 만 벗어나면 미륵산의 험한 사면과 밀림이 버티고 서 있으며, 몇 발자국 만 걸어도 바다였다.

하루에 한두 번 유람선이 도착하면,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고 때론 다방에도 들르곤 했으나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다가 가곤 했다. 나처럼 홀로 이런 숨통 막히는 곳에 오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나는 조용히 여자의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다. 아니 그 보다 해변에 밀려드는 파도소리와 느릿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른함에 취했을 지도 모른다.

“승객 여러분! 태창 5호 선장임 미다. 배가 곧 떠날 예정이오니 빨랑들 오세요!”

유람선 선장은 핸드마이크로 골목에서 배로 가는 길에 몇 번이나 소리를 쳐 댔다. 나는 배낭을 챙기고 나갈 준비를 했다.

여자가 내 손을 잡았다.

“저어기~ 나랑 이야기 좀더 하다 가면 안돼요?”

나는 일어서려다 다시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아예 내 옆 자리에 와서 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내 팔을 껴안았다. 여자의 몸에서 레몬향내가 났다. 흔하디 흔한 향내. 그 냄새를 나는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었다. 사랑했던 여자에게서도 같은 냄새가 났다.

사람들이 골목길을 통하여 선착장으로 가면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점차 희미해지고, 나는 배가 떠나기를 기다렸다.

“다음 배는 언제 오지요?”

“삼일 후! 어쩌면 내일이라도 유람선 하나가 들어올 지도……”

삼일 후라? 삼 일은 긴 시간이었다. 일요일을 끼워 8일간의 휴가, 그리고 휴가는 일년 후에나 다시 돌아온다. 이미 지난 이틀, 그리고 삼일. 남은 휴가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날들이 될 것이며, 그 후로는 사무실에서 기나긴 여름과 가을 그리고 나날들을 보낼 것이다.

내 팔을 껴안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오래 된 연인과 같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여자를 사랑하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내일이면 어김없이 새벽이 올 것이고, 선착장에 나가 배가 들어오는 것을 하염없이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태하, 큰 황토구미에서 어디론가 나갈 길은 닫혀 있으며, 세상의 끝이라는 것을 알 것 이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리다가 다시 도동으로 배를 타고 돌아가고, 또 육지로 가서 서울로 돌아갈 것이다.

삼일의 시간은 나에게 던져진 시간이었다. 머무른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세상의 끝에서 외로운 여인과 나의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이야기하고, 해조음과 벗하며 조금씩 가슴을 열고 사랑을 이야기 한 후, 떠나 버린다는 것이 무서웠다. 아니면 영원히 이 곳 세상의 끝에서 살면서 심심한 그녀가 외로운 관광객을 붙들고 수작을 나누는 것을 질투의 눈으로 보게 될 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이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허기를 느끼며 배낭을 들고 선착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막 떠나려는 배의 선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망상의 미로에서 깨어난 듯, 다시 찾아 온 심드렁한 일상을 맞이하며 안심을 했다. 그리고 창랑한 물결과 맑은 하늘을 즐기기로 했다.

허기를 느끼며 배낭에서 빵을 꺼내 들었다. 배는 조그만 방파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태하의 좁은 해안이 보였다. 마을이 보였다. 그리고 그 한 쪽 귀퉁이에 다방이 있었다. 창이 보였다. 창에는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손을 들어 천천히 흔들었다. 나는 배가 곶(串)을 지나 태하가 눈에서 지워질 때까지 보았다.

우리는 어디론가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착하지도 못한 채 떠날 뿐이다. 그래서 기항지는 없고 단지 세상을 배회할 뿐인 것이다. 그래서 무수한 예언자와 전도사가 있다. 거기에 가면 무엇이 있노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무엇이 있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안녕! 태하”라고.

20030322 작성함

도동으로 돌아 온 나는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다음날 아침 출항하는 배표를 끊었다. 저녁이 되자 폭풍경보가 내려졌고 자정부터는 비가 억수로 쏟아 붙기 시작했다. 민박에 있던 사람들은 좁아터진 마당으로 몰려나왔다. 이 방 저 방 사람들이 통성명을 하고 평상 위에 엉덩이를 반쯤 올려놓은 채, 술을 나누기 시작했다. 마을의 다방이나 식당에는 할 일없는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자리가 없었다. 이틀이 지나자 사람들은 날씨를 저주했고, 삼 일이 지나서야 포항으로 가는 배가 기적을 울렸다.

20040523 추가함

울릉도 일주도로를 마무리할 마지막 터널은 금년에 뚫렸다. 터널 내부공사 등을 끝낸 내년(2018년)부터 통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1962년에 기본계획을 세우고 1976년 공사에 들어갔으니 조그만 섬에 일주도로 하나 세우는데, 거의 일갑자에 가까운 공력을 들인 셈이다.

2011년 여름, 지방 소도시의 지점장으로 발령이 난, 고등학교(1학년 2반은 아님)와 대학의 같은 과 동기인 친구를 찾아갔다. 저녁을 먹고 관사로 돌아가자, 친구는 울릉도 태하 것이라며 오징어를 꺼내왔다.

"작년에 고등학교 동창들이 울릉도에 갔잖아?"
"으응, 동규가 '의형제' 흥행에 성공한 기념으로 동창들 데리고 갔던 그 여행...?"

친구는 그때 태하의 덕장에서 먹었던 오징어의 맛에 반해서 그 후로 태하의 오징어를 주문해서 먹는다고 했고, 동규과 함께 갔던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내가 갔던 1983년 여름, 태하에는 오징어 덕장은 없었다.

"예전에 내가 갔을 땐 오징어 말리는 것을 볼 수 없었는데...?"
"울릉군청소재지가 본래는 태하였는데, 왜 도동으로 옮겨갔는지 알아?"
"왜 옮겼는데?"
"손바닥 만 하지만 농사지을 땅도 있고, 뭍에서도 가까와 군청소재지로 최적이지만, 그 쪽 바다는 바람이 심하데. 농사 만으로는 입에 풀칠을 할 수 없고, 고기를 잡아야 하는데, 태하에서는 바람 때문에 안됐던 것이지. 그래서 바람이 잔잔한 도동과 저동으로 이주했고, 밤이면 집어등을 켜고 오징어나마 잡을 수 있었지. 니가 갔을 때는 태하까지 도로가 없었으니 오징어 말리기 좋은 바람이 있어도 덕장을 낼 수가 없었을 테지."

술에 취했는지 나는 동규와 함께 보냈던 고등학교 시절과 큰황토구미에서 있었던 그 전설같은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었고, 녀석에게 울릉도에서 동창들과 함께 했었던 이야기를 묻고 또 물었다. 친구의 이야기 또한 술에 취해서 횡설수설로 변했다.

그 날밤도 태하등대는 등질 섬백광으로 25초에 1섬광을 주변 50Km 바다 위에 뿌려댐으로 지나가는 선박들에게 항로를 표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울릉도 기점 90Km 거리에 있는 독도까지 닿기에는 아득하여, 빛은 마침내 어둠 속으로 스몄고, 결국 나도 친구도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말이야... 울릉도에선 재미있었어?

20171217 추가함

2004/05/23 18:59에 旅인...face
2004/05/23 18:59 2004/05/23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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