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언어)에 체했다. 한 밤 중에 내린 눈길을 거닐며 속이 쓰렸다. 어제 오후는 도시의 창과 벽 위로 두시간 남짓 겨울의 낮고 눈부신 햇빛이 눌러 붙어 있었지만, 말에 체한 나는 그 아름다움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집 근처의 지하철 입구로 올라섰을 때, 야음을 틈타 안개가 도시의 외곽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가로등불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성애처럼 얼어붙기 시작했고, 쓰린 속을 다스리며 잠든 밤중에 기어이 눈이 내렸던 모양이다.

한의원에 가서 며칠동안 침을 맞고 약을 먹었지만, 먹은 것 때문이 아니라, 말에 체한 속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다.

처음에 말은 바람 결에 스쳐지나는 것이었다. 단순하고 조악한 몇몇개의 의미들이 파편처럼 덜거덕거리며, 두려움과 분노와 기쁨과 기대감 등을 나타냈을 것이다.

바람을 잡아 말을 대나무 조각이나 천과 피륙조각 위에 가둬두기 시작하면서, 말은 정교해지고 뚜렷한 실체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직선은 직선이 아니며 ‘두 점 사이를 잇는 가장 짧은 선’이야말로 직선이라고 한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믿을 수 없는 반면, 말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사랑한다> 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말이 가진 실체를 찾기 위하여 왜?, 언제부터?, 얼마만큼?, 어떻게? 등을 여지없이 묻게 마련이며, 법정에서 준엄한 심판을 받는 사람처럼 그것들을 말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아름다움과 기쁨과 슬픔과 사랑 등에 대해서는 표현할 길이 없다. 그것들은 태초의 말처럼 바람 결에 스쳐지나며 늘 변화하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라는 말보다 <사랑했다 그리고 사랑할 것 같다>가 정확할 것이다.

사람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하염없이 표현하고 그것을 진실 혹은 진리라고 하며, 또 누군가는 허위요 거짓이라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이 둘 사이를 판별하는 수단은 단지 믿음 밖에 없다.

그러니 믿음은 차라리 냉혹하기도 하다.

사형수들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교수형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죄를 지었다는 배심원들이나 판사의 믿음 때문에 죽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실의 정서적 실체와 사건이 있었던 그대로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된 자료와 언어들이 짜여진 논리적인 정합성에 입각하여 가장 단순하고 견고한 그림이 그려지는 것에 만족하고 표를 던지려는 당신들의 단순한 믿음에 대하여 싸우려는 것은, 이 세상에 범람하고 있는 무한한 언어들에 대하여 투쟁하는 것이며, 그러한 언어와의 투쟁에 대하여, 내가 들 수 있는 무기란 우습게도 언어일 수 밖에 없다는 것에 좌절합니다. 당신들은 창 밖의 저 아름다움을 그대들은 어떤 언어로 표현할 것이며, 세상에 모든 흘러가는 것들을 어떤 언어로 잡아두실 것인지요? 당신들이 말하는 모든 말들은 사랑한다 라는 입에 발린 말처럼 달콤하지만 결국 빛바래고 희미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었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