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5/26 18:37 : 그리고 낯선 어느 곳에

여행을 떠난다. 어제 저녁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아예 풍경을 지워버렸다. 차에 시동을 걸기 전 비가 이렇게 내리는 데 왜 가느냐고 아내가 핀잔이다. 식구를 내팽개치고 가는 여행. 아내도 함께 갈 사람이 없어 방에서 날을 보내는 것보다 차라리 친구와 함께 가는 것이 낫다고 가라고 했다.

지하철 역에서 친구를 태우고 중부고속도로로 오른다. 영동고속을 지나 중앙고속에 접어드니 산과 땅들이 빗줄기와 골안개 속에 수채화로 녹아난다.

담양에서 중앙고속도로를 벗어났다. 국도로 가자는 친구의 말에 이미 오래된 길이 된 죽령 이차선 고갯길로 접어든다. 일년 전만 해도 줄줄이 늘어서 그 길을 헐떡거리며 오르던 레미콘 차량이며 승용차들은 간 곳 없고 호젓한 산책길 같다. 예전에는 재를 넘는데 삼십 분도 짧았는데, 오 분도 안되어 휴게소 옆을 지난다. 휴게소는 중앙고속도로가 생긴 후 지나는 차량이 없는 지 쇳대를 걸어 잠그고 시커먼 유리창만 보여준다. 이미 비는 그쳤다.

부석사! 항상 영주에서 풍기를 지나 죽령을 오를 때면 다음에는 꼭 들러보리라 했던 그 곳이 여행의 첫 기착지이다. 국사 교과서에 나오고, 뜨는 돌이 있다 하고, 배흘림 기둥이 좋다는 그 곳은, 항상 지나는 길 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가기를 포기하곤 했었다.

여느 절과 같겠거니 산길을 오르다 보니 가람의 배치가 계단식으로 되어있다. 축대를 보면 오래된 부분과 새로 복원한 부분이 확연히 구분되는 데, 낡은 부분은 암석들의 크기가 큼에도 축조가 치밀하고 바윗돌마다 녹이 슬고 이끼가 끼어 연륜을 느낄 수 있는 반면 새로 축조한 부분은 엉성하다. 계단을 오른다. 계단석이 여유롭게 정에 맞아 약간은 휜듯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이 잡혀있다. 계단을 오르면 거친 돌의 표면이 발을 잡아주는 포근함이 있다. 치밀한 가공으로 정제된 매끈한 계단을 오를 때 느끼는 약간의 미끄러움과 탄력 없는 딱딱함과는 다른, 걸어 오르는 즐거움이 있다.

드디어 안양루 밑으로 무량수전의 앞 마당에 이른다. 우리의 뇌리에 너무도 알려져 있어 상상 속에 거대한 잔영을 남겼던 무량수전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그러나 다시 앞 마당에서 보는 무량수전은 그 크기가 한 눈에 보기에는 크다. 마치 예전에 대한극장의 70미리 스크린을 세 번째 줄에서 보는 느낌과 같이 건물이 약간은 휜듯한 느낌을 준다.

무량수전에 대한 글을 좀 읽은 바, 자세히 본다. 여태까지 읽었던 글은 떨쳐버리고 내 나름대로 보자. 심플. 이것이 무량수전의 비밀이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심플. 그러면서도 모든 선과 약간의 운치를 살려낸 정교성에 무량수전의 비밀이 있었다. 이는 봉선화 물이 손톱 끝에 남아 있는 여인의 섬섬옥수와 같은 아름다움이다. 주춧돌에서 배흘림 기둥과 들보와 지붕을 받쳐주는 주심포까지 화려함은 완벽하게 여과되었지만 빠지고 균형이 흐트러진 곳은 한 곳도 없다. 심플에서 노블로. 무량수전을 한번 둘러본다. 기둥과 창의 격자들에 옷 물을 들인 듯 꺼먼 기가 있지만 나무들이 적송인 듯 붉은 기가 보인다. 사찰건물이 보여주는 단청은 없고 세월이 기둥을 스쳐간 균열과 색조들의 은은한 변화 만이 있다. 서방극락정토불인 아미타여래는 앞 뜰을 내려다 보지 않고 무량수전의 서쪽 한 켠 어둠 속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 達磨西來意?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보다 더 좋은 것은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서서 아래를 보는 것 이렸다. 동편 두 번째 기둥에서 보는 소백산의 연봉들이 비가 그친 오후 속에 남쪽 하늘 끝까지 이어진다.

무량수.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숱한 나날들의 삶. 모든 경험들의 총체가 과연 해탈로 인간을 이끌 수 있으랴? 예토의 세계에서 정토의 세계로 간다면 무량수를 이룰 수 있을까? 아니면 윤회하는 카르마, 번뇌의 업장의 흐름이 무량한 세월에 걸친다는 뜻인가?

무량수전의 옆의 떠 있는 돌(浮石)을 본다. 그리고 안양루 밑을 통하여 사바세계로 내려간다. 올라올 때 푸근한 느낌의 계단은 어지러울 정도로 가파르다. 무량수전을 몇 번이나 되돌아보며 차로 되돌아온다.

하회마을로 향한다. 봉화를 지나고, 도산사원을 스쳐 지나고, 안동을 지나 물도리동으로 든다. 대학시절 봉산탈춤에 빠져 있던 국사학과의 여자친구가 몇 번이나 하회탈춤을 보러 가자고 했으나 가보지 못했던 곳이었다. 비가 그치고 마을은 칠월 염천에 뜨겁게 익어가고 있다. 토담으로 이어진 마을 길을 따라 지붕이나 솟을 대문을 보며, 물도리동을 감싸는 강가에서 간고등어로 저녁을 먹고 주왕산으로 향한다.

운전을 하면서 이미 사라 브라이트만의 노래를 몇 번이나 들었다. 친구나 나나 아무 예정 없이 가다 보면 불현듯 갈 곳이 있으리라고 작정하고 떠난 여행.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먼지마냥 가기로 한 여행. Dust in the wind!

눈을 감는다, 오직 순간의 오고 감을 위하여. 모든 꿈은 신비로움으로 눈 앞을 스쳐 사라지고, 아 바람 속의 먼지여! 그 모든 존재는 바람 속의 먼지일 뿐. 낡은 음악 같은 것. 망망한 대해 속에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재가 되어 땅으로 돌아가는 것, 비록 그것을 보기를 거부한다 하여도. 아 바람 속의 먼지여! 우리의 모든 존재는 바람 속의 먼지일 뿐. 애달파 말아라. 대지와 하늘 외에 영속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나니. 시간은 미끄러져 사라지고 네 모든 돈으로도 단 일분도 살 수 없는 것. 아 바람 속의 먼지여! 우리의 모든 존재는 바람 속의 먼지일 뿐…(곡의 가사)

누구의 노래였을까? 싸이먼과 가펑클? 팝페라 가수 사라 브라이트만의 맑은 목소리로 다시 들어보는 즐거움이 있다.

가는 길에 하회마을 옆 병산서원을 들른다. 이미 시간이 지나 서원의 문은 닫혔고 서원 앞을 흐르는 강 가로 내려가 모래를 밟으며 강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주왕산에 도착하니 벌써 9시 30분이 지났다.

2002.07.23일 여정 끝

2004/05/26 18:37에 旅인...face
2004/05/26 18:37 2004/05/26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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