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5/25 17:17 : 그리고 낯선 어느 곳에

시간이 있으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누군가 물으면 답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돈도 있다면 “여행을 하겠다”고 주저없이 말하리라.

돈도 없이 하는 여행은 방랑이 될 것이다. 나이가 들어 머나먼 타향 땅에서 낯선 집의 문을 두드릴 용기가 없고 더구나 입을 벌리고 있는 식구가 있는 한에서는 찬 이슬을 밟으며 주유 삼천리는 가당치 않다. 그러나 헤세의 ‘지와 사랑’이나 아니면 박목월의 나그네를 읽으며, 교실 문 턱을 넘어 망망한 방랑의 자유를 향해 떠나고자 하지 않은 젊음이 있었던가?

시간과 돈이 있으면 주색에 탐하겠노라고 할 지라도 전날 숙취에 지쳐 곤한 오전을 지나면 치졸하고 지분 내 등청하는 밤과 밤이 이어질 뿐 숨막히는 사랑의 짜릿함도, 쾌락의 혼곤함도 지친 새벽 속으로 침몰하고 도시의 심드렁한 뒷골목에 어제와 같은 아침이 밝을 뿐이다.

할 일이 없는 토요일. 망연히 아침을 맞이하고는 바다를 생각했다. 그리고 음악과 커피를 생각했다. 짙은 녹음과 멈추지 않는 길을 욕망했다. 그래서 친구를 불러 차에 시동을 걸었다.

추암에 가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목적지를 만들고 그곳으로 간다는 것은 지겨운 것이다. 단지 흐름에 따라 하염없이 가는 것이 그 순간 순간마다 흥미를 돋우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싯점이 지나면 머무를 곳을 정해야 했기에 정선으로 접어들면서 추암으로 가기로 했다.

추암을 가기 위해서 퇴촌, 남종, 양평, 횡성을 지나 중앙고속으로 다시 영동고속으로 타고 가다, 진부에서 정선, 동해 등지를 전전했다.

한비야가 도보여행에 좋다고 한 진부에서 정선까지의 길과 친구에게 보물처럼 보여준 팔당호로 침몰하듯 남종을 짓쳐 흐르는 지방도로. 친구가 산골의 고즈넉함에 매료되었다는 횡성가는 길, 그 길들을 지나면서 길들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를 할 수 있었다. 길은 머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기 위해서 있다는 아주 자명한 진리, 그래서 아쉬운 풍경과 머물고 싶은 순간들을 아낌없이 내던지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 길로 되돌아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우리는 삼화사 무릉계를 놓아두고 동해로 접어들었고 결국 추암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내가 그곳에 처음 들린 때가 총각 때이니 십오 년 이상 됐을 것이고, 두 번째 찾은 때가 아들이 째죽거리며 걷던 때이니 십 년이 넘었으리라.

이십대 후반에 아직 여행의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 아담한 해변을 알고 싶었다. 짧은 백사장에 조그만 부두가 있는 곳, 언덕에는 함석으로 내리누른 짜부라진 집들이 나무그늘에 빛 바래가는 어촌과 함께 하고 해풍이 쉬임없이 흐느끼는 곳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강릉에서 울진을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 길섶에 ‘추암해수욕장’이라고 누군가 뺑끼로 눌러 쓴 판자때기를 보고 차를 세웠다. 그리고 한참을 걸어 동해선이 지나는 굴레방다리 밑으로 해수욕장에 당도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그리던 조건 중 부두를 제외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아담한 해수욕장이었다.

추암은 동해물과 백두산이~에서 해가 뜨는 장면의 그 곳이고, 조요한 바다 위를 배 저어가는 곳이다. 또한 겨울연가를 찍은 곳으로 내가 일박을 한 곳이 바로 최지우와 배용준이 머물렀던 곳이다.

촛대바위며 해암정이 있어 정다운 곳이며, 민박집 뒤로 돌아가면 동해항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십오년이 지나도록 변한 것은 없다. 넓지 않은 백사장에는 많지 않은 사람들이 서성이고, 해풍과 파도는 쉬임없이 가슴 속으로 밀려온다.

바닷가 해발 3미터 쯤에 위치한 민박집의 미닫이 문을 열어놓으니, 좌르르 바다 물이 방 안으로 밀려드는 듯하고, 오후 3시의 태양은 푸른 하늘과 창랑한 바다 빛깔에 지쳐 노랗게 바래고 있었다.

묵호항에서 회를 잡아 친구와 쐬주를 한 잔 하다가 그냥 잠이 들었다가, 새벽 두세시 쯤 불꽃놀이 소리에 깨어났다. 폭음소리에도 불구하고 새벽을 두드리는 파도소리가 차디찬 포말을 그리며 밀려오고, 거친 바다 속으로 다시 말려든다.

아직 일출은 멀었건만 파도소리는 살기에 분주했던 나의 심사를 처연하게 만들었고, 새벽공기는 잠에 취한 몸뚱이를 부추긴다.

잠을 자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보니, 많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십 년 전, 녀석을 만났을 때의 우리들의 치졸함이 생각나지만, 그 때보다 나아진 것은 없고 삶에 지친 얼굴로 자는 친구에게 “힘 내라”고 큰소리로 외치고 싶다.

다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자, 해변에는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일출을 기다리는 듯하여 친구를 깨워 차디찬 백사장으로 나아갔다.

해가 수평선에서 1쎈티 위부터 시작된다. 머나먼 동해에서 마저 공해에 찌들어 아침에 뜨는 해도 힘겨운 듯하다.

해가 오르자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우리는 식당에서 라면을 먹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다시 올 지는 기약할 수 없다.

차의 시동을 걸고, 음악을 켜고, 핸들을 잡은 뒤 앞에 놓인 길을 본다. 그리고 이 세상이 찬란함에도 우리는 무덤덤히 스쳐 지나지만, 때론 광막한 세상 속으로 나그네처럼 나아가 길 바란다.

2003.7.5~7.6일의 여행

2004/05/25 17:17에 旅인...face
2004/05/25 17:17 2004/05/25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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