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우스;Arius;Anomoios;Arianism

ARIUS(AD 250 or 256~336)

Homoios vs. Anomoios의 전쟁 : Homoousion의 승리

아리우스는 325년 니케아에서 그리스도가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기본 전제는 스스로 존재하며 불변하는 하느님의 유일성이다. 聖子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신성은 유일한 것이어서 나누거나 전가할 수 없으며, 신성은 불변하기 때문에 복음서에서 본 성장하고 변화하는 聖子는 하느님일 수 없다. 聖子는 無로부터 존재하게 되었으며, 시작이 있는 피조물이다. 聖子는 유한하고 존재 질서가 다르기 때문에 聖父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는 신이 될 수 없는 인간일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교 아타나시우스는 참된 하느님인 성자만이 사람과 하느님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그리스도교의 구속 개념을 훼손했다고 논박했다.

니케아 공의회(325)는 아리우스와 그의 교리를 정죄하고, 니케아 신조를 발표한다.

Homoousion to Patri!

이 공의회에서 예수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심판에 의해서 ‘인간이 아닌 神’이 되고 만다.

하지만 이는 아주 긴 논쟁의 시작이었다. 325년부터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337년까지 니케아 공의회 이후 축출되었던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은인자중 권토중래를 도모한다.

337~350년 정통 그리스도교도들에게 호의적이던 콘스탄스는 서로마 황제가 되었고,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호의적인 콘스탄티우스 2세는 동로마 황제가 되었다.

안티오크에서 열린 공의회(341)는 ‘호모우시온'(homoousion)을 삭제한 신앙 진술을 공포했다. 342년에 사르디카(지금의 소피아)에서 또다른 공의회가 열렸지만, 두 공의회는 소득 없이 끝났다.

350년 콘스탄티우스 2세가 제국의 유일한 군주가 되자, 정통 그리스도교도들은 박해를 받았다. 그때 극단적인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성자는 성부와 ‘같지 않다'(anomoios)고 선언한다.

이 아노모이오스주의자들은 357년 시르미움에서 자기들의 견해를 승인받는 데 성공하지만, 그들의 극단적인 주장은 성자가 성부와 ‘비슷한 본질'(homoiousios)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온건론자들을 자극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처음에는 이 호모이우시오스주의자들을 지지했으나 곧 입장을 바꾸어 성자가 성부와 ‘같다'(homoios)고 주장한 아카키우스가 이끄는 ‘호모이오스’주의자들을 지지했다.

360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우시아(ousia: 본질 또는 물질)라는 용어를 거부하며, 성자와 성부는 같다'(일체)는 신앙 진술을 공포한다.

그 후 아리우스파는 점차 쇠퇴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제2차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주의를 금지했고 니케아 신조를 재차 승인함으로써 아리우스주의는 사라지고 만다.

이 아리우스주의는 7세기말까지 일부 게르만 부족들 사이에서 계속 존속했다고 하며, 오늘날에는 일부 유니테리언파가 그리스도를 단순한 인간으로 전락시키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또한 그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아리우스주의자들이다.

여호와의 증인의 그리스도론도 아리우스주의의 한 형태이다. 그들은 아리우스를 여호와의 증인 운동을 시작한 찰스 타즈 러셀의 선구자로 여긴다.

우리는 이 논쟁을 통해서 왜 회교의 마호메트가 자신을 알라의 아들이 아닌 최후의 예언자, 즉 인간으로 머물고자 했는지 그 단서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