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6/28 11:00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기침과 함께 깨어나자 깜깜했다. 묵은 곰팡이 냄새와 같은 것이 났다. 스위치를 찾았으나, 어디에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누가 내 곁에 누워있었다.

여자의 남편일까? 그러나 숨소리가 거칠지 않았다. 어둠에 익기 위하여 눈을 뜨고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생각했다. 그냥 벽을 향해서 망가져 가고 있는 보잘 것 없는 한 사내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과 찌개가 무척 맛이 없었다는 것만 기억이 났다.

기침을 했다. 옆의 사람이 반쯤 일어나 나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방의 그림자 속으로 내려앉았다. 이불이 사이로 여자만 간직할 수 있는 미미한 물비린내가 났다. 비누냄새인지도 몰랐다.

파도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줌이 마려워 살며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깜빡깜빡 형광등의 불빛이 켜졌고, 불빛 아래 이불을 가슴까지 올린 여자가 앉아 있었다. 여자는 손을 합장하고 고개를 숙이며 아늑한 목소리로 뭐라고 말했다. 이불이 흘러내렸고, 여자의 벗은 가슴이 보였다.

놀랐다. 한동안 그녀를 마주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하다가, “잘 잤소?”하고 인사를 하고, 이내 “그런데 남편은?”하고 묻고 있었다.

여자는 드러난 어깨를 감출 생각도 않고 손가락으로 방바닥에 뭔가를 그리며 죄라도 지은 듯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저 남편 없어요.”하고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방에 함께?”하고 물었다.

여자는 대답을 않고 못 들었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왜 한 방에 아가씨와 있느냐는 거요?”
“이 집 방 하나 있어요.” 토씨를 빼먹고 여자가 말했다.
“방이 하난데 날 재워주셨다?” 헛웃음이 나왔다.
“아저씨 아팠어요. 딴 곳 가라고 할 수 없었어요.” 여자의 말이 이상했다.

처음으로 여자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어제 얼핏 본 것보다 젊었다. 피부는 그을었지만 얼굴 한쪽 구석에 귀티가 돌았다. 한국인이 아닌 것 같았다. 작은 얼굴에 이마가 높았다. 눈은 동그랗고 선량해 보여 언제라도 눈물을 흘릴 듯 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밤에는 아무 일 없었오?”

여자는 다소곳이 웃으며, “아무 일 없었어요. 자면서 많이 추워했어요. 그래서 아저씨 이불 속으로 들어왔어요. 아직 열 있어요. 더 자야해요.”

마당으로 나가 오줌을 싸고 돌아와 물을 달라고 했다. 여자는 몸을 빼서 문 쪽으로 갔다. 여자의 다리가 길었다. 물을 마시고 식은 땀 마냥 이불 속으로 쓰러졌다. 여자가 옆으로 깊숙이 붙어왔다. 여자가 손으로 나의 이마를 짚었다.

“아저씨, 열 많아요. 더 자요.”

여자의 젖가슴이 손끝에 닿았다. 그녀의 몸에서 파도가 깨지는 냄새가 났다. 체온이 따스했다. 마른 침을 삼켰지만, 서서히 나의 그곳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남쪽 바다의 따스한 조수가 내 몸에 다가와 조용한 포말을 그렸고 나의 몸을 파도가 껴안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마침내 숨막힐 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섬으로 갈 이유가 내게는 없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몸은 한결 나아졌다. 여자는 나가고 없었다. 방에서 나와 툇마루에 배낭을 올려놓고 여자를 기다렸다. 눈이 그친 바다 위의 하늘은 그지없이 높고 멀었다. 만의 끝으로 내륙의 자락들이 뚜렷했다. 길을 떠나기에 좋은 날이었다. 쌓인 눈에 반사되는 햇빛은 눈을 찌르고, 길은 미끄럽지만, 남해바다는 지평선 끝까지 맑아서 넓을 것이고 바다의 물비늘이 싱싱하게 반짝일 것이다.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을 때, 수건으로 치마 자락의 눈을 털며 여자가 들어섰다. 마당에 서 있는 나를 보고, 놀란 듯 여자는 문에 멈춰 섰다. 그녀를 보자, 없을 때 떠날 걸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모르는 채 하룻밤을 지냈을 경우, 아침이면 훌쩍 떠나고 잊어야 하는 법이다.

무심결에 지갑을 꺼내 서울로 올라가는데 필요한 돈만 빼고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럼 이만.” 목례를 하고 스쳐지나 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훅 불었다.

한낮인데도 도로 위의 차가 지난 흔적은 없고, 눈길에는 발자국만 찍혀 있었다. 눈길은 정오의 빛을 받아 발광을 하고 있었다. 뽀드득 뽀드득 걸으며, 갈 길을 정했다. 부산으로 갈까, 호남선을 탈까?

드르륵 문소리가 났다. 여자가 달려 나와 눈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라고 이야기하며 울었다.

어깨를 잡아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렀다. 여자의 눈물은 알 수 없었다. 아내의 눈물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말로 담을 수 없어 눈물이 흐르는 만큼 눈물은 가슴으로 받아야 했다. 나의 가슴은 메말라 울음을 늘 이해하지 못했다. 여자를 마주하고 그져 보기만 했다.

정오의 햇살은 따스했고, 도로의 가에서 눈이 녹고 있었다.

끼륵! 갈매기 한 마리가 처마에 스치듯 활공을 하더니. 끼욱끼욱 날개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이제 가야 해요.” 나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이 비장했다.

섬 뿌리의 그늘 밑으로 통통통 배가 지나고 갈매기들이 뱃전을 선회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한가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서울로 바삐 갈 이유란 나에게 없었다. 그러나 돈이 떨어질 것이다.

나는 돌아섰다.

“외로워요... 몹시 외로워요...” 등 뒤에서 여자가 말했다.

잠시 살을 섞었다고 여자의 외로움을 이해해야 된다는 법은 없다.

“자식이 둘이나 있고, 아내가 있어요. 그리고 난 오십이 다 된 사람이요. 아가씨는 젊어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거야.” 통속적인 영화처럼 말했다.

여자는 절망적으로 “어제 아저씨가 그랬어요. 저랑 산다고 했어요. 제발, 같이 살아요.”하고 말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술에 취했더라도 그런 말을 하진 않았을 거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자는 손을 나의 허리에 두르고 자신의 가슴과 얼굴을 나의 등에 살며시 기댔다. 척추를 따라 짜르르 전기가 지났다.

“그럼 한달 만이라도, 아니 일주일 만이라도, 아저씨. 그것도 안되면 오늘 밤만이라도...” 여자의 속삭임이 허파를 지나 내 가슴 속에서 울었다.

2007/06/28 11:00에 旅인...face
2007/06/28 11:00 2007/06/28 11:00
─ tag 
Trackback URL : http://yeeryu.com/trackback/6
◀ open adayof... Homo-Babiens ▶▶ close thedayof... Homo-Babie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