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25 13:32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언덕에서 내려왔을 때, 그녀는 방 앞 마루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방 안에 놓아두었던 <지상의 양식>이 있었다.

"어떻게 제가 있는 곳을 아시고...?"
"제가 말했잖아요. 여기는 좁다고..."
"그런데 어떻게?"
"아무래도 혼자 라면이나 끓여드실 것 같아서."
"그럼 아침도 사드리지 못했는데, 저녁은 제가 사도록 하죠."

해변에서 문이 열린 횟집을 찾았다. 그 곳으로 들어가 아무 회나 시켰고, 소주를 마셨다. 여자도 눈살을 찌푸려가며 술을 마셨다. 술이 들어갈수록 여자의 얼굴이 흐려졌고 말이 사라졌다.

말을 이어가려다, 여자가 불편해 하는 것 같아서 조용히 술만 마셨다.

"소병진이라고 아세요?" 느닷없이 여자가 물었다.

물론 알고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의 친구였다.

"잘 알고 있지요. 그런데...?"
"혹시 식구가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어머니, 아버지, 위로 형이 있었고, 아래로 여동생이 둘 있었는데...? 어떻게 병진이를 알고?"
"아까 제 이름을 지영이라고 했는데, 소지영이예요. 막내동생이지요."

그 이야기를 듣고 반말을 해야하는지, 계속 존댓말을 해야 하는지 막연했다. 그리고 두살 밑의 여동생은 가물가물 기억이 나는데, 막내동생은 너무 어려서 전혀 기억에 없었다.

병진은 친구였다. 알게 된 것은 중학교 일학년 때였다. 우리 반에 아버지가 참사인지 외교관인지 먼나라를 갔다 온 아이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바다 건너 먼나라는 신기했고, 놈의 눈은 맛있는 고기를 많이 먹어서인지 우리처럼 짙은 갈색이 아니라 색이 엷었다. 놈은 조용해서 누가 말을 걸어도 웃기만 했다. 내가 두번째 시험에서 반에서 이등을 하고, 전교에서 칠등인가 하자, 놈은 간신히 나를 친구로 받아들이는가 싶었다.

어느 날 녀석의 불광동 집으로 놀러 갔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석호야~"하는 소리가 대문에서 들렸다. 대문을 여니 복도에서 몇번인가 마주친 것 같은 병진이 서 있었다. 석호와 병진은 근처에 있는 사립학교를 같이 다녔고, 뺑뺑이로 마포에 있는 우리학교에 입학을 했다.

석호는 병진에게 나를 소개하며, "얘가 이번에 전교 칠등이라구. 병진이 넌 몇등이냐?"라고 물었다. 병진은 9등이었다.

놈은 다짜고짜 나를 보고, 국민학교는 어디를 나왔고 어디에 사느냐 등을 물었다. 기분 나빴지만, 석호의 친구라는 것 때문에 그냥저냥 대답을 했다.

그 후 시험만 끝나면 놈은 성적이 어떻냐? 전교 몇등이냐 등을 캐묻곤 했다. 한번도 놈의 성적을 묻지 않았지만, 전교석차로 내가 항상 이삼등 앞서고 있었다.

이학년이 되었을 때, 교문을 나서는 나를 붙들고 느닷없이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친한 사이도 아니었기에 별로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서강 쪽으로 이사 간 우리집에서 불광동은 너무 멀었다. 놈은 자기 집이 합정동으로 이사를 갔고, 우리집에서 멀지 않다며, 기어이 나를 이끌고 자기 집으로 갔다.

놈은 자기 방에 나를 끌어들인 후, 다짜고짜 피아노 뚜껑을 열고 피아노를 쳐대기 시작했다. 놈의 모습은 울뚝불뚝했고 좀 다혈질이었기에 피아노를 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음악의 음자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혼신을 다하여 피아노를 쳤다. 놈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그 옆에 앉아 연주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뽕짝이나, 합창이나, 피아노나 내겐 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가만히 듣고 있으니 건반을 두드릴 때 마다 수많은 빛들이 명멸하고 또 춤추며 그 방 안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놈의 연주가 끝났다. 놈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와락 껴안았다.

"고맙다!"

갑작스런 포옹에 나는 놀랐다.

놈은 남자새끼가 계집애처럼 피아노를 친다고 비아냥댄 놈은 있어도, 조용히 자신의 연주를 경청해 준 놈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고맙다고 했다. 또 그동안 나를 미워했다고 했다. 공부도 안하고 맨날 노는 것 같은데, 성적이 자신보다 좋다는 것에 짜증이 났다고 했다. 그래서 그만 나와의 성적 싸움을 포기했고, 넌 피아노를 치지 못하지만, 자기는 이화여대 교수에게 레쓴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음악의 음자도 모르고, 음악이란 따분한 것에 불과하지만, 친구의 피아노 소리를 들으니 아름다운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성적이 왜 그렇게 좋게 나오는 것인지 나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 날 이후, 놈은 나에게 멘델스존의 바이올린협주곡이나, 라흐마니노프,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등을 듣자고 했고, 나는 읽었던 소설같은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곤 했다.

우리는 뺑뺑이로 함께 동계진학을 했다. 그리고 합정동의 놈의 집 근처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중 2~3 때 뻔줄나게 드나들던 놈의 집에 가지 않았다. 놈도 우리 집으로 놀러오지 않았다.

그것은 나 때문이었다. 본래 나는 놈처럼 공부같은 것에 흥미가 없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하지 않아도 성적이 그럭저럭 나왔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더 이상 성적을 쫓아갈 수 없었다.

놈은 그런 나를 걱정했지만, 오히려 집요하게 공부를 해대는 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 일학년은 많이 남아있었고,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 밤거리를 돌아다니거나 때론 자전거를 타고 하루종일 변두리를 떠돌아 다니고, 수업을 빼먹고 학교옥상의 바닥에 누워 한 시간 내내 하늘을 보는 것과 같은 것들, 할 것들이 무척 많았다.

식사를 마치고 남은 점심시간동안 <변신>인가 하는 지리한 책을 읽고 있는데, 놈이 나를 불러냈다. 함께 옥상으로 올라가, 난간에 기대어 나는 건물 밑바닥에 침을 뱉았다. 침은 낙하하며 공기저항으로 확하고 펴졌다가 이층 높이 쯤에서 팍하고 깨졌다.

"너 왜 공부 안하는거냐?"
"니가 잘 알겠지만, 난 공부란 것은 해본 적 없어.
그리고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잘 몰라.
그리고 공부라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놈도 아니고."

놈은 조금 있다가,

"너와 나의 우정의 이름으로 부탁하는데, 제발 열심히 공부해서 같이 좋은 학교에 가자"라고 말했다.

놈이 그런 류의 말을 몇번이나 해 왔기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운동장 가에 둥치의 가운데가 잘려나간 포플러 나무들을 보고 있었다.

"니 말은 좋은 말이다. 우정 그런 것 말이야. 그런데 너 아니? 교장과 선생 새끼들이 짜고 저 포플러 나무를 이쑤시개 공장에 팔아먹었거든. 이제 운동장에 포플러 그늘은 사라지고 말았어. 나에게 아쉬운 것은 공부가 아니라, 그런 것들이지. 그 그늘 아래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가방을 깔고 낮잠을 잔다던지 하는 것은 그만 잡쳐버렸지. 배운 놈들이 하는 짓거리는 저렇게 잡스럽거든."

놈과 나의 우정은 그렇게 금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산보를 가거나 하교 길에 녀석의 창 가에서 잠시 서성이며, 피아노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곤 했다. 공부 때문인지 피아노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토요일 오후, 산보의 끝에 순교자의 무덤 위로 자라난 미루나무에 석양이 걸칠 때, 놈이 즐겨치던 '은파'가 들린다거나, 자신이 작곡했다며 나에게 제목을 만들어달라던 그 소나타 소리가 들려왔다면, 초인종을 누르고 놈의 방 안으로 뛰어들어가, 놈을 와락 안았을지도 모른다. 공부보다 놈이 아름다운 음악을 간직하기를 나는 바랐다. 그것이 나의 우정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놈은 서울대인가 하는 학교를 갔고, 나도 세칭 일류라는 곳에 배치기 턱걸이로 간신히 들어가기는 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녀석의 집이 이사를 갔고, 대학 사학년 때, 지하철 2호선 예정지 위에 놓여있던 그 집은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가 되었다. 하지만 놈이 어느 곳으로 이사를 갔는지 알지 못했고,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었다.

사라진 친구보다, 절두산 옆으로 끔찍한 교각이 놓이고, 노을을 가로지르며 지하철이 지나간다는 것이 더 애석했다.

그런 생각의 줄거리를 가다듬으며, 연거푸 몇 잔 마신 것 같다.

"병진이는 잘 지내죠?"
"오빤 미국에 있어요."
"결국 그럴 줄 알았는데, 경제학 쪽으로 계속? 박사학위를 땄을지도 모르겠네?"
"아뇨. 미국에서 회사 다녀요."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얼굴이 어두워보였다.

"어머니, 아버지는 건강하시죠?"

여자는 술잔을 홀랑 비운 후, "아빠는 이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엄마는 그럭저럭 지내시구요."라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돌아가셨는데 찾아뵙지도 못하고..."

여자의 표정이 석연치 않아 그만 말을 접었다.

형광불 빛이 새하얗게 내려앉은 창을 보며, 그냥 술을 마시거나 몇 점 남지 않아 무채가 드러난 회를 집어 간장에 찍어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참 희한한 인연이네. 이 먼 곳에서 만나다니... 그런데 나를 어떻게 알아봤죠?"

"어제는 몰랐어요. 아침에 다리 위에서 보았을 때,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아닐까 했어요. 하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어요.
그런데 장보러 갈 때, 이름을 말씀해주셔서, 정우씨가 누군지 알 수 있었어요."

여자는 오빠 친구인 나를 '오빠'라고 하지 않고, 굳이 정우씨라고 했다.

"그리고 말이죠?"

거기에서 여자는 말을 끊고 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의 촛점이 약간 흐려져 있었다. 왜 아는 체 않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자 물을 수 없었다.

여자가 다 마신 소주잔을 볼에 대고 고개를 떨구더니, 가슴의 막힌 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정우씨가...
아주...
오랫동안, 좋아했던 사람이었다는 것도...
기억해 냈어요."

여자는 다시 얼굴을 들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무너져 내릴듯한 웃음을 지으며,

"그리고 말이죠. 오늘 하루는 너무 행복했어요."

하고 자신의 잔에 술을 부었다.

지영의 웃음 끝에 어떤 서글픔이 엿보였고, 그 서글픔이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창 밑의 통풍창을 열었다. 좁은 창을 통해 우리 둘 사이의 침묵 위로 하얀 파도소리가 소복히 쌓였다. 차가운 밤공기가 스미자 괜스레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여자가, 아니 한 어린 소녀가 나를 좋아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무지 그 어린 소녀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 어린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린 아이가 가슴앓이를 하는 동안 나의 사랑은 어떠했던가? 약간은 아름다웠을지 모르지만, 그저 그런 것이었다. 아마 사랑이라는 것보다. 남녀관계라는 유희에 머물고 있을 지 모른다. 그런 유희 속에서 갈증과 애착을 느끼기는 했어도, 사랑의 확신은 없었다. 나는 사랑에 대하여 쓸데없이 생각을 하고 명상을 해왔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 다른 지 조차 몰랐다. 나를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그녀에게 몰입하고 헌신할 수 있는 사랑이 나의 가슴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좌절했다. 그 어린 수년동안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가슴이 터지도록 누군가를 사랑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불모의 가슴을 안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미소에서, 그 따스한 목소리와 그녀들의 체취 속에서 동일한 감정, 서글픔 만을 만났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을 잡지 못하고 떠나보냈을 뿐이다. 그리고 점점 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아무런 갈증도 없이 여자를 만났고, 단지 그들의 외모에만 집착하거나, 나를 사랑하게 될 즈음이면, 아무런 애착없이, 피곤하거나 이러저런 이유로 더 이상 만날 필요가 없다며 헤어졌다. 그렇게 나의 사랑을 메말랐고,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환상도 갖지 않았다.

지영은 술잔을 내려놓고, 기나긴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는 가슴이 아팠지만, 거부할 수 없어, 침묵 속에서 가만히 듣기만 했다.

여자는 자신이 그를 처음으로 본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라고 했다. 미술학원에서 돌아왔을 때, 거실에 자기만한 조그만 사내애가 있었다. 검정교복에 빡빡머리라서 오빠의 친구인 것을 알았다고 했다. 함께 저녁을 먹게 되어 말도 걸고 했는데, 수줍음이 많아 묻는 말에 예 아니오 정도 만 대답을 했고, 도무지 말이 없었다고 했다. 다른 오빠 친구들은 떼거리로 와서 떠들고, 자기를 놀려대곤 했는데, 그는 늘 홀로 와서 오빠가 피아노를 치는 것을 보고 조용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주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6학년이 된 여름 어느 날, 샤워를 하고 있었다. 그때 화장실 문이 열렸고, 오빠의 친구가 안으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란 그는 뛰쳐나갔고, 창피해서 울었다.

하지만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을 때, 더 이상 창피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문득 알았고, 가슴 속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 또한 붉어졌다. 손등으로 달아오른 볼을 식히며, 술을 더 마셔도 되냐고 물었다.

나도 갈증이 났다. 소주를 한 병 더 시켰고 서로의 침묵 속에 나는 그녀의 빈잔에 몇번 술을 채웠다. 그녀는 석잔인가를 거푸 마신 끝에 술잔을 탁하고 술잔에 내려놓은 후,

"아세요? 제 중고등학교 시절은 정우씨로 가득했다는 것을 요. 일기 속에는 정우씨에 대한 생각, 하고 싶은 말들로 가득했어요. 하지만 정우씨는 저희 집에 오지 않았어요. 등하교길에라도 정우씰 보고 싶었어요. 간혹 합정시장같은 곳에서 맞닥뜨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가슴이 벅차서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숨곤 했어요."

여자는 방바닥에 글씨라도 쓰는 듯, 바닥을 보며 손을 움직여가며 말했다.

"그렇지만 정우씨를 몰래 쳐다보는 것이 좋았어요. 홀로 강변을 거닌다거나, 날이 저물어가는 즈음에 산보를 즐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때론 집 앞 공터에서 개들과 노는 것을 보았지요. 그리고 합정동 위로 노을이 차오르면, 꼼짝도 않고 그것을 바라보던 모습도 기억해요."

거기까지 이야기를 한, 지영은 소주를 한잔 더 마셨다. 그리고 전신의 기운이 풀린 듯, 사르르 방바닥으로 허물어졌다.

긴 머리카락이 부채살처럼 퍼지도록 늘어진 지영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먹먹했다.

계산을 끝내고, 지영을 부축했지만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녀를 업었다. 몇번인가 쉬어가며 그녀의 방에 다다랐고, 자리를 깔고 그 위에 눕혔다. 

이불을 덮어주고, 얼굴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걷어올렸다. 술김 때문인지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지영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지만, 가슴앓이를 하던 어린 소녀의 모습은 아무리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불 밖으로 나온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이 따스했다. 손을 내 볼에 가져왔다. 손의 폭신한 열기가 얼굴 가득히 찼다.

방을 나왔고, 머리를 식히기 위하여 해변으로 나갔다.

전날과는 달리 축축하게 젖은 파도소리가 들렸다. 하얀 포말이 모래 위에 하얗게 깨지고 있는데, 내 귀에는 호수에 띄운 배의 뱃전과 노에 부딪는 물결소리처럼 들렸다.

아득하게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산다고 하는데,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해변에서, 기억하지도 못하는 한 여자를 만났고,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물론 어린 시절, 골목 저 편에 살던 분홍빛 체크무늬 원피스를 즐겨입던 여대생을 짝사랑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운동장에서 뛰어놀다 다친 여자친구의 까진 무릎에 바람을 불어주다 치마 밑의 속옷을 보고 안절부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발그레한 홍조와 함께 그런 기억은 흘러가게 되어 있다. 지영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내려보내지 못했다. 그것이 불행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린 가슴 속에 오랫동안 표류했을 대상없는 안타까움이, 애처로왔다.

그녀가 가슴 속에 키워왔던 나와, 지금 이 해변에 와 앉아 있는 나는 처참할 정도로 다르다. 하나는 아름다운 환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초라한 현실이다. 현실이 텀벙! 꿈 속으로 뛰어들면, 꿈은 사라지고 아름다웠던 것들은 시들고 마는 법이다.

잠시 지영의 환상을 그대로 남겨두기 위하여,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지영이 간직했던 그 세월들을 위하여 한번 만이라도..., 단 한번 만이라도, 그녀의 가슴을 꼭 껴안아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밤 하늘을 보았다. 별들이 보였다.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이 존재했다. 존재의 의미가 있다면, 시나 노래의 한쪽 구석을 장식하기 위한 정도인지도 모른다. 그 미미한 빛이 가늠할 수없이 먼 천공을 지나 어느 날, 낯선 해변에 닿았다. 어리석은 한 사람이 스쳐지나는 눈길로 그 빛을 맞이한다. 위대한 우연일지 몰라도, 아무 것도 아니다.

파도가 발 앞에서 허물어졌다.

"천년일지도 몰라"

입에서 무심결에 그 소리가 나왔다. 일어섰다. 방대한 어둠과 가늠할 수 없는 공간들이 해변을 향하여 쏟아져 내렸다. 엄습하는 어둠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무릎을 꿇고 말았다.

슬픔도 오열도 없이, 메마른 가슴 속에서 눈물이 솟았다. 마치 샘처럼 흐르더니, 좁은 가슴에 뚝이 터진 듯, 기쁨이나 잊었던 사랑, 엄마의 팔베개, 뚜껑을 열면 분내가 나던 오르골 소리, 볼거리에 걸려 까무러질 것 같은 열기에 찬 이마 위에 닿은 아버지의 차고 큰 손, 그런 것들이 채워졌고, 마음은 잔잔해졌다.

고요한 마음은 광활하여 지영의 가슴까지 가 닿은 것 같았다. 그녀의 가슴에 미소가 번졌고, 뚜렷하게 아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내일은 또 다른 기쁨으로 채워질 것을 알았다.

2008/06/25 13:32에 旅인...face
2008/06/25 13:32 2008/06/25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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