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27 15:06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다음 날 아침 나는 꽤나 분주했다.

북어국을 끓인다, 주인집에서 김치나 찬거리도 빌리고, 밥도 했다. 슈퍼로 내려가 햄과 골뱅이, 봉지커피를 산 후, 지영의 숙소로 가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혹시 어제 일로 아침 일찍 떠난 것이 아닌가, 방문을 여니 옷이며 짐은 그대로 였다.

한숨을 돌린 나는, 해변이며 마을 곳곳을 둘러보았다. 찾을 수가 없었다.

터덜터덜 다리를 건너다 혹시 해암정 근처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일에 떠밀려온 모래가 치워지지 않아, 정자 앞의 풀밭은 아무나 지나다니는 길이 되어버렸다. 정자 옆으로 돌아가니 지영이 있었다. 정자의 댓돌 위에 앉아 언덕과 해안선 사이의 바다를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젊은 여자가 담배피우는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처연했다. 입에서 나온 연기가 코 끝에서 말리다 공중으로 흩어졌다.

한동안 그 모습을 보다, "저기~"하고 인기척을 냈다.

지영은 나를 돌아다 보더니, 담배불을 바닥에 부벼끄고 두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옆에 가서 나를 보라며, 지영의 얼굴을 가린 손을 떼려고 했다.

"창피해요. 정말 창피해요."

술에 취해서 못들었다, 어제 한 말 그리 신경쓰지 마라, 술에 취해 한 소리인데 뭘 그러냐 하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날 밤 중에 해변에서 경험한 일을 나즈막한 소리로 이야기했다. 두서 없었지만, 별빛을 조우했고, 그 끝에 기쁨을 만난 것을 이야기 했을 때, 얼굴에서 손을 내리고 나를 보았다.

지영의 손을 잡았다. 손끝이 움찔하더니 다소곳이 내 손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지영씨의 가슴 속을 본 것 같은데... 그것은 미소였어요."

그렇지만 내가 느꼈던 <천년>에 대해서 말을 해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아직도 벅차서 뭐라고 말할 수 없으니 그렇다고 쳐두자.

"자아~, 아침을 차려놓았으니 그만 갑시다." 촉촉해진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방으로 돌아와 이미 식어버린 북어국을 다시 데우고, 식사를 했다. 북어국을 한숟가락을 맛본 그녀는 다시 한번 먹어보더니,

"희안한 맛인데, 어떻게 끓였어요?"하고 물었다.

맛이 없다는 소리겠지만, 자랑스럽게 북어포를 손으로 찢어서 물에 넣고, 라면 스프를 넣어서 얼큰하게 끓였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런 묘수도 있네요 하며 웃었다.

아무튼 우리는 아침을 마쳤고, 방문 앞 툇마루에 나란히 앉았다.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지영은 나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머리를 내 어깨에 살며시 기댔다.

"이 집 너무 좋네요. 마을두 보이구, 수평선 끝까지 다 보이구, 세상 끝까지 다 보이는 것 같아요."

그녀가 바라보는 눈길을 따라, 세상을 보았다. 아침 바다는 빛들이 명멸하지 않아 눈부시지 않다. 짙은 푸르름으로 세상이 들어찬 그 끝에, 어느 여름날처럼 뭉개구름이 보였다. 모든 것은 따뜻했고, 해변 마을의 울긋불긋하고 해풍에 어긋나 틀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이 수채화처럼 용해되어 또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우리는 서로 기댄 채 한동안 모든 것을 보았다. 그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을 때의 거친 기쁨은 점차 가라앉고, 고요가 찾아왔다. 아주 넓고 그 위로 빛이 가득했다. 내 손에 포개진 그녀의 손과 어깨에 기댄 그녀의 숨결로 부터, 그녀 또한 고요 속에 깃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수돗가의 대야를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밤이 되고, 새벽이 될 때까지 서로 기댄 채 그렇게 앉아 있었을 지도 모른다.

카르랑 하고 스텐 대야 끌리는 소리에, 번뜩 깨어난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웃었고, 그렇게 앉아 있기도 그래서, 삼척까지 한번 가보자고 했다.

삼척까지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간 곳이 삼척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버스를 기다리다. 언제 올 지 몰라 그냥 걷자고 했다.

9월말이라도, 국도 위에 떨어지는 햇볕은 자글자글 복사열을 피웠고, 끝물에 핀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흔들렸다. 스쳐지나는 시외버스를 바라보면서 가거나 서거나 하면서 그 길을 걸었다.

지영에게 오빠라고 하지 않고, 이름을 부르냐고 물었던 것 같다. 그러자 한번도 오빠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늘 정우씨였으며, 아직도 그렇다고 했다.

"만약 오빠라고 부르면, 정우씨는 쉽게 날 누이동생으로 여길 꺼 아니예요? 저는 정우씨의 누이동생이 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거든요."

지영의 표정은 고집스런 어린 아이처럼 단호했다. 내가 웃자,

"절 동생으로 여기면 절대 안돼요."라고 다시 말했다.

내 기억으로는 삼척은 국도가 언덕 밑으로 내려갔다, 고갯길을 올라갔다 하는 곳에 놓인 도시였다. 아카시아인지 느티나무인지 집과 건물이 수풀의 그늘 밑에 잠겨 있어서 호젓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다다른 곳이 삼척시 중심부가 아닌 변두리였는지도 모른다.

삼척을 둘러싼 산능성이를 보자, 어디론가 다시 떠나고 싶었다. 거기가 태백이거나 정선이거나 아무 상관이 없었다.

추암을 떠날 것이라고 했다. 내일이든 며칠 후든...

"절 내버려두고요?"

"지영씨는 학교로 돌아가야 되지 않나? 그리고 서울가서 연락을 할께요."

"안돼요. 어떻게 정우씨를 만났는데요? 그리고 저 휴학했어요. 그러니까 정우씨를 따라갈 수 있어요."

지영은 "운명이라는 것이 그런 것인가 봐요."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다음 해 2월에 노르웨이로 간다고 했다.

지영의 아버지는 카톤 박스 회사 사장이었다.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가전회사와 섬유회사 몇 군데를 납품하고 있어서, 제법 괜찮았다. 그래서 합정동에서 홍대 앞으로 이사를 갔는데, 개량가옥이 아닌, 마당이 넓고 석재와 나무로 지은 집이었다고 했다. 지영의 아버지는 가전제품 수요가 늘어나면서, 계속 공장을 넓혀갔다.

큰 오빠가 결혼하고, 병진이가 학위를 따러 미국으로 간 후, 아버지의 사업은 허물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는 병진이네 골판지의 강도가 높아, 두께를 얇게 해도 박스를 몇단 쌓아도 무너지지 않았고, 콘테이너에 좀더 많은 제품을 실을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골판지의 재질 탓도 있으나, 골판지의 골주름의 균일도를 유지하는 일제 기계 탓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우리 회사의 제품창고에서 병진네 카톤 박스를 쓰고 있었다. 그 후 박스 납품처가 바뀌었는데, 사장의 친척 집이라고 하기도 했고, 박스가격이 훨씬 싸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두께를 줄이고 강도를 높힐 수 있는 값싼 설비가 도입되고, 납품의 연고관계 등으로 병진 아버지의 사업은 지영이 대학에 들어간 후, 부도가 난 모양이었다.

"그렇게 부도가 나고, 아버지는 재기할 사이도 없이 돌아가셨어요. 장례를 치르고, 큰 오빠 집으로 들어갔어요. 오빠가 회사를 다닌다 해도 저희 학비를 감당할 수는 없었어요. 아르바이트도 하고 해서 간신히 1학년은 넘겼는데, 2학년은 자신이 없었어요. 그때 노르웨이에 사는 저도 모르는 이모께서 저희 사정을 아셨는지, 저를 거두겠다며 오슬로 대학에 편입을 해보라고 했죠. 서류를 보냈는데 편입 허가가 났어요."

지영은 봄 여름 내내 돈을 벌었고, 노르웨이에 가기 전에,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노르웨이로 가기 전에 제 소원이 무엇인지 아세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정우씨를 한번 만이라도 보고 싶었죠. 그런데 그만 여기서 만나고 말았지 뭐예요."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지영을 보면서, 우리 둘에게 주어진 좁다란 시간을 생각했다. 조금 있으면, 산과 들이 물들며 가을이 깊어가고, 어느 날인가는 눈이 내리면, 지영은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호수가 넓고 피오드르 협만으로 돛을 높이 올린 범선들이 드나드는 아득한 곳으로 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리워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 곁에 있고, 내일 떠나는 것이 아니라, 2월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그녀가 남몰래 나를 그리워했듯이, 그렇게 그리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내일 함께 떠납시다. 아무 곳이나, 어디든지."

"그래요. 아무 곳이나, 어디든지."

2008/06/27 15:06에 旅인...face
2008/06/27 15:06 2008/06/27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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