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7/01 17:25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저는 떠납니다.

편지 위의 글이 눈물에 번질까 두려워하며 이 글을 쓰고 있어요.

이번 가을은 영혼처럼 맑고, 길은 아득해서 온 세상을 담고 있습니다. 멈춘 듯 가고, 쉬는 듯 거닐었던, 길 위에서 함께 나누었던 풍경과 이야기들을 언제쯤 다시 미소로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영원한 그리움으로 남을까요?

가을은 가는 것이라서 가을이라고 했대요.

지는 낙엽과 너무 멀어서 가 닿을 수 없는 들과 산맥들로 가슴에 아릿했어도, 잡아주신 손길 덕분에 따스한 마음으로 그 모습들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손을 꼭 잡고 많은 것을 보았지요.

지리산의 능선을 타고 도로 위로 내리던 땅거미 속으로
아우라지에서 산과 강이 사무치는 것을 보며, 춤을 추었고,
강과 바다가 갯벌 위에서 서로를 맞이하며, 빛으로 뒤채이던 그 모습들을 바라보며,
산사의 풍경소리 속에서 정적을 맞이했습니다.

그것들은 갈증이자, 기갈을 채워 줄 샘물이기도 했죠. 풍경에 지친 저를 시골장터로 이끌어, 얼큰한 생활의 모습을 함께 보았고, 시고 달콤한 사과와 귤을 사먹었죠. 달콤한 피로에 지친 제 다리를 그대에게 내밀었고, 제 발을 차디찬 개울에 씻어주셨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당신의 품에 제 머리를 파묻고 그대 가슴 속에 울리는 고동 소리를 듣는 것 뿐이었어요. 당신에게선 먼 길을 지나온 먼지가 가을 햇빛에 빨갛게 그을은 냄새가 나곤 했죠.

제게 주어진 사랑하는 시간은 터무니 없이 짧은 것이었지만, 그 시간들 속으로 세상이 그늘지고, 당신은 꿈결같이 다가와 저를 어루만졌습니다. 저는 기쁨에 가득한 빛을 퍼올리고 또 길어올렸습니다.

하지만 아쉬움에 가득한 저는 말씀드렸죠.

"절 꼭 안아주세요."

그리고 당신을 제 몸 가득히 채웠습니다.

제가 가야 할 곳은 아주 멀어서, 대양과 대륙을 시간이 지나는 여정 속에서 몇번이나 당신을 꺼내보아야 한답니다. 꺼내 볼 당신은 여기에 있기에, 당신의 체취와 그림자와 눈동자 속에 담겨있던 풍경들을 가슴 속에 차곡차곡 담아갑니다.

우리가 함께 걸었던 길 위로 은행나무 잎이 겨울바람에 지고 나면, 눈이 내리겠지요. 그 곳에 당신이 홀로 남아계시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이제 당신을 홀로 남겨둔 채 떠납니다.

제가 떠나면, 당신이 아파하실 것을 알면서도 인사조차 드리지 못하고 갑니다. 당신을 만나고 사랑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꿈이었기에, 꿈으로 사라집니다.

가슴 아프시겠지만, 제 말씀을 들어주세요. 그리고 찾지 마세요.

당신과 조금만 더 함께 지낸다면, 다시는 당신을 떠나지 못할 것 같아 먼저 떠납니다.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깨끗한 여자가 아니랍니다. 힘들고 피곤한 시간 속에서 저는 몸을 함부로 굴려 돈을 벌고 학비를 마련하였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리석게도 술을 팔고, 그만 몸을 팔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더럽혀진 제 몸에 은총처럼 다가왔지만, 제 미소에는 늘 과거의 여울이 다가와 부딪히고,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여 가슴이 아팠습니다.

당신을 속이고 곁에 머물고자 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그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 사랑이 깊어갈수록 더 이상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제가 솔직하게 말하면, 다 받아주실 것 또한 알지만, 당신께 부끄러워 곁에 머물지 못함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편지 한 장으로 사랑하는 님의 가슴을 찢고 떠납니다.

이렇게 이기적인 저를 용서하세요. 아니 미워해 주세요.

사랑합니다, 정우씨.

마지막 입맞춤도 남기지 못하고 떠나는 저를 용서하세요.

천년이 하루 밤의 꿈이기를...

어리석은 지영 올림

2008/07/01 17:25에 旅인...face
2008/07/01 17:25 2008/07/0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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