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들-07

헤어짐

사랑이 상상(꿈)의 세계로 회귀하는 과정이라면, 타자의 권위와 율법이 지배하는 현실이라는 상징의 세계의 언어와 약속은, 꿈의 세계에서 무력합니다. 꿈 또한 깨어나면 그러해서,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언어로 된 맹세는 그만 허무하게 깨어지고, 단 한순간도 처절하게 사랑했던 기억도 떠올릴 수 없으며, 왜 헤어졌는지 조차 막연합니다. 아침이면 꿈속에서 했던 아름다운 사랑의 약속과 밀어는 단지 꿈에 불과한 것처럼, 그렇게 헤어지고 추억 속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많은 살아있는 자들이, 자살한 자를 자살에 이르게 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꿈으로 맺어진 연인들이 마침내 현실을 맞이하게 될 때, 자신이 왜 그 사람을 사랑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반면, 상대편의 유치함과 인격적인 취약점 등은 노골화되며, 자신이 그러한 사람 앞에서 갖은 재롱을 떨고 콧소리를 질러댄 것에 대해서 모멸감마저 느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파경에 이른 연예인들은 “아직도 사랑한다. 하지만, 서로의 성격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친구로 남기로 했다.”라고 억지로 헤어짐의 이유를 만듭니다. 하지만 정작 헤어지는 이유는 꿈에서 깨어났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일 뿐이지요. “사랑했었고, 영원히 사랑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사랑하지 못할 것 같다.”라고 솔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여태까지 죄없는 제 친구들을 드립다 씹은 만큼 이번에는 실없는 제 이야기를 한자락 읇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으로 여자라는 종족을 만나게 된 때는 열아홉 때였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후였죠. 그 전까지 여자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남자니까 조금은 있었다고 칩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저는 사춘기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여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것이라곤, 왜 여자들은 하필이면 아래가 터진 치마를 입고 다니는 걸까? 하는 정도였으니, 문제는 좀 심각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한번은 친구 놈과 삼선교의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서 우리 둘 다 차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또래의 여학생이 보였고, 아무 생각없이 다가가서,

“야! 회수권 있으면 좀 빌려줄래?”라고 말했습니다.

여학생은 당황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더군요.

그래서 “갚아줄테니까 염려말고, 우리학교는 ○□, 그리고 내 이름은…” 하는 차에 여학생은 치한에게서 벗어나려는 듯 아무 버스에나 올라타고 말았습니다.

결국 회수권이 없었던 우리는 삼선교에서 종로3가까지 걸을 수 밖에 없었고, 친구는 저에게 “야가 뭐냐? ‘저어기 죄송하지만…’하고 넌즈시 말을 붙여야지 안되느냐?”, “숙녀에겐 존댓말을 쓰는 법”이라는 등 짜식은 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으면서, 지가 무슨 숙녀학의 대가라도 되는냥, 저에게 “자고로 여자란…”하고 거품을 물더군요.

“너는 그렇게 예쁜 여자애 앞에서 떨리지도 않느냐?”하고 묻더군요. 하지만 저는 회수권이 목적이었기에 그 여고생이 예뻤는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죠.

“걔가 예뻤냐?”라고 물었더니,

“내가 졌다. 너란 놈은 눈알은 어디다 두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는 핀잔과 함께 여자에 대한 이야기는 중단되고 말았죠.

그러다가 그만 대학에 들어갔는데, 대학이라는 데가 수업도 별로 없고, 또 배울 것도 없다는 것을 간신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방이나 당구장 등에 출입을 시작한 나에게, 어느 놈이 다가와 연애는 전공필수라고 씨부렸습니다.

저는 정말 그것이 전공필수인 줄 몰랐습니다. 교양과목인 줄 알았거든요.

하여튼 여자를 사귀고 싶은 생각도 없는 상태에서 미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미팅에서 보기 좋게 툇짜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교정의 나무에 물이 오르기 시작했고 우리 신입생들도 슬슬 친구가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울리다 보니 미팅에서 여자친구들을 사귀고 어쩌구, 놈들의 수다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놈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왠지 저만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팍 들더군요. 잘못하다가는 여자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대학 종치는 것이 아닌가? 혹시 여자친구 하나 없어서 대학 축제도 못가고 방구들과 살을 맞대고 며칠을 지내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미팅 장소에서 생면부지의 여자를 앞에 놓고 맞이할 그 어색함과 툇짜를 맞을 때, 어린 자존심에 주아악 가는 기스감 등을 생각해보면, 그냥 이대루 살다 죽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싸가지 없는 한 놈이 지는 꼭 여자친구의 손이라도 잡고 태어난 것같은 폼을 잡으며, “너 아직도 여자 친구 하나 없단 말이냐?”하며,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여자를 사귀기 위해서는 용기와 박력, 세련된 매너, 능란한 화술 등등을 이야기하며, 너같은 놈이 평생가야 여자친구 하나 사귀어 보겠느냐는 식으로 저를 내리깔아 보더군요.

그래서 짜식에게 넌 어떻게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꼴란! 놈도 미팅에 나가서 처음으로 여자를 사귀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참 드러워서 까짓 것 나도 여자친구 하나 만들면 되지 않겠냐?”고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란 놈은 짜식이 씨부린 남녀상열지사에 필요한 구비요건, 즉 용기와 화술 그리고 세련된 매너 그런 것은 하나도 없고, 제가 가진 것이란 외롭고 넘쳐나는 시간 밖에 없더군요.

그래서 그 지랄같은 미팅에 다시 나갔습니다.

그 날따라 뭔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제 몰골은 그랬습니다. 이부가리로 머리를 쳐야하는 무지막지한 고등학교를 다닌 탓에 제 머리는 채 자라지도 않아 머리카락이 곤두선 상태였고, 무슨 이유인지 그 날따라 교련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화문의 미팅장소에 당도할 때 즈음에는 이미 시간은 이십분 쯤 지나있었고, 다방의 계단에 오를 즈음에는 숨이 턱에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 주변이 없는 저로서는 그것이 다행이었습니다.

누가 제 짝일까 노심초사, 기다리다 보면 그 짧은 시간에 무수한 생각들이 스쳐지나고, 혈압이 오르면서 침착하고 고요한 마음이 부글부글 끓다가 마침내 주선된 여자 앞에 앉게 되면 머리 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되어 아무 말도 못하다가, 간신히 “저어기~ 제 이름은…”하고 더듬다가 그냥 툇짜를 맞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런데 숨이 차서 헐떡거리며, 약속장소에 들어섰을 때 한자리가 비어 있었고, 그 앞에 할 일 없던 여자가 앉아 여기 저기를 두리번거리며, 짝도 없이 홀로 버려진 그 공허한 시간을 꼴딱 꼴딱 삼키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앉으며,

“죄송합니다. 여기가 제 자리가 맞겠죠?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해서 마음 상하신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늦어서 가신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저에게 불가피한 일이 있어서 늦지 않기 위해서 버스 안에서도 뛰었지만, 결국 이렇게 늦고 말았지 뭡니까? 다시 한번 저의 결례를 용서하십시요.” 기타 등등의 말을 순식간에 씨부렸습니다. 제가 태어나 어머니 빼고 여자에게 그렇게 말을 길게 해 본 적은 제 누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난 후, 저는 여자에게 말을 거는 방법이 막걸리 마시는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시에는 아직도 쌀이 모자라 혼분식을 장려하던 때로 밀가루 막걸리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막걸리를 걸지게 한두되 먹으려면, 첫잔에 조금씩 꺽어마시면 안됩니다. 첫잔을 완샷으로 쭈욱 들이켜야 목구멍이 열리고 뱃 속도 막걸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그 다음 잔도 잘 들어갑니다.

제가 그 여자에게 따다다 지껄이고 난 후, 가슴이 후련해지며 이제부터 여자에게 말을 걸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그 후 통성명, 호구조사, 고향, 학력사항 등을 묻고, 제가 이와 같이 숭고한 미팅장소에 살인실습복(교련복)을 입고 나오게 된 자초지종과 밤송이와 같은 제 머리에 대해서 떠들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격조있고 품위를 유지한답시고, 소근거리기 만 하던 옆 테이블에서도 저한테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같은 과 친구들이 이 말 저 말 참견을 하며, 분위기가 약간 느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경양식 집으로 가서 고기도 썰고, 생맥주도 한 잔하자고 했죠.

그렇게 해서 저도 간신히 여자친구라는 것을 하나 장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음에 어디에서 만나자 하며 전화번호 주고 받고 광교로 내려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탄 후, 저는 제가 무척 한심한 놈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버스 손잡이를 잡고 흔들흔들 집으로 가다보니, 그 여자애의 얼굴에 대해서 생각이 미쳤습니다.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리 예쁘지는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버스에서 내려서 집으로 가는 길에 잘 생각해보니, 제 꼬라지가 예쁘다 아니다를 가릴 처지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단기 연애 실습용 교재로 쓰자 하는 그런 못되 쳐먹은 생각을 하고 있더군요.

그리고 본격적으로 여자친구를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고민이 하나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제 신앙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자 어머니가 이제부터는 교회에 다녀야 한다고 했고, 할 수 없이 대학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매주 지도교수가 성서에서 나온 구절의 상징에 대해서 매주 하나씩 질문을 했고, 대학부의 누구도 그 답을 하지 못했지만, 저도 모르게 그 모든 상징의 의미를 풀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지도교수는 저한테 어떻게 그런 의미를 알게 되었냐고 물었고, 성경 구절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답이 떠오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에게 하나님의 은사가 머물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다 어느 날 저에게 기도를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짧은 시간동안 기도를 어떻게 할까하며 머리 속으로 기도의 문구를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감동적인 기도가 될까를 생각한 후에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한숨처럼 아멘들을 외쳤고, 눈을 뜬 교수가 저에게 이런 감동적인 기도는 주님께서 인도한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는 하나의 의도된 연출이며, 기교에 불과한 것으로 기도를 올리는 제 가슴 속은 공허했고,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하나님의 은사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저는 늘 믿음과 사랑과 같은 것이 제 가슴에 차오르고, 가슴 속에 가득한 참회로 부터 쏟아져 내리는 눈물 그리고 구원을 바랐습니다.

하지만 매주 예배 시에 교회에 앉아 목사님의 기도와 설교를 듣고 통성기도를 해보아도 제 가슴은 공허하고 아무런 감동이 없었습니다. 저는 무료한 시간들을 억지로 떼우고 있었기에 교회를 그만 다니기로 했습니다.

그것처럼, 여자친구를 만나면서도 저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제 가슴이 텅비어 있다는 느낌. 아무도 사랑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그녀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그저 운이 없는 것이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라는 까뮈의 이야기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못생겨서 사랑하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점차 변신을 시작했고, 볼 때마다 예뻐지고 있었고, 가끔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나 자신의 늘씬한 다리를 제게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불행에 대한 예감은 저에게만 아니라, 그녀에게까지 미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절 좋아하는 데까지는 괜찮은데, 만약 사랑이라도 덜컥 해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상대편은 떡 줄 생각도 없는 데, 김치국을 들이마시고 있었습니다.

사랑이란 아무런 규정도 없고, 사랑의 실체를 파헤치고자 껍질을 벗기면 벗길수록 더 허무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을 훗날 저는 간신히 알았습니다.

사랑은 그냥 사랑하는 것 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초조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편지를 보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가 쓰여있었습니다. 저는 그 시를 해석해보려고 하다가 그것은 단순한 풍경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고, 불현듯 제가 편지를 쓸 줄 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외삼촌과 아저씨들이 파월장병이 되어 남십자성이 바라보이는 곳으로 갔고, 간혹 일요일이면 아버지는 편지를 쓰게 했습니다. 그들은 글도 잘 읽지 못햇던 저의 편지를 받고 형과 누나에겐 답장을 안해도 저에겐 꼭 해주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5학년 때 학교에서 위문편지를 쓰게 됐는데, 제 편지가 어느 시골학교 선생을 하다 입대한 장병에게 갔습니다. 그와 저의 편지는 6개월인가 지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수업시간 중에 담임선생님께 전갈이 왔고, 담임은 저를 불러세우고 몇개월동안 국군장병과 편지를 주고 받은 착한 학생이라고 칭찬을 하고, 밖에 군인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으니 나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운동장의 한쪽 구석에 용맹하기보다 수줍은 군인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그와 저는 한쪽 벤치에 앉아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하며 그렇게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교실 창으로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아무런 할 말도 없이 내 앞에 불쑥 나타난 수줍은 군인아저씨가 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했지만, 그는 조용히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공부는 잘하니?”하고 간신히 물었고 저는 “그럭저럭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지 모를 떡을 한보따리 저에게 주더니 “그럼 간다. 편지할께.”라는 말을 한 후, 떠나갔습니다.

교실에 돌아가니 휴식시간이 되었고, 아이들은 왜 병신같이 아무 말도 안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냐고 힐난을 했고, 넌 그렇게 할 일이 없냐, 그깟 위문편지를 몇달씩이나 쓰게? 등의 말로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 후 군인 아저씨의 편지가 왔고, 저는 그 편지를 찢으며 내가 편지를 다시 쓰면 성을 갈겠노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제 짝의 협박에 못이겨 연애편지라는 것을 써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기억들을 떠올리며, 여자친구의 편지에 답장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제 최초의 연애편지인 셈입니다.

하지만 풍경화와 같은 아무 의미없는 편지에 대해서 답장을 쓰기란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시 잇빨을 갈며 읽고 있던 ‘말테의 수기’의 문체를 흉내내가며, 정말로 무의미한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동네 입구에는 시장이 있습니다. 그 곳에 좌판을 열고 생선을 파는 아줌마가 있는데, 어느 날 그녀의 위로 따스한 햇볕이 떨어져 내렸고, 그때 나는 평화와 같은 것을 본 것 같습니다는 식의 글을 사전을 뒤져 한자를 섞어가며 한 세장쯤 써서 보냈습니다.

그 후 그녀를 만났고, 저의 편지가 누구나 돌려보아도 될만큼 아무런 내용도 없다는 반증일수도 있겠으나, 남자가 쓴 편지를 여자들은 돌려보며 서로 킬킬댄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그것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여자친구가 저의 편지를 읽고 나자, 자신은 그만큼 쓸 수 없다는 좌절감을 느꼈고. 더 이상 저에게 편지를 쓰지 않겠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 후로 사랑하는 상대의 편지를 기대한다면, 불필요하게 우아한 편지는 쓰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저는 제 친구들에게 충고를 하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렇게 멋들어진 편지를 썼다고 자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저는 틈만 나면, 답장도 없을 편지를 썼습니다. 상대편을 염두에 두고 편지를 쓰다보면, 제가 그녀를 조금은 좋아하거나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이 다가왔고, 밤이면 더욱 그랬습니다.

제 편지는 계속 제 여자친구의 친구들 사이에 읽혀지고 있었고, 제가 보낸 편지에 대한 반응을 그녀의 친구들로 부터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녀를 좋아하긴 했지만, 아직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저를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친구의 짝과 함께 만나왔던 그녀가 단둘이 만나기를 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둘다 걷기를 좋아했는데, 간혹 그녀에게서 우울한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고 때론 몹시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만 만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묻더군요,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러냐고 했더니, 자기가 나이가 많다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더군요. 그래서 꼴란 1년 가지고 뭘 그러느냐고 했죠. 그랬더니 자기는 4월생이고 나는 10월생이니까 물경 1년반이라는 나이차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가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고 친구처럼 사귀는 것인데, 나이가 다섯살이 많다고 해도 무슨 걱정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연인 사이가 아니라 친구 사이라면 어떻겠느냐고 되묻더군요.

속으로 우리가 언제 연인인 적이 있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저는 친구가 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고 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녀가 가슴이 벅찰 정도로 껴안아주고 싶은 저의 애인이 될 그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계속 친구가 되자고 앙탈을 부렸고, 저는 할 수 없이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그럼 우리 친구니까 말도 놓아야 되는 것 아니예요?”하고 말했고, 저는 “그래 이제부터 말 놓자.”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몹시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는데, 요구에 따라 친구가 되기로 하자,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기로 했죠.

늘 그녀를 집에 바래다 주고 했는데, 그 날부로 명동에서 “그럼 잘 가. 보고 싶으면 전화해.”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물론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았고, 전화 또한 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간혹 전화가 오면, 만나자는 곳에 나갔지만, 친구 이상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재수없으면, 저녁 한끼 얻어먹고 레포트나 대신 써주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여자나 남자가 친구하자고 하면 죽자고 안된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즐거운 여름방학이 시작되었죠.

여자친구가 보자고 해서 나갔더니 해변으로 여행을 가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남자에게 해변으로 여행을 가자고 하다니 미쳤냐고 물었습니다. 그럴 줄 알고 친구하고 친구의 사촌오빠 등등을 다 준비해놔서 문제가 없다고 하더군요.

어디로 가느냐고 했더니 포항 옆 칠포라고 하더군요. 저는 해변이라는 곳이 지루한 만큼 산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후 함께 갈 사람들이 모였고, 저는 바닷가에 많이 가보아서 잘 안다고 하면서, 바다라는 곳이 생각한 만큼 며칠을 보내기에 좋은 곳이 아니라고 했고, 숙소는 방을 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해변의 쏟아져 내리는 폭양의 열기를 피할 수 있다고 누누히 설명을 했습니다.

저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우리는 밤차를 타고 대구에서 열차를 갈아탄 후, 포항으로 가서 또 버스를 타고 칠포에 도착했습니다. 몹시 피곤한 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새로 개장을 한 해변의 주위에는 방을 구할 곳이 없었고, 타포린으로 막사 형태로 지은 간이 방갈로 정도가 다였습니다.

하지만 여행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그들은 동해의 푸른물과 길고 긴 백사장을 보자 경탄의 소리를 질렀지만, 그늘 한점 없는 그 해변을 보자 저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저는 잠시 수영을 하고, 피로감을 떨어버리기 위하여 방갈로에 잠시 누워있는다는 것이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오랫동안 잔 모양입니다.

갈증과 시끄러운 소리에 깨어났을 때, 이미 날은 저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행들은 무슨 일 때문인지 몰라도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멍한 정신으로 그들이 싸우는 이유를 알려고 했지만, 아무리 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몇번 말리다 도무지 안될 것 같아, 싸우는 그들의 한 켠에서 버너에 불을 피우고,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녁이 다 되었고 밥을 먹자고 하자,

“너 혼자 밥을 하게 해서 미안하다”며 배가 고팠는지 싸우는 것을 중지하고 밥을 먹었습니다. 그들이 밥을 먹는 것을 보며, 힘들게 온 만큼 제발 싸우지 말고 즐겁게 지내다 가자고 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한 놈이 미안하다며 사과조로 시작한 말꼬리를 붙들고 그들은 다시 실랑이를 벌이더군요. 그들을 말리려다 저마저 말씨름에 빠져들까 어둠이 내린 해변으로 갔습니다.

기나긴 해변을 거닐며, 아무래도 이번 여름 여행은 파장이 난 것 같다는 생각에, 부산의 이모집이나 갔다가 서울로 올라갈까 하며 방갈로로 갔습니다.

제가 방갈로에 당도했을 때, 도착한 지 반나절도 안되었는데, 여자들이 울며 불며 짐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자들의 짐을 하나 슬쩍 빼내 다시 해변으로 갔습니다. 그러자 여자들이 짐을 내놓으라며 제게로 왔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가는 것은 좋다. 하지만 지금 버스가 있을지도 모르고, 버스가 있다고 해도 포항에서 숙소를 정해야 한다. 하지만 여관이나 여인숙이 어린 여자들이 들어가 자기에는 좀 문제가 있다. 그러니 날이 밝으면 이동을 하고, 너희들은 이곳에 와서 놀지도 못하고 싸우기만 했으니 아깝지 않냐고 하며, 더 이상 놈들과 말씨름 할 필요없이 너희들끼리 놀라고 하고, 저는 중립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다음날 약간의 소강상태가 있었지만, 서로 부딪히기만 하면 말트집을 잡았고 그들의 싸움은 끝이 없었습니다. 해변이 너무 적적하여 서로 싸우는 것인지도 모른다며, 그들에게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산의 송정해수욕장으로 옮겼습니다.

제 말대로 민박집의 제법 반듯한 방을 두개 구했고, 해변에는 솔밭도 있고 주변에 고고장, 호프집, 그리고 사람들도 많아서 칠포처럼 황량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장을 풀자 마자 그들은 다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알 수 없고 지칠 줄 모르는 그들의 적의를 바라보자, 제 속에서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같은 것이 싹트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주먹질을 하던지 따귀를 갈겨버리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숙소를 나와 송정해수욕장 앞의 도로를 거닐었습니다. 그러자 좀 진정이 되었고, 버너가 고장이 났기에 고체연료와 먹을 것을 가지고 돌아와 민박의 방 앞에서 막 불을 피우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그때, 여자들이 저에게 왔습니다. 제가 이제 그만 싸우기로 했냐고 물었더니, 그 중 여자친구가 적의로 가득한 눈빛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하더군요.

“이제 너랑 헤어지기로 했어. 너한테 환멸을 느꼈거든.”하고 등을 돌리더니 부서져라 방문을 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방송송출시간이 지난 라디오에서 새어나오는 그 소음이 내 머리 속에서 지이이 하고 울려대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다리는 힘없이 꺽였고, 벽에 등을 대고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워물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하고 자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소리를 지르거나, 방문을 와당탕 잡아 열고 그녀의 멱살을 거머쥐고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며? 무엇이 너한테 환멸을 느끼도록 했느냐”고 묻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분노를 꽉 누르고 내 가슴 속의 먼지들이 차곡차곡 내려앉기를, 그래서 흥분하지 않고 왜 저한테 환멸을 느꼈냐고 차분하게 묻고 싶었습니다.

저는 끓고 있는 찌개를 내버려둔 채, 해변으로 나가 홀로 저물어가는 바다를 한참동안 보았습니다. 해변에 무너져내리는 파도소리 속에 환멸이라는 소리가 뒤채이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어두워진 백사장에 벌렁 누워 하늘을 보고 있을때, 여자친구를 뺀 여자 둘이 왔습니다. 그들은 백사장에 누워있는 제 옆에 앉아 저한테 미안하다고 하며, 너처럼 온당한 행동을 한 남자애는 처음이다. 이번 여행 중에 너무 마음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자신들도 여자친구가 무슨 이유로 네게 그런 모진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하고는 나를 남겨둔 채, 민박으로 돌아갔습니다.

남자놈들이 이야기를 들었다며, 술을 사겠다고 왔습니다. 우리는 술을 마셨고 늦게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늦게 일어나 방문을 열었을 때, 옆 방에 있던 여자애들이 줄행랑을 논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루인가 이틀을 더 머물다가 그 곳에서 여차저차 다른 여자를 사귀게 되었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여름동안 환멸이라는 단어를 놓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 환멸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그녀는 뚜렷하게 알지 못했을 겁니다. 그것은 너란 놈은 아주 재수없는 놈이라는 뜻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가슴 속에 깃든 증오심을 폭발적으로 쏟아내기 위하여 찾아낸 아주 유효적절하고도 치명적이며, 야비한 단어라는 것을 저는 물론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꿈이 사라졌다.>라고 이해했습니다. 얼마나 정확한 표현입니까? 그러나 표현이 정확하다고 듣는 사람의 기분이 좋으란 법은 없습니다. 그녀는 꿈이라도 꾸었다지만, 저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묻고 싶었습니다. “네가 꾼 꿈이란 도대체 뭔데?”라고… 그 해 7월은 장마철인데도 비 한번 내리지 않는 염천이 계속되더니, 8월이 되자 비가 내렸습니다. 비는 줄창나게 내렸고, 송정에서 만난 여자를 만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중전화통이 보였습니다.

저는 호주머니 속에서 십원짜리를 꺼내들고, 그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비는 전화부스가 찌그러져라 내렸고, 그녀의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 누굽니다. 죄송하지만 아무개를 바꿔주시겠습니까? 잠깐 기다려요. 그리고 정적. 그 후 어둠 저편에서 빛을 반짝이며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그리고 그 소리 속에 섞여드는 빗소리. 그리고 여보세요? 응 나다. 침묵. 한번 만나자! 그럴 생각없어. 우리는 끝났잖아? 아니다 하나 묻고 싶은 말이 있어서 너를 만나려고 한다. 아니다.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는 질문인지도 모르겠군. 그럼 잘 있어. 탈깍!

하지만 저는 끊어진 수화기를 들고 한동안 뛰~하는 소리를 들으며, 전화부스의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쳐다보았습니다.

수화기를 전화통에 걸쳐놓고 부스 밖으로 나와 쏟아져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가는 골목길로 걸어내려 갔습니다.

저는 여자친구한테 그만 호되게 걷어채였고, 헤어졌다는 것이 뚜렷했는데, 갑자기 제가 그녀를 오랫동안 사랑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꿈에서 막 깨어났는데, 불면에 몸부림치던 저는 달콤한 꿈나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시다고요?

그 후 저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만나, 어떻게 하면 나를 좋아하게 할 수 있을까로 골머리를 싸매다 그만 가을을 날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해 가을과 겨울 조금씩 아팠지만, 어린 가슴이 전혀 몰랐던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씩 눈을 뜰 수 있었고, 그것이 재미가 있는 것만 아니며, 사랑 앞에 선 한 인간이 얼마나 유치하고 나약하며, 좌절하고 때론 감당할 수 없는 열정 속에 빠져 밤을 세우게 되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한마디에 매혹되어 창문을 열고 밤 하늘의 별빛을 헤아리게 되는 것인지를 간신히 간신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늘 영원한 사랑을 꿈꿉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늘 살아가야 할 현실이라는 상징의 세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꿈에서 깨어나 덜컥 현실이라는 세계에 내동댕이 쳐지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헤어짐은 아플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그만 쓰기로 하죠. 최지우가 나오는 스타의 연인을 보아야 하거든요.


1. 참고: 사랑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들-3

2. 라캉의 도식

Lacan/diagram

id(S)는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utre: 타인)을 봄으로써, 자아[(moi) a]를 형성해 나감, 그러나 타인과 자신이 다른 것을 알지 못함. 그래서 자신이 보는 엄마[ⓐ’utre] 또한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엄마가 지니지 못한 팔루스(남근)라고 상상함.—상상적 관계

아버지의 이름[A utre: 절대적 타인, 율법, 언어의 세계]이 나타나 더 이상 엄마의 남근이기를 고집한다면, 거세를 하겠다고 소리침. 거세의 공포를 느낀 아기는 아버지의 이름 밑에 굴복하고 엄마의 팔루스이기를 포기하고 상징(언어)을 받아들임.—상징적 관계

여기에서 헤어짐이란 이자적 상상적 관계에 빠져있던 두 남녀 사이에 삼자적 상징적 관계가 진입하는 것으로, 상상적 관계에서 서로 상대편의 팔루스(남근이나 그 반대)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상상 속으로, 제삼자(아버지의 이름)가 끼어들어 서로가 상대편의 팔루스가 아님을 환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3. 기의와 기표의 관계

a, b, c, …… , n

팔루스

기표(a, b, c, ……., n)와 기의(팔루스) 사이의 선( )은 소쉬르에 의하면 자의적 결합을 뜻하지만, 라캉(J.Lacan)에 의하면, 기표와 기의 사이의 차단과 저항의 선, 무의식의 벽을 의미함. 즉 기의의 억압이다.

영원히 팔루스의 기표(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단히 기표인 a와 b, 그리고 c를 찾아 사랑의 여로를 계속하게 되며, 만나고 헤어지며, 결혼 후에도 불륜을 저지르거나 불륜을 꿈꾸곤 한다.


걷어채여 엉덩이가 아프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헤어짐의 아픔이란 세상을 풍성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지요?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유리알 유희 09.01.09. 00:21
    아, 저는 읽다가 쫓겨 납니다. 넘 재미 있어서 자정이 지난 줄도 몰랐네요. 이따가 노트북으로 다시 보렵니다. 역시 여인님의 필력은 대단하십니다.

    다리우스 09.01.09. 02:33
    벌써 헤어짐이라뇨? ㅜㅜ 헤어짐의 반복을 통해 결국 사랑의 이데아에 이르셨군요,처음부터 너무 이성적이셨던 듯 합니다.^^
    ┗ 旅인 09.01.09. 12:59
    회자정리까지고요, 거자필반이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 엉덩이는 어렸을 때 숙제안해가고, 성적 나빠 하도 맞아봐서, 몇번의 걷어차임에는 까딱없었습니다. 그래요… 너무 이성적이라서 탈이라니까요.

    스윗 노벰버 09.01.09. 03:20
    와~, 미팅도 하시고, 민박 여행도 가시고…무뚝뚝한 분이셨던 것 같은데, 그래도 이런 아기자기한 기억도 가지고 계신는군요.^^, 저는 대학시절 너무 칙칙하게 보낸 것 같아요. 친한 친구들 몇몇이랑 여행 가끔다녔던 기억 외엔 거의 대부분 방콕만…ㅜㅜ 새내기 때 기타동아리에서 MT 따라갔다가 선배들 복잡한 연애사가 거슬려서 동아리도 탈퇴해버리고…대학생활 혼자 겉돌았던 기억밖에 없네요. 부럽습니다, 여인님.
    ┗ 旅인 09.01.09. 13:02
    저 때까지만 해도 제가 명랑한 축에 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행은 많이 다녔는데 친구들과 함께 간 여행과 혼자 간 여행이 반반 정도입니다.

    truth 09.01.09. 12:42
    때론 육이 가라앉을시에 다가오는정도의 깊이나 그것에 몰입되어 흐를수있는 사색의파도타기는 격돌하지않는 안정감 고요함이 있어좋습니다.잘쉬었습니다.

    truth 09.01.09. 23:45
    지금생각해봐도..그녀는 왜..그랬을까..왜 그런말을 했을지 이해도 되어집니다..그래도 ..단어선택엔 문제가 있었단생각이..좀 살만한듯 생각에 꼬리가 물렸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여인님.
    ┗ 旅인 09.01.10. 07:34
    단어의 선택보다 제게 문제가 있었겠죠. 남들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흘러가고 즐거워하고 때론 화내고 소리치고 하는데, 저는 늘 그 모양 그 꼴이고, 제 기분에 대해서 물으면 호오 감정이 드러나지 않고 그냥, 그저그래, 약간 피곤하군식의 표현 밖에 안하고 있었으니 가슴 속에 맺힌 것이 많았을 겁니다. 그 해변에서도 자신들은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저 만 그 속에서 쏙 빠져나와 니들끼리 잘 싸워봐라, 난 내 할 일이나 하겠다 하는 식의 태도야 말로 찬물도 아니고 더운 물도 아닌 미지근한 딴물이었던 것이죠. 저의 어정쩡한 태도에 대한 얄미운 감정에 그동안 말씨름 가운데 차곡차곡 쌓여온 분노가 뒤섞이면서…
    ┗ 旅인 09.01.10. 07:35
    자신의 감정을 그런 단어로 표출했을 겁니다.
    ┗ truth 09.01.10. 10:55
    ,,,글을 대하면서 여인님의 나름의행동방식에 저 개인의해석이 그러했었는데..여인님도 지금에선 그것을 아셨던거군요…^^그러게요..그래서 나중엔 그녀가 이해가 되어졌어요..그래도 환멸은 ㅎㅎ 암튼 좋은 렛슨였을듯합니다. 각자 표현이 다를뿐이지 여인님께서 그런생각들로 행동하신건 아닐것이란생각이 더 지배적입니다.^^ 인간적이신 여인님맞으시거던요..^^
    ┗ 旅인 09.01.11. 08:47
    하지만 저마저 그때 길길이 날뛰고 했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저 나름대로는 온당하게 처신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무지하게 억울하고 속이 뒤집어졌다는 사실만 알아주시기를…^^
    ┗ truth 09.01.11. 13:10
    맞아요 저역시 그들보다는 여인님글을 읽는사람여서 친애하는작가입장에 우선되는 이기심이 발동하더군요. 정말 황당하다 그여자분 심하셨단그런생각도..^^ 그러게요..그상황에 표현이달랐을뿐 여인님은 최선의 조용한노력을 다 하신거라생각되어졌어요. 다..알고도 남을듯한 레테동지 트루쓰 사실을 다 알고있답니다.^^ 다양한삶의 주인공였고 지나는행인였고 여전히 아름다운삶의 주자이신 여인님 삶을 글로 ㄴ누심에 늘 감사합니다.^^
    ┗ 旅인 09.01.11. 21:09
    트루스님께서 이렇게 이해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유리알 유희 09.01.10. 08:10
    성장소설이라고 할까요. 생의 여정이라고 하고 싶어집니다. 참하게, 하실 건 다하고 한 시절을 무사히 잘 통과하셨군요. 여인님의 글을 보면서 그때의 저, 를 새삼 떠올려 보지만 저는 이런 추억거리조차 없군요.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외면하고 내가 외면코자 했던 이는 죽어라 나를 쳐다보는, 네, 그래서 쓸쓸한 한 철을 살았을 뿐. 후후 꿈을 깨면 곧바로 환멸이 온다. 그러나 그 간극을 정이 채우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사랑은 지나고 보면 아름다운 것이 된다고 제멋대로 생각하렵니다.
    ┗ 旅인 09.01.10. 07:37
    추억거리보다는 그저 실패담일 뿐이죠. ^^

    산골아이 09.05.16. 21:00
    제 경험으로는 스물살 안팎엔 이유없이 만나고 있는 남자가 꼴보기 싫어지기도 하더이다. 이성을 사귀면 뭔가 근사한 것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면 만남 자체도 시들해지고. 아마 여자가 그래서 그랬을 겁니다.
    ┗ 旅인 09.05.16. 21:53
    저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나만 괜찮았던 모양이네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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