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그늘에서…01

건너편 섬의 그늘은 좁은 여울목을 건너와 툇마루까지 와 닿는 것만 같다.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집 앞 도로 건너편에 가파른 언덕이 있다. 늘 아침 열시가 지나서야 그 언덕 위거나 섬의 사이로 햇빛이 들곤 했다. 언덕 위로는 국도가 있다. 도로는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로 이어지거나, 좌회전 남녘 해안으로 이어진다. 오래 전 도로를 몇 번인가 지난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사랑이라든가 그런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것이 무용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이유를 알고 싶다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빛이 바닥에 닿지 못하는 이곳으로 와봐야 한다.

차 한 대 지나지 않는 죽은 도로에 면한, 전봇대에 무슨 글자나 그림이 그려졌는지조차 판독할 수 없는 포스터가 십년이 넘도록 붙어있는 이곳은, 도로와 바다 사이로 여섯채의 집이 나란하다. 왜 이들이 육지에서 몰려나 뚝의 끝에 빌붙어 사는지 알 수 없다. 너무 오래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들이 도로와 바다 오미터 폭 사이에 끼여 산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집들은 담도 없이 도로에 바짝 붙여 미닫이 문을 내고 있었고, 서남쪽으로 뻗어있는 만을 향해 두세평 정도의 마당이 있다. 마당의 끝은 뚝의 끝이자, 바다다. 마당의 끝, 그러니까 마당 끝에서 수직으로 수면까지 높이는 조금 때면 가슴 높이, 사리 때는 한 뼘이었다. 물이 들이차면 바다는 마당까지 들어설 듯 했다. 서해는 간만의 차가 심한 곳은 구미터라고 한다. 서해에 비하면 이곳의 바다는 믿을 수 없이 게으르다. 게으르기가 한량없어서 파도소리도 없다.

마을 사람들은 강어귀라서 그렇다고도 하지만, 누군가는 일 킬로 정도 위로 가야 강이 끝난다고 한다. 바다와 강은 서로 포개지기 마련이어서, 어디까지가 바다고 강인지 알 수 없다.

게으른 바다도 오후가 되면 섬을 지나 서남쪽으로 빛들이 명멸했다. 오전동안 그늘에 젖어있던 마당 안까지 햇빛은 술렁이며 들이찼고, 스레트 처마의 구석진 곳까지 샅샅이 핥고 지났다. 빛이 벽 위까지 차오르면, 빛은 엷어지고 바다에 핏빛이 감돈다. 그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고, 시계와 기억으로 잡을 수 없다. 네시인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여섯시 같기도 하다. 아홉시라고 문제될 것은 없다.

마당의 장독뚜껑 위에 앉아 노을이 서쪽 내륙의 야트막한 산 그림자 위로 차오르는 것을 보면, 밤이 온다는 것 때문에 눈물이 났다. 눈물은 밖으로 흐르지 않는다. 코의 비강을 통하여 목구멍 속으로 흘렀다. 그래서 슬프지 않다. 목구멍에 차오른 눈물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고, 터질 것 같은 고요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어둠이 내륙과 바다 그리고 섬마저 침식할 때까지 그렇게 있어야 한다.

먹먹한 바다에서 그녀가 뒷물하는 소리가 들린다. 노을에 결박되었던 정신이 문득 풀려난다. 뒷물소리는 거룻배의 노 젖는 소리거나, 만의 끝 점점이 떠있는 섬들이 끝나는 곳, 아니면 만을 둘러싼 기나긴 해안에 하얗게 허물어진 파도들의 아우성이 바람결에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각의 바람은 내륙에서 바다로 부는 법이다. 저녁이면 바다 비린내는 잠잠했다. 비린내가 없는 밤에는 갈매기는 날지 않는다.

마당의 끝에서 오줌을 눈다. 바다에서 쪼로록하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큰 것을 보니 만조인가 보다. 저녁을 먹지 않았지만, 그다지 배고프지 않다.

언제 밥을 먹어야 하며, 자야하며, 깨어나야 하는지 생각해본 지 너무 오래된 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과연 살아있기나 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때로 새벽 세시쯤 마당에 나와 밤바다를 내다본다. 달빛이 밝으면, 어둠의 깊이와 밤바다 위로 저며드는 금빛 월광을 삶이라는 가벼운 것으로 감내할 수 있을까? 때론 새벽의 응결된 공기 속으로 바다 안개가 피어오르곤 했다. 안개에 달빛이 닿으면, 가녀린 수천억만개의 유혼들이 춤추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에게 영혼이란 없다. 하지만 꽃이나, 그림자와 빛이 뒤섞이는 망량과 같은 곳, 녹색 그늘로 은은한 수풀 속, 자연이 달빛 아래서 춤추는 날아오르는 이 밤바다에, 혼과 같은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혼들이 오르는 달밤에는, 뒷물을 마친 그녀의 나신이 달빛에 뽀얗게 문지방을 넘고 있는 환상에 빠지기도 한다. 그녀의 노래소리마저 들린다. 길지만 숨을 삼키며 흐느끼는 소리라서, 분명 바다의 소리는 아니다. 강이 바다 속으로 뒤채일 때, 접히는, 울음을 삼키는 소리다. 좁은 섬과 내륙 사이의 여울을 지나는 바다 밑의 맹렬한 조류가 별빛을 받아 숨을 뱉아내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달이 지거나 빛이 흐려지며 서쪽으로 기울면, 이슬이 내린다. 이슬은 스레트 위에 눌러놓은 루핑이나 대야나 장독, 툇마루 뿐 만 아니라, 뼈와 관절, 위와 창자 속에도 맺혔다. 그래도 바다 위로 아침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아침이 오는 것은 느리기도 했지만, 때론 순식간에 폭발하듯 다가오기도 했다. 만의 끝으로 십 센티미터 폭으로 잘려진 수평선에 희미한 광채가 잠시 떠오른다. 광채가 꺼지면 새벽은 더 깊어진 어둠 속에서 맹렬하게 부풀어 오른다. 삼십분 쯤 지나면, 바다 위에 희미한 빛들이 소리없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수평선에서부터 해안까지 빛들은 만 한가득히 자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합창하듯 이곳 저곳에서 터졌다. 소리들이 끝나면, 아침이다.

“응 오우 응온 컴? 1잘 잤어요?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다리우스 08.10.19. 01:55
    헉 연재소설까지? 아, 잘 읽겠습니다. 이류님~ (카페 독서하느라 정신없음)^^,
    ┗ 이류 08.10.20. 08:39
    한 일년전 쯤 쓴 글입니다. 챙피하지만 올려봅니다.
    ┗ 다리우스 08.10.20. 09:17
    중국어에다 베트남어까지 두루 접하게 되니, 국제화의 조류가 다채롭습니다.^^
    ┗ 이류 08.10.21. 00:25
    베트남어 모릅니다. 간신히 몇개를 알아서 써먹는 것입니다.
    ┗ 다리우스 08.10.21. 00:49
    헉 그러셨군요, 전 소설 쓰려면 베트남어까지 배워야 될까를 고심중이었음.

    유리알 유희 08.10.19. 22:57
    소설까지 올려 주셨군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기대됩니다. 주어를 생략한 현재형의 시적인 문체, 독특함이 느껴집니다.
    ┗ 이류 08.10.20. 08:40
    감사합니다.

    산골아이 08.10.21. 02:49
    연재소설을 쓰시다니 부럽네요. 바빠서 여기까지 읽고 갑니다. 내리시지 않을실거죠.
    ┗ 이류 08.10.21. 15:59
    다 올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완료된 글이니 야금야금 올리겠습니다.

    지건 08.10.22. 06:20
    고적한 시간에…차분하게..읽었습니다…재밌습니다.

    truth 08.10.25. 07:09
    .
    ┗ 이류 08.10.25. 08:55
    첫 발걸음??
    ┗ truth 08.10.25. 15:03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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